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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100세 시대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나?

194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30일)

 

<부산일보>의 김효정 기자로 부터 '중위 연령'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한 나라의 전체 인구를 연령 순서로 줄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연령을 말한다. 인구학에서 인구 전체의 평균연령보다 중위연령을 더 의미 있게 따지는 것은, 실제 연령의 대표 값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남자 43.6세, 여자 46.5세로 평균 45세이다. 다른 말로, 대한민국의 실제 평균 나이가 45세인 셈이다. 

위 도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31.8세로 인구 구조학에서는 황금기로 불렸다. 노동 가능 인구가 71.7%로 높았고 그에 비해 부양인구 비율은 낮아 한 세기에 한 번 오기 힘든 성장기회라는 말도 들었다. 32세의 젊은 대한민국은 변화와 혁신에 빠르게 적응했고, 실제로 세계 최고 수준의 IT기술 발전을 만들어 냈다는 거다. 그러나 2030년이면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49.8세 즉 50세에 접어들 예정이라 한다. 태어나서 50년은 살아야 어느 정도 사회에서 중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미리부터 팍팍한 삶의 여정이 예약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중위연령이 높아지면 혁신과 유연성, 생산성의 하락이 따라온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그리 밝지만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은 늙어 가는 대한민국에 맞는 청사진과 전략을 서둘러 고민하고 제시해야 한다. 고령화 위기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새로운 정부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은 이미 1992년 중위연령이 38.5세에 접어들었고, 현재 일본은 중위연령이 50세에 육박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은 아무래도 변화에 대한 적응과 탄력이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다른 통계를 본다. 대한민국 생명표를 살펴보면, 1960년 52.4세이던 평균 수명이 2000년엔 75.9세로, 40년 사이에 무려 23.5세가 늘어난 사실을 알게 된다. 평균 수명이 1년에 반 살 정도씩 늘어난다. 이를 토대로 ‘21세기 삶의 공식: 30+30+30’이 가능하다. 예전에는 부모 보호 아래 30년 살다가, 부모 노릇 하며 30년을 살고, 환갑 이후는 자투리 인생, 즉 여생(餘生)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환갑 후 30년을 더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년 이 지난 현재는 
21세기 삶의 공식을 ‘30+30+40’으로 바꿔야한다고 하는 이가 많다. 정말 장수 시대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미리미리 노후 준비를 해 두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오종남 교수가 다음과 같이 4 가지로 정리해 답을 주었다. 그걸 오늘 아침 공유한다. 나도 잘 준비할 생각이다.
(1)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는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돈 버는 일과 불리는 일 양쪽 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제는 자식 보험이 유효하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식에게 ‘올인’할 것이 아니라 절반 정도는 노후를 위해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진정한 자식 사랑은 노후에 자식에게 부담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입장이 다른 만큼 각자 처한 상황에 맞추어 준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2) 기대수명 못지않게 건강수명이 중요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지식, 돈, 명예, 권력도 건강이 뒷받침될 때 그 가치가 빛난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근력을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암이나 고혈압 등으로 인한 고통도 크지만, 근육 감소로 인한 일상생활의 불편함 또한 문제다. 음주·흡연 등 잘못된 생활습관을 바로 잡아 성인병을 예방할 일이다. 습정양졸((習靜養拙, 고요함을 익히고 고졸함을 기른다)의 삶과 명상을 통한 하루하루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3) 행복을 추구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말했듯이 사람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행복을 느끼기는 어렵다. 행복이란 자기가 바라는 바를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따라 그 수준이 정해진다. 그러므로 바라는 바를 낮추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남과 나누고 배려하는 삶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4) 배우는 기쁨 또한 중요하다. 급변하는 세상에 배우지 않고서는 쫓아가기도 힘들거니와 설사 생활에 꼭 도움이 안 된다 해도 배움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100세 시대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나? 언제 시작해도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다. 남은 삶에서는 오늘이 가장 빠른 순간이다. 부담되는 노인이 아니라 도움 주는 어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일이다. 행복한 노후를 방해하는 3대 요소가 빈곤, 질병, 고독감이다. 그 중 나는 세 번째에 방점을 찍는다. 이를 위해, 내가 정한 노후 대책은 열심히 활동하고, 많이 접속하여 관계를 만들고, 그 활동 마당을 유지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일상을 명랑하고 즐겁게 영위하는 거다. 나 자신을 보다 더 활짝 열고 타자에게 접속한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의 항상성을 위해 지속하고, 타자와 접속하라. 이게 영성의 지혜를 알고 사는 길이다. 이게 삶의 성장의 길이다. 인생의 사는 맛은 활동과 관계가 많고, 잘 이루어지며, 그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선은 관계의 폭을 넓게 하고, 그 관계에 충실하며, 끊임없이 접속을 유지한다면, 원하는 활동이 확장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 중, 하나가 '활동을 한다'이다. 태양이 뜨면, 낮에 활동을 하는 거다. 몸을 움직이는 거다. 그 활동하는 곳이 직장일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 활동을 만들어내 어도 된다. 두 번째는 '누군가 또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거다.' 다시 말하면 접속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삶은 활동과 접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새로운 것이 생성되게 하는 거다. 특히 차이가 생성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진정한 차이는 어떤 것을 배우면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후에 빈곤해 지지 않기 위해 오종남 교수가 말하는 방법을 적극 실천할 생각이다. 오 교수가 주장하는 산수 시간에 배운 ‘분수’와 국어 시간에 배운 ‘주제 파악’을 ‘노후 대비 실천 방안’으로 말이다. 먼저 ‘분수 지키기’다. 부를 축적하려면 소득 범위 내에서 지출하고 나머지를 저축해야 한다. 이때 지출이 소득보다 많은 ‘가분수’가 되면 부채가 늘게 된다. 다음은 ‘주제 파악’이다. 자신의 소득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소비 행태를 따라서 돈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올바른 소비 생활이 아니다. 

어제 약속한 노자 <<도덕경>> 제14장의 나머지의 정밀 독해는 블로그로 옮긴다. 오늘 아침 시는 유안진 시인의 <마음 착해지는 날>이다.

마음 착해지는 날/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도덕경>> 제14장의 원문이다.

視之不見(시지불견) 名曰夷(명왈이) 
聽之不聞(청지불문) 名曰希(명왈희) 
搏之不得(박지불득) 名曰微(명왈미)  
此三者(차삼자) 不可致詰(불가치힐)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 
其上不曒(기상불교) 其下不昧(기하불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無物之象(무물지상) 是謂惚恍(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能知古始(능지고시) 是謂道紀(시위도기) 

어제에 이어 오늘은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부터 정밀 독해를 한다. 대부분은 "승승"을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으로 보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며 아스라하고 아득하여 이름 붙일 수 없다'라고 풀이하는 데, 최진석 교수는 "새끼줄처럼 두 가닥으로 꼬여 있어 개념화 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노자가 여기서 "승승"이라는 용어를 통해 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이 세계가 새끼줄이 꼬이듯이 반대되는 대립면들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반대편 것들끼리 서로 꼬이며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속태이기 때문에 개념적 언어로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반대편 것과의 관계까지 담을 능력이 없는 언어로 개념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거 같지만 나는 미묘한 차이를 본다. 언어에는 반대되는 두 면을 동시에 담을 능력이 없다.

그 다음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는 '다시 물체 없는 데(무물, 無物)로 돌아간다'나 '아무 것도 없는 고 혹은 상태로 돌아간다'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것은 도를 근원, 혹은 실체 등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무물"을 '아무 것도 없다'라기 보다는 배타적 본질을 가진 어떤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노자는 이 세계를 대립항들(유(有)/무(無), 고(高)/하(下), 음(音)/성(聲), 장(長)/단(短), 난(難)/이(易), 전(前)/후(後) 등)이 상호 존재 근거가 되면서 외부에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원래 내재되어 있는 반대편을 향한 운동 경향(반, 반)을 매개로 꼬여서 존재한다고 본다. 세계를 이렇게 이루는 원칙 내지는 법칙 혹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존재 형식을 도(道)라는 말로 억지로 표현할 뿐이다. 노자에게서 만물은 도라는 근원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발생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립항들의 관계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이 전제 세계(자연)가 존재하는 형식이자 원칙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본질적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언뜻 보면 존재하는 것 같지 않지만", 사실은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만물의 근원이나 실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제4장 참조)

그래서 다음 문장이 더 이해된다.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無物之象(무물지상) 是謂惚恍(시위홀황)", 즉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며, 아무 것도 없는 모습이라한다. 이를 일러 황홀이라 한다는 것이다. '상(狀)과 '형(形)'은 같은 의미로 본다 . 그래 흔히 '형상(形狀)'이란 말로 쓰며,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상(象)'이라는 말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 내지는 현상이라는 것D이다. 원문을 잘 보면, "무상지상(無狀之狀)"이라 하면서, "무상장상(無相之想)"이라 하지 않고, "무물지상(無物之象)"이라 했다. 노자의 '도'는 "무형무상(無形無象)"이 아니라, "무형유상(無形有象)이다.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도는 구체적인 어떤 것은 아니지만, 이 세계의 존재 형식과 운동 원칙을 개괄하는 상징 기호라는 의미에서 노자는 '상(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다음 "홀황(惚慌)"에서 '홀'은 감춰져 있거나 흐릿하여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를 형용하고, '황'은 드러나 있지만 아주 모호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홀황"보다 '황홀'이라 더 많이 말한다. '황홀'은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황홀'하면,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이란 말로 쓰인다.

그 다음 문장,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는 "그 모습이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도를 의인화 내지는 대상화하여서 묘사하고 있는 거다.

그 다음 문장,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는 '옛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있음을 제어한다, 또는 지금의 현실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여기서 "고지도(古之道)"를 더듬는다는 것은 역사 전체를 파악한다는 의미로 본다. 옛사람들의 득실 전체를 파악함으로써 오늘의 정치의 실상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能知古始(능지고시) 是謂道紀(시위도기)"는 '능히 옛 시작을 파악하니 이를 일컬어 도의 실체로 들어가는 벼리(실마리)라 한다'는 말이다.  그냥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 그대로 옛날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 도의 단서 내지는 도의 강령이 된다는 말 같다.

도올의 주장에 따르면, 공자는 확실히 보이는 것, 들어 들리는 것, 만져서 만져지는 것 그리고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으로부터 오늘 우리의 삶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본다. 그래 그는 일상의 윤리에 대한 건강한 처방을 내린 반면, 노자는 다르게 사유를 했다. 그러나 노자 때문에 도올은 더 크고, 더 넓고, 더 길게 생각하는 사유 습관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도 점점 노자의 세계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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