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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봄은 어떻게 오는가?

193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20일)

 

얼른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싶다. 마음이 흔들리니 작은 유혹에도 금방 넘어간다. 어제는 주말 농장에 일은 하고, 낮부터 와인을 마셨다. 봄비에 대지가 젖는데, 나는 와인으로 마음을 젖게 했다. 일은 교수님 댁까지 가면서 이어졌고, 거기서 커다란 위로를 받고 왔다. 문제는 저녁에 제자가 찾아 너무 비싼 와인을 대접해, 그만 혀만 젖게 일인데, 몸이 젖었다. 그런 아침은 머리가 아프다. 말하지만, 외로움을 주고 괴로움을 받는 정직한 거래가 와인 마시기이다. 그러니까 내가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는 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와인을 많이 마시면 몸이 괴롭다. 그러나 괴로움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어 와인을 마신다.

 

봄은 반전(反轉)이다. 봄은 어떻게 오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웃으니 햇볕이 따뜻한 봄이 온다고 한다. 모든 것들이 지구의 중력에 지배를 받지만, 사랑이 동반된 봄의 새싹들은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쏫아오른다. 신비스럽고 장엄하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말이다. 그것은 다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자 친정 어머니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이 폭죽처럼 터지다, 가을로 무르익어 가더니만, 온 땅을 초토화 시키는 겨울이 온다. 앙상한 가지만이 해골처럼 남았던 겨울, 푸름이 허물어져 잿빛으로 나뒹구는 땅, 강철같이 단단한 바람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계절. 누가 이토록 절망하였기에 겨울이 왔던 것일까? 그러다가 갑옷같이 단단한 나뭇가지의 살갗을 터뜨리며 어린 새순이 솟아나는 봄이 온다. 누가 절망에서 깨어나 새로운 희망을 키워냈을까? 죽은 듯이 황폐했던 땅을 뚫고 풋풋한 새싹이 싱싱한 발톱처럼 돋아난다. 오늘 아침은 이 신비스러운 계절의 변화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야기 해본다.

 

신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것을 키워내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페르세포네를 얻는다. 데메테르는 땅에 자라는 식물을 주관하는 일을 한다. 그녀가 활기차게 움직일 때, 땅은 아름다운 꽃과 풍요로운 곡식과 과일을 만들어 준다. 그녀에겐 “우윳빛 팔을 가진” 아름답고 사랑스런 페르세포네라는 외동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혼백이 살고 있는 저승세계의 왕 하데스가 그 예쁜 딸을 납치해간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가길 두려워하는 지하의 세계로 데려간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정신없이 딸을 찾아 헤매다가, 자신의 딸을 남편인 제우스의 묵인 속에 하데스가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자신의 딸을 납치해 지하세계로 데려간 사실을 알아챈다. "남편이 자신의 딸을 오빠에게 넘기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던 데메테르는 앙심을 품고 자신이 맡은 일을 거부하고 요즈음 식으로 파업을 한다. 딸을 잃은 그녀가 땅에서 손을 떼자, 땅은 점점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렸고, 앙상하게 뼈를 드러냈다. 꽃이 색과 향을 잃고 시들어갔다. 곡식과 과일이 더는 열리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진 인간 세계는 흉흉하게 메말라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갔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우스는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헤르메스를 통해 하데스와 협상한다. 협상은 페르세포네가 일 년의 3/1은 하데스와 함께 있되, 나머지 3/2는 자신과 함께 밝은 세상에서 지낼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봄이 찾아 오는 계절은 이렇게 해서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이해했다. 페르세포네가 땅 위로 나와 자신의 친정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보내게 될 때, 데메테르는 행복해 웃으며 기뻐하니 새싹은 돋아나고 곡식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하지만 가을이 깊어 가면 페르세포네는 다시 땅을 떠나 죽은 자들의 혼백이 머무는 지하의 세계, 남편인 하데스의 곁으로 가야만 한다. 홀로 남은 데메테르는 곧 외로움의 고통에 시름시름 앓으며, 일을 하지 않는다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계절이 변하여 찬바람이 부는 것은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이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데메테르의 우울에서 겨울의 혹독함은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로마 시대(오비디우스)로 오면,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가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나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딸 프로세르피나가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반은 어머니와 보내고, 반은 남편과 보내는 식으로 이야기 바뀐다. 겨울이 더 길어지는 것이다. 그리스의 계절 변화와 로마의 계절 변화가 차이가 나는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죽음의 세상을 나와 밝은 땅위에서 데메테르를 만나는 까닭에 대지의 여신이 행복해하며, 사랑의 힘으로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며 새들이 노래하고 세상이 깨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녀가 웃으니 햇볕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오늘은 대신, 친구가 카톡으로 보낸 메시지를 공유한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라는 말이 깊은 통찰을 준다. 나만 옳은 아니다. 나와 단지 다를 뿐이다. 그러 마음으로 어제 마치지 못한 노자 <<도덕경>> 이야기를 생각이다. 것은 블로그로 넘긴다.

 

 

반전의 사고(反轉의 思考)

 

마음이 편하면 초가집도 아늑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지혜를 짜내려 애쓰기 보다는 먼저 성실하자. 우리의 지혜가 부족해서 일에 실패하는 일은 적다.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 성실하면 지혜가 생기지만 성실치 못하면 있는 지혜도 흐려지고 실패하는 법이다.

관심(關心)을 없애면 다툼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다툼이 없으니 남남이 되고 말았다.

간섭을 없애면 편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외로움이 뒤쫓아 왔다.

바라는 게 없으면 자족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삶에 활력을 주는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불행을 없애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나를 불편하게 하던 것들이 실은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보람 있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결국 행복도 선택이고, 불행도 나의 선택이다.

 

사람들에게 " + "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 이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 이라고 하고,

목사는 '십자가' 라고 하고,

교통경찰은 '사거리' 라고 하고,

간호사는 '적십자' 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 라고 대답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입니다.

'틀림' 이 아니고 '다름' 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도덕경>> 10 4 문장부터 정밀 독해를 한다. "愛民治國(애민치국) 能無知()乎(능무지호)"'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 실천할 있겠습니까" 말이다. 통치의 이상형을 말한다. 판본마다 "능무지호" 또는 "능무위호" 다르다 한다. 어쨌든 구분된 지식이나 체계를 강요하는 통치를 하면 된다는 것으로 읽을 있다.

 

다음 문장은 "天門開闔(천문개합) 能無雌乎(능무자호)"이다. 말은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암컷의 도움 없이도 그리 할 수 있겠는가' 해석된다. 김용옥은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음'이란 "천문개합" "중묘지문(衆妙誌門)", "현빈지문(玄牝之門), "천지근(天地根)" 같은 계열의 메타포로서 여성의 성기의 생식작용의 주기성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천문(=여성의 성기) 개합의 주기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적 생명력의 상징이라는 거다. 이러한 생명력의 과정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것은 남성적인 자만성, 파괴력, 지배력이다. 우리는 여성들의 고요하고 포용하며 생산적인 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능무자호(能無雌乎)" 대신 "능위자호(能爲雌乎)" 고쳐서 풀이한다. 왕필 주가 이걸 뒷받침한다. "암컷은 응하면서 자기가 주도적으로 함부로 이끌지 않고, 의거만 하고 자의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 본문에 천문이 개합하니 능히 암컷이 잇겠는가?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사물은 스스로 인도되고 스스로 편안하게 자리잡게 된다."

 

오강남은 "천문개합"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의 팽창과 수축 작용을 뜻한다고 하고, 작게는 들숨과 날숨을 가리킨다고 했다. 어느 경우든 우리가 취할 자세는 "여성"처럼 수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라는 것이다.

 

부분은 최진석 교수의 설명이 쉽게 닿는다. 노자에게는 모든 행위나 가치 제도의 근거가 자연이다. 자연의 특징은 변화의 반대편으로의 개방성이다. 이런 특징을 가진 자연의 운행은 부드럽고 포용성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노자는 유약함과 부드러움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유약함 부드러움을 함축하는 대표적인 표상을 드는데, 불보다는 물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남성보다는 여성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장이 바로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을 자신의 신념이나 체계를 갖고 강하게 외부를 제압하려 하거나 외부 세계를 구성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외부를 껴안고 순응하는 여성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다음 문장 "明白四達(명백사달) 能無知乎(능무위호)" '밝은 깨달음을 사방으로 비춰 나가 무지(無知) 경지를 이룰 있겠습니까' 해석된다. 말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밝은 깨달음" 일반적으로 떠받드는 사특한 지식을 멀리한 참된 지식, 보통의 앎을 초월한 , "무지(無知) ()"이다. 어렵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구분되고 배제하는 앎의 태도를 버릴 있는 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안다' , '안다' 의미는 알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그것 외의 다른 들로부터 분리해내어 그것 만을 드러내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데, 규정을 완성하는 내용이 바로 본질이며,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을 정의 내린다고 한다. 따라서 () 본질, 규정, 정의, , 이상, 남성, , 아버지, 체계 등은 모두 가까운 친척이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이렇지 않다는 거다. 세계는 어떤 것도 자신의 본질 속에 갇혀 있지 않다. 본질은 없다.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세계이다. 따라서 구분과 규정을 수행하는 () 가지고 세계를 인식하려고 덤비면 된다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최고의 경지는 바로 무지(無知) 태도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식해도 좋다거나 앎을 줄여야 한다거나 자식을 사용함이 없는 순수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다음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불재) 是謂玄德(시위현덕)"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뜻이다. 부분은 내용이 앞의 것들과 연관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나왔던 내용이고, 오히려 51장의 것에 부합된다. 흔히 착간으로 본다.  "생지(生之)'" 주어는 ()이고, "축지(畜之)" 주어는 ()이다.

 

오강남은 다르게 읽는다. 그리고 노자가 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수련의 결과 어린아이 같은 부드러움, 어머니 같은 포용성, 티없는 마음, 맑은 형안 등이 생겼으면 이런 것을 혼자서만 즐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자는 것으로 읽으라는 거다. 결국 남을 섬기는 일이 궁극 목표인 셈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위해 봉사할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업적 위주의 행동이 아니라 함이 없는 , 보통의 함을 넘어서는 , "무위(無爲) ()", () 실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도와 마찬가지로 여인처럼,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만물을 안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거나 거기에 기대려 하거나 군림하거나 좌지우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능력 내지 영향력이 바로 현덕(현덕), 신비롭고 그윽한 함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덕은 힘이다. 힘은 영어로 말하면  power이다.

 

''이란 말의 영어는 가지가 있다.  '포스(force)' '파워(power)'. 프랑스어로는 'la force' 'le pouvoir'라고 한다. '포스' '명함의 '이고, '파워' '발가벗은 '이라 있다. 프랑스어의 le pouvoir  명사형으로 ', 능력, 역량' 뜻하지만, 동사 쓰일 pouvoir 영어의 can처럼 조동사로 쓰인다. '~ 있다' 뜻이다. 그러니까 명사형, le pouvoir '무엇이든지 있음' 된다. 이게 '발가벗은 ' 아닐까? 저자는 박창수의 임파워링하라』 에서 포스와 파워를 이렇게 구분한다고 소개하였다. 포스는 외부의 힘과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물리적인 힘이라면, 파워는 자기 자신이 영향을 주는 힘이며,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내면의 힘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다운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는 포스가 아니라, 파워가 필요하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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