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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기(氣)에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갓난 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19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19일)

 

오늘 아침은 깜짝 추위가 찾아 왔다. 우린 이걸 "꽃샘추위" 한다. 이른 봄철의 날씨가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듯 일시적으로 갑자기 춥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오던 돌아가나.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입나. 먹지." 언젠가 허름한 술집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 나는 아침이다. 혼자 ~ 웃었다.

 

봄에 새싹이 발아하고 나면, 꽃샘 추위가 와서 다시 얼게 한다. 우리들의 청년기와 같다. 그래 모든 문화에서 '가혹한' 통과의례가 있는 것이다. 여름처럼 ()에서 활짝 펼치려면, 꽃샘추위의 통과 의례처럼,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냥 대충 보고 대충해서는 글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런 농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벌레가 '대충'이라 한다. 대충하면, 씨앗이 웅크린 말라 비틀어진다. 대충한다는 것은 땅을 뚫고 나와서 꽃샘추위와 맞짱을 뜨지 않는 거다. 그걸 인정한다면, 늦더라도 문제를 클로즈업 해서 미세한 디테일을 포착해야 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노자 <<도덕경> 10장의 2) "專氣致柔(전기치유) 能嬰兒乎(능영아호)"라는 말부터 정밀 독해를 한다. 말은 "()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갓난 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있겠습니까" 번역된다.

 

"기에 전심하라" 말은 '기를 보존하라', '기를 사용하라', '호흡을 응집하는 호흡을 조절하는 수련을 하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어린 아이처럼 부드러워지라는 거다.  실제로 <<도덕경>>에는 '어린 아이' '도의 상징으로 여러 장에 등장한다. (20, 28, 55 ) 어린 아이의 여림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발견한다.  노자의 사고 모델은 자연이다. 자연에서 살아 잇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수련의 경지에서 최고는 모이 어린 아치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 호흡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 내 코를 통해 드나드는 것이 숨 말이다. 숨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다. 들숨을 통해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공기가 코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 와 오장육부를 살아있게 만든다. 날숨은 나의 구태의연한 잡념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들숨은 새로운 생각으로 오늘을 시작하게 한다. 이걸 우리는 호흡이라고 한다. 삶의 최소 단위를 '호흡'이라 설정하고 매 순간 자신의 숨을 관찰하고 수련해 () 모으는 거다. 이게 기에 전심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음식을 섭취하는 일과 매 순간 목숨을 지탱해 주는 심장 박동과 호흡하는 일 두가지라 본다. 심장은 하루에 십만 번 정도 박동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최대 30일 정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심장이 1분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하루에 약 2만 3천 번 대기 중에 있는 공기를 입과 코를 통해 호흡하는 , 사람은 숨을 최대 3분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상으로 숨을 쉬지 못하면 바로 죽는다.

 

그러니까 호흡, 숨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해보면, 우리는 들이쉬는 숨이 내쉬는 숨보다 더 길다고 느끼고, 늘 들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영옥 소설가는 요가 선생님의 다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편견을 깨도록 해주었다. "요가를 할 때는 의식적으로 날숨에 더 신경 써야 해요. 사람들은 대개 들숨을 생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예요. 날숨이 더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 아기는 '아앙~' 하고 호흡을 터뜨립니다. 죽을 때는 어떻죠? '후흡' 하고 숨을 강하게 들이마시며 죽어요. 아이러니하죠."

 

호흡 명상을 해보면 감정이 진동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 호흡법에서 중요한 것은 들숨보다 내보내고 비우는 날숨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매 순간 내가 숨을 들이켜듯 더 많이 얻고, 채우고, 느끼려는 자세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들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날숨으로  속에 있는 관성이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동시에 날숨으로 내 몸 안에 빈 공간을 만들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버려야 산다는 거다. 노자의 사유와 같다.

 

호흡훈련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양의 관문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호흡은 잠잘 , 책을 읽을 , 산책할 때와 같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절로 작동한다. 그런 식으로 일생동안 해야 호흡의 총량이 갖고 태어났다가, 양을 채우면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닐까?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분노하거나 두려운 상황에 처할 ,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래 총량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니 화를 내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나치게 두려워 허는 것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숨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 우리는 감정이며 이성적인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현대과학은 느리고 깊은 호흡 습관으로 혈압과 심장 박동수를 줄여 주어야, 우리의 일상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매주 토요일은 아침 7시반부터 <미학 세미나> 줌으로 한다. 마침 <<최한기의 기학 연구>> 같이 읽고 있다. 연구실로 나갈 시간이다. 그래 오늘 아침 <인문 일기> 여기서 멈춘다. <<도덕경>> 10장의 이어지는 문장의 정밀 독해와 전문은 블로그로 옮긴다. 주말 농장 텃밭에 상추 모종과 여러 가지 씨앗을 뿌렸는데, 얼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니면 아픈 만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새싹들이 건강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거니까 말이다.

 

 

꽃샘추위/김옥진

 

인사를 빠뜨려서 

되돌아 왔나 

 

아랫목 이불 속이 

그리워졌나 

 

3일만 묵겠다고 

아양을 떤다 

 

어차피 한 번은 

떠나야 하는 걸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면 되는 걸 

 

미적미적 하다가 

막차 놓칠라 

 

 

오늘은 문장 "滌除玄覽(척제현람) 能無疵乎(능무자호)" 읽는다. 말은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게 있겠습니까"라는 뜻이다. 여기서 "현람(玄覽)" '마음의 거울', '마음의 ', '하늘에 있는 우주 거울', '가믈한 거울' '우주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 ''으로, 우주를 비추는 장애가 되는 거다. 나는 그냥 명상을 통해 더러운 것들을 씻어 맑고 밝은 마음을 갖도록 하라는 것으로 이해 한다. 노자의 가르침은 그대로 불언지교(不言之敎,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단지 아무 내용으로 고착화되어 있지 않은 도를 본받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과 관련하여 도의 특징은 ()이다. 노자가 말하는 '() 매일 비우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48장에 나오는 말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취천하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이 말을 번역하면, "배움이라 함은 나날이 더하는 것이고, 도라 함은 날마다 던다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게 된다. 무위란 하지 못하는 (불위) 없다." 도를 닦는 것은 나날이 지식 또는 분별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비움이 지극해지면, 평화로워 지고 무위하여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유가에서 강조하는 (, 배움) 모방이다. 전통으로 검증된 지식 체계를 모방하고 반복적으로 실천하면서 계속 쌓아 나가는 것이다. 쌓아 가다가 지식 체계의 높이나 넓이가 우주의 영역에까지 닿을 있다고 믿고, 그러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언어나 지식 체계로 가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을 쌓기보다는 편견과 고집으로 가득 지식 체계를 버리고 마음으로 우주나 사물을 본래 자연의 모습 그대로 바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아무 흠이 없는 단계까지 마음의 거울을 닦는다는 것은 비로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최진석 교수의 설명이다.

 

이어서 나오는  대목은 통치의 이상형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 <<도덕경>> "10" 전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1.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能無離乎(능무리호): 혼백을 하나로 감싸 안고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있겠습니까?

          도올의 번역은 "땅의 형체와 피를 몸에 싣고 하늘의 거대한 하나를 품에 껴안는다. 능히 양자가 분리되지 않게 있겠는가?"이다.

  1. 專氣致柔(전기치유) 能嬰兒乎(능영아호): 기()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갓난 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있겠습니까?
  2. 滌除玄覽(척제현람) 能無疵乎(능무자호):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게 있겠습니까?
  3. 愛民治國(애민치국) 能無知()乎(능무지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 실천할 있겠습니까?
  4. 天門開闔(천문개합) 能無雌乎(능무자호):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암컷의 도움 없이도 그리 할 수 있겠는가?
  5. 明白四達(명백사달) 能無爲乎(능무위호): 밝은 깨달음 사방으로 비춰 나가 무지(무지) 경지를 이룰 있겠습니까?
  6.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7.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불재) 是謂玄德(시위현덕) : 모든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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