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문적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190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0년 2월 20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노자 <<도덕경>> 제4장을 읽는다. 어제 우리는 제4장의 첫 문장 "道沖而用之(도충이용지) 或不盈(혹불영)"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도'는 비어 있기에,  그 쓰임이 있고, 그 작용은 끝이 없어, 마르지도 않고 차오르지도 않는다고 이해했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허(虛)'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허(虛, 빔)'의 비 실체적이지만, '항상스러움', 도의 거대한 능력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그 다음 문장 세 문장을 읽는다.

②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 심연처럼 그윽하다! 만물의 으뜸 같다. (깊기도 하다! 마치 만물의 근원 같다.)
③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해기분): 예리한 것은 다듬어주고, 맺힌 것은 풀어 주고 
④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그 빛이 튀어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한다. (또는 눈부신 것은 은은하게 하고, 마침내 먼지와 하나가 된다.)  이 문장은 좀 다르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노자에게 너무 날카로운 것, 뒤엉킨 것, 번쩍거리는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 못된다. 한 쪽으로 너무 치우쳐 균형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도는 대립을 함께 포용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총체이기에, 이런 것을 둔화 시키고 중화 시켜서 둥글고 화통하고 부드럽게 해준다. 말하자면 음(陰)적인 현상과 양(陽)적인 현상의 조화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거다. 노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도가 그러니까 우리도 그러해야 좋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다. 도가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엉킨 것을 풀어 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고 했을 때, 우리도 그처럼 너무 날카롭거나, 너무 앍히고 설킨 관계를 유지하거나, 너무 광내려 하거나, 너무 혼자 맑은 체 도도하게 굴거나 하지 말고 양쪽을 함께 포용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는 것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강남 교수의 설명이다.

세상에 자연적인 것 치고 직선적인 것, 직각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직선적이고 직각적인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물방울도, 능선도, 쏯잎도 모두 둥글거나 곡선적이다. 이런 것은 '양극의 조화'를 가능케 하는 도의 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런 생각 했다. 스펙 우선, 안정성 중심으로 살아온 대한국은 '네모의 천국'이다. 세상도 사람도 둥근데 생각과 행동은 네모에 맞춰져 있다. 네모 안에 갇혀,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니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다가 ‘의식도 못한 채 그냥 숨만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아이들과 부모들은 행복해지려고 그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쪽에 가깝다. 나도 그렇다. 인간의 각 개체는 온갖 다양한 연속체 중에서 유일무이하다. 인간은 이미 존재만으로도 특별하다. 그러니 나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면서, 모든 일을 그 주인공에 맡기고 살면, 걱정할 일이 없다.

우리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인문적 삶은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피며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만남이다. 그것도 '비스듬히'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선적인 만남이 아니라, 곡선적인 만남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와인이다. 그래 나는 술을 못 마시거나 안 마시는 사람 하고는 자주 안 만날 생각이다. 나의 경우 와인 마시기는 '직선이 곡선 되게 하는 일'이다. 인문적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기 때문이다. 우대식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우대식 시인의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를 다시 공유한다.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우대식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왔거늘
노을 앞에서는 한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이제는 한 문장씩 나누어, 더 깊게 읽어 본다.
②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 심연처럼 그윽하다! 만물의 으뜸 같다. (깊기도 하다! 마치 만물의 근원 같다.) 여기서 '연(淵)'은 맑은 여못의 무궁한 깊이를 표현하는 말로 본다. '영혜'는 무한한 심도를 감탄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는다. 도올은 이 '연혜'를 도는 명사적 규정이 아니라, 형용사, 부사 적 감탄의 동적 과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도올은 "그윽하도다!" 해석했다.

그리고 "似萬物之宗(사만물지종)"은 "만물의 으뜸인 것 같다"로 읽는다. 우리는 여기 '같을 사(似)' 자에 주목한다. 노자는 끊임없이 '사(似, ~인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이다'가 아니라, '~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인다. 따라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무궁하고 그윽한 거다. 그 그윽함은 감탄사적 언어로 밖에는 표현될 길이 없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 "만물지종(만물의 으뜸)"은 현실적으로 하느님, 즉 데우스(Deus) 이외의 어떠한 것일 수 없다. 만물 생성의 근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존재의 대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사'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도는 '빈 그릇' 같기도 하고, '심연'처럼 깊어 알 수도 없고, '깊은 물'처럼 가물가물하고 신비스러운 무엇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의 존재 근원으로서 상존하면서 모든 것을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거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도는 실체나 본체로 이해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이 존재하는 형식이자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는 원칙 내지는 그런 사실을 가리키는 범주이다. 도를 만물의 근원이나 실체 혹은 본체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연의 존재 형식을 보여 주는 범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존재가 아니라 존재형식이라는 설명에 눈길이 간다.

다음,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해기분)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으로 이어진다.  이 문장을 도올 김용옥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 도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강남은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 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됩니다"로 풀이한다.

나는 이 문장의 주어가 '도'라고 본다. 더 자세하게는 도의 "빔의 기능"이다. 날카로움, 얽힘, 튀는 빛, 무소부재(無所不在, 있지 않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다 있음)의 형질인 티끌, 이 모든 것들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수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도는 빔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동질적인 통합체로서 조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이 바로 좌(挫, 무디게 함), 해(解, 품), 화(和, 조화시킴), 동(同, 고르게 함)이다. 도올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다(다)가 일(일)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창조성이 개입된다. 창조성이란 새로움의 도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네 단어들 중에 "화기분(和其紛)"이라는 문장이 좋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이야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기아를 점령하였을 때 테르미소스 성에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매듭을 매우 복잡하게 정교하게 얽히어 있어 풀기가 무척 힘들었다. 알렉산더는 매듭을 풀려고 시도했으나 도무지 풀리지 않자, 칼로 그 매듭을 끊어 버렸다.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사는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문제를 풀 때 통상의 관념을 버리고 획기적으로 과감한 해결책을 도모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알렉산더는 신탁의 말과 같이 인더스강까지 진출하여 아시아를 정벌하고 아시아의 대왕이 되었다. 다만 그 사후에 그가 이룬 제국은 많은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것은 그가 매듭을 정상적으로 풀지 않고 칼로 끊어버린 것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라는 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너무 즉 단순하고 쉬운 해결책을 찾으면, 사후에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야 한다. 알렉산더가 이룬 거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에 적절한 후계 절차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장군(디아도코이)들 간의 극심한 내분으로 산산조각이 나게 된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된 사자성어로 "쾌도난마(快刀亂麻)"가 있다. '헝클어진 삼을 잘 드는 칼로 자른다'는 말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의 고사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제(北齊)를 세운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 529-559)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다.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 때 승상으로 있던 고환(高歡)은, 여러 아들들의 능력을 시험하려고 어지럽게 뒤엉킨 실타래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잘 추스려 보라고 하였다. 다들 실을 한 가닥씩 풀어내며 추스리느라 분주하였는데, 둘째 아들인 고양(高洋)은 홀로 칼을 뽑아 단번에 실타래를 잘라 버리며 말했다(帝獨抽刀斬之). "어지러운 것은 베어 버려야 한다(亂者須斬, 난자수참)".

나는 '쾌도난마'보다 '해기분'을 내 삶의 지표로 삼을 생각이다. '얽힌 것을 칼로 자르거나 끊지 말고, 매듭을 풀어라'는 말로 일상에서 실천할 생각이다. 이런 말이 있다. "복잡하게 얽힌 것을 주먹으로 쳐서 풀려 들지 마라." 이게 도가 지닌 빔의 기능 중 하나인 "해기분(解其紛)"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은 '쾌도난마'와 달리 신중하게 전략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함을 가르친다. 손빈(孫臏)의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 손빈(孫臏)이 제나라에 의탁하고 있을 때,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조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는다. 이 때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에게 위나라의 약점을 건드려 조나라를 구하는 전략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히고 섥힌 일은 주먹으로 쳐서는 풀 수 없고, 싸움은 함께 때려서는 말릴 수 없다. 강한 것은 비켜가고 약한 곳을 찔러 형세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면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dotomari.com/1296 [허성원 변리사의 특허와 경영이야기])

다음 문장의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을 줄여 "화광동진(화광동진)"이라는 불교에서 사용한다.  그것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의 구제를 위해 자기의 본래적 모습을 감추고 중생과 동일한 차원의 존재로서 자기를 드러내고 활동한다는 뜻이다. 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바로 이 보살 수행자가 발심해서 수행하는 목적을 상(上)·하(下)라는 방향성에 근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보살은 위로는 불교의 지혜인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고통 받는 다양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두 가지 이익, 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각각 대응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도올은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을 "그 빛이 '튀어남'을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 도다"로 해석한다. 노자가 말하는 "화광동진"은 도의 빔의 창조적 성격이고, 그 자체가 창조적 과정이라 보는 것이다. 반면 오강남은 도가 티끌, 곧 티끌 세상과 하나가 되려 한다는 것으로 본다. 도는 세상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본 모습 그대로가 도라는 거다. 따라서 도를 높은 곳에 계시다 거나 저 멀리 계시다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나에게는 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런지, 최진석 교수의 책에서는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해기분)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을 56장에 배치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