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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다.

190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9일)

 

오늘 아침부터는 노자의  <<도덕경>> 제4장을 읽는다. 제4장의 주어가 '도'이다. 그러니까 '도'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라며 접근하는 한 팀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우리 집안 아이 중의 하나도 그 말에 속아 청춘을 날리고, 다행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와 착실한 생활을 하는 '멋진' 조카가 있다. 몇 년인지 모르지만 집에 들어 오지 않고, 그 무리들과 거이 10여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중단한 학업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잡아 가족을 꾸미고 잘 살고 있다. 그 집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그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반면, <<도덕경>> 제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도(道)'가 그러니까 우리도 그러해야 좋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나는 풀이한다. 우리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도'에 대해 말하기 어렵지만, 나는 우선 제4장의 원문과 해석부터 공유한다. 
① 道沖而用之(도충이용지) 或不盈(혹불영): 도는 비어 있기에 그 쓰임이 있다(그 작용은 끝이 없다.)  마르지도 않고 차오르지도 않는다.
②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 심연처럼 그윽하다! 만물의 으뜸 같다. (깊기도 하다! 마치 만물의 근원 같다.)
③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해기분): 예리한 것은 다듬어주고, 맺힌 것은 풀어 주고 
④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그 빛이 튀어남이 없게 하고, 그 띠끌을 고르게 한다. (또는 눈부신 것은 은은하게 하고 마침내 먼지와 하나가 된다.) 
⑤ 湛兮! 似或存(담혜, 사혹존): 말고 또 맑다! 혹 있는 것 같다. (또는 깊디깊어 신비롭기도 하다! 마치 진짜로 있는 것 같다.) 
⑥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象帝之先(상제지선) : 나는 그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다만 상제보다 먼저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진 모르겠다.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노자 전문가들이 노자에게 '도'는 어떤 실체나 근원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계가 반대되는 두 계열의 범주로 되어 있다는 원칙 내지는 그런 사실을 나타내는 범주라고 본다. 즉 도는 어떤 본질적 내용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있다고 묘사한 거라 한다. 그래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변화하며 항상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는 거다. 최진석 교수의 설명이다.

나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본받자는 거다. 그래 나의 만트라가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이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친절과 상냥함으로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갈 것이다. 반드시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는 세상이 되돌아 올 것이다. 음양의 조화에 따라서. 난 낙관주의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그래서 마음이라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난 자연의 흐름을 믿는다. 그게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본격적으로 이 제4장을 정밀하게 읽기 전에, 오강남 교수님의 해석을 시처럼 옮겨 본다. '도'의 모습이다. 매일 공유하는 시 대신, 이 해석으로 갈음한다.


도는 
그릇처럼 비어
그 쓰임에 차고 넘치는 일이 없습니다.

도는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입니다.

도는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 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띠끌과 하나가 됩니다.

도는
깊고 고요하여.
뭔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도는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하늘님(제)보다 먼저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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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원문의 한자를 풀이하며 깊게 읽어야 무슨 말인지 조금 알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서양 인문학의 세례를 받는 사람은 더 어렵다. 서양 철학의 기초인 페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 있어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존재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사유와 사유된 것은 동일하다. 빈 공간이라는 것도 사유된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타자가 진입할 수 있는 '빔(虛)이 될 수 없다. 페르메니데스의 우주에서는 운동이 불가능하고, 변화가 불가능하다. 모든 공간이 완벽하게 다 점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과 변화라고 하는 경험적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에 불과하다.

반면, 노자에게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하는 것은 빔(虛)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이 된다. 비어 있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빔이란 모든 가능성의 잠재 태이며, 창조성의 원천이다. 빔이 없으면 창조는 불가능하다. 우주도 비어 있는 것이고 하찮은 미물도 다 비어 있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만 합생(合生)이 가능하고 타자의 포용이 가능하고, 다(多)를 일(一)로 통합하여 포일(包一)시키는 창조적 전진이 가능하다. 노자의 우주에는 진공(Vacuum)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空)은 기(氣)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존재의 부정이 아닌 창조의 터전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설명이다. 이 설명을 읽고 나니, 노자가 말하는 '도'의 세계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

오늘은 제4장의 첫 문장 ① 道沖而用之(도충이용지) 或不盈(혹불영)를 좀 깊게 읽어 본다. 그 뜻은 " 도는 비어 있기에 그 쓰임이 있다" 또는 그 작용은 끝이 없다." 또는  "마르지도 않고 차오르지도 않는다."가 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주석은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이 빈 것이지만, 마술사의 빈 병처럼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채우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두 번째는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이 비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차고 넘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 쓰임새가 크다"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그러니까 도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물이 다시 그리로 들어가도 차고 넘치는 일이 없다:는 거다. 세 번째는 두 가지를 다 사용하여, 도는 텅 비어 있는데,  마르지도 않고, 차오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혹불영"의 영(盈)을 그 반대의 개념인 '다할 갈(竭)이나 '다할 진(盡)'으로 해석하는 거다. 즉 "도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써도(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마르지 않는다)"로 읽자는 거다. 도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그것을 써도 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potentiality)은 줄어들지 없고, 고갈됨이 없고,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도충(道沖)", '도가 텅 비어 있다'는 "텅 빔"은 정태적인 실체가 아니라, 동태적인 잠재력(潛在力)이 된다.

두 번째로 영을 말 그대로 '가득 찬다'로 보자는 해석이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점 이지러진다는 의미의 '일월영측(日月盈仄)'이라는 말처럼,  '영'을 '차오른다'로 보자는 거다. 아무리 퍼내어 써도 마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쏟아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여백, 그 무궁무진한 창조력과 순환 력은 같은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허(虛)'의 의미를 알아차려야 한다. '허'는 존재자가 아닌 가능 태이며, 그것은 새로움을 가능케 하는 신(신)적 기능이다. 도올이 강의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진석 교수의 설명을 들어 보고, 오늘 도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노자에게 도는 어떤 실체나 근원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가 반대되는 두 계열의 범주로 되어 있다는 원칙 내지는 그런 사실을 나타내는 범주이다. 즉 도는 어떤 본질적 내용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있다고 묘사한 거라 한다. 그래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변화하며 항상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는 거다. 그러니 노자는 도의 이런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본받자는 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낙관주의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그래서 마음이라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난 자연의 흐름을 믿는다. 그게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