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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

19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3일)

 

노자 <<도덕경>> 제3장을 사람들은 "안민(安民)의 길"이라 제목을 붙인다. 그 길은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는(虛其心, 實其腹, 허기심, 실기복)" 거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탐욕을 멀리하면 다툼이 사라진다"며 "부쟁(不爭)의 길"이라 제목을 붙인다. 경쟁하거나 싸우지 않는 길이라는 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제3장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어제 우리는 노자의 세 가지 주장을 살펴 보았다.
(1) 훌륭하다는 사람을 떠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좀  더 요즈음 사용하는 말로 의역하면, 똑똑한 사람을 높이 치지 않아야 사람들이 경쟁에 휘말리거나 다투지 않게 된다는 거다. (2)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3) 탐욕을 멀리 하면 사람들이 심란(心亂)해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욕심날 만한 것을 보이지 않아야,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지 않는다. 즉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안민(安民)의 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말한다. 성인의 다스림은 (1)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 (2)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을 멀리하게 하고 감히 지혜를 뽐내며,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원문을 따라 가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본다.

④ 是以聖人之治(시이성인지치) 虛其心(허기심) 實其腹(실기복) 弱其志(약기지) 强其骨(강기골) :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 

좀 쉽게 말하면, 성인의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간교한 마음(心)'이나 그 마음에서 나오는 '허망한 야심(志)'을 없애도록 도와 주고, 그들에게 '배와 뼈'로 대표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해주는 일을 우선으로 삼는다는 거다. 여기서 '심(心, 마음)'과 '복(腹, 배)'이 대비되고, '지(志, 뜻)와 골(骨, 뼈)이 대비되고 있다. 노자에게 인간 생명의 중추는 당연히 복과 골에 있지, '심'과 '지'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심'과 '복'은 '허(虛)'와 '실(實)'이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어 있고, '지'와 '골'은 '약(弱)'과 '강(强)'이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어 있다. 

'심'과 '복'의 관계에서 '심'이라는 것은 '복'의 오장육부를 지배하는 별도의 기관이 아니라, 오장육부의 관계로부터 발현되는 어떤 현상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상대적으로 뇌(腦)라는 중추에 무관심했었다. 동양 의학이 말하는 12정경(十二正經)의 근원이 모두 복부에 있으며, 12정경 중에 뇌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 '뇌사(腦死)'라는 말을 보면, '뇌'보다 '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의학에서 우리의 의식중추를 뇌 중에서 대뇌피질에 두지만, 대뇌피질이 손상을 받아 가능을 하지 못해도 생명은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간은 기능을 하지 못하면 생명은 존속될 길이 없다. 대뇌피질보다는 간이 더 생명 현상의 기초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대뇌피질릉 진화과정에서 후발 주자이며 개념적인 사유를 관장하는 것으로서 문명의 주체 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중추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워라"라는 말은 "부차적인 것을 비워서 원초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충실케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도올은 설명하였다.

여기서 '지(志)'와 '골(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골'은 피를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것이며, 인간 존재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뼈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건물의 철근망이 무너지면 방에 있는 정교한 기물들이 다 파괴된다. '지'는 쓸데없는 개념적 지향성이며, 번뇌의 주체인 '심'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그 뜻을 약하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하라". 

이 문장에서 도올의 해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욕(無欲)'의 행위로 볼 수 있지만, 노자의 생각은 '마음 비움'을 불교적 해석인 '무아(無我)'로 풀기보다는 쉽게 "배를 채우고, 뼈를 강하게 만드는 건강의 비결"이라고 도올은 보았다. '무아'는 해탈을 지향하지만, '무위'는 건강을 지향한다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가 농업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경제 정책도 결국 우리 문명의 '심(心)'만 키우고, '배(腹)'를 죽이는 어리석은 모습이라는 거다.

어쨌든 '그 마음을 비운다(虛其心)'에서 '허(虛)'는 노자의 중심 사상이다. 그래는 노자 철학을 '허 철학'이라고도 말한다. 인간이 살아간다고 하는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노자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 보았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명 중추를 실(實)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나는 여기서 실(實)에 시선을 좀 멈추고, 그 이야기는 오늘의 시를 공유하고, 블로그로 옮긴다. 어제는 산책하다가, 나무에 걸린 연을 보았다. 그래 오늘 시를 공유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사진이 그 거다. 연을 놓아주지 못해, 해도 나무에 걸렸다.


연/최윤희

왕년에 놀던 사람은 안다
날릴수록
사달 난다는 것을
바람을 타고
꼬리치며
내게서 가장 멀어지는 순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 연 저 연 할 것 없이
다 떠났다
연줄을 끊으며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내가 풀이하는 '무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대화하는 능력을 키워야 일어나는 행위이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은, 스스로를 나비가 고치를 버리듯이, 새가 자신을 감싸는 알을 깨고 나오듯이, 과거의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무아'(無我) 혹은 ‘비움’이라고 나는 본다. '무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I'm nothing)'가 그냥 말만으로,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과거의 '자신'을 유기하는 큰 도전 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I'm evrything)"라거나 "나는 무언 가이다(I'm something)"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버려야 할 과거의 '자신'이다.

힌두교 스승이 학생에게 무화과 열매를 가져왔다. 스승은 학생에게 무화과 하나를 갈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학생은 “수많은 씨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스승은 조그만 씨 하나를 다시 열어보라고 시킨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스승이 말한다. “네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이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자라났다.” 그 '없음'이 '있음'의 원천이다.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온 우주인 ‘브라흐만’(Brahman)은 눈이 보이지 않은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자아라는 ‘아트만’(Atman)에서 출발했다는 거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개념이다. 노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더 실질적이다.

'실'은 '열매'라는 말이다.  '실'하려면 열매가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아야 한다. 심미적 가치가 먼저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미학"(김태창)이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창세기>제2장 9절에 나무의 열매이야기가 나온다. "주 하느님께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였다."

<창세기>는 인류가 음식의 유혹에 빠져, 영적인 존재에서 육체적인 존재로 타락했다고 보는 배철현 교수가 "인류의 어머니인 이브가 에덴동산 중앙에 심겨진 한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였다. 흥미롭다.

“그 여인이 보니, 
그 나무(의 열매)는 음식으로 좋고, 
눈에 즐거움을 주고 
지혜롭게 만들만큼 이상적이었다.”

열매를 음식으로 보았다. "내 앞에 차려진 음식이 최고급 재료로 만든 최상의 요리이며, 눈으로 보기에도 쾌락을 줄 정도로 자극적이고, 심지어는 그 음식을 섭취하며 나를 지혜롭게 만들 정도로 이상적이다. 이브가 그 열매를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문장에 열매 음식에 관련된 중요한 형용사 세 가지가 등장한다. ‘좋다,’ ‘즐겁다,’ 그리고 ‘이상적이다’다.

⑴ ‘좋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특히 후각에 관련된 단어다.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나서 나의 코를 자극한다. 최상음식의 첫 번째 조건은 코의 만족이다. ‘토브’는 ‘향기로운; 코를 통해 침샘을 자극 하는’이란 의미다. ‘토브’의 두 번째 의미는 ‘최상급’이란 의미다. 천연의 땅 에덴에서 만들어진 최상급 음식으로 거부할 수 없는 향기를 지녔다.

⑵ ‘즐겁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타아바’이다. ‘타아바’는 시각을 자극하는 단어다. 인간은 지근거리에서 음식의 질을 코를 통해 확인하지 못하면, 눈으로 확인한다. ‘타아바’는 눈에 쾌락을 줄 정도로 보는 사람을 기분을 좋게 만들 때, 사용하는 단어다. 우리는 예술작품이나 자연의 경치를 눈으로 확인하고 탐닉한다. ‘타아바’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대상을 꾸미는 형용사다.

③ ‘이상적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흐마드’이다. ‘네흐마드’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만족시키는 단어다. 내가 감동적인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연주나 영화를 감상했을 때, 혹은 나의 심금을 울려 삶의 교훈을 알려주는 고전을 읽었을 때, 그 작품은 ‘네흐마드’다. 이브는 그 열매가 나를 지혜롭게 만들 정도로 이상적이었다고 말한다. 그 열매는 내 몸으로 들어가 내 콜레스테롤을 줄여줄 정도로 최상의 유기농 음식이다. 이브는 열매를 보고 매료되었다. 자신이 그 과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과실이 그녀를 먹은 것이다.

'배'가 '실'하게 하는 열매 음식은 우선 향이 좋고, 보기에 때깔이 나고, 그 다음 몸에 좋아야 한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아름다워야 한다. 그 다음이 윤리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더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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