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1월 27일)
몇일 전, 우연히 고창영 한국여성수련원장이라는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 의하면, 정말 나는 지금 코로나 블랙 상태이다. "'코로나19'와 '우울감'을 뜻하는 'Blue'가 결합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쑥 들어가고 '코로나 레드'에 이어 '코로나 블랙'까지 등장했다.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상 변화를 불러왔고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감과 초조 증세를 가져왔다. 보름만, 한 달 뒤, 봄이 가면, 여름이 되면, 다시 가을이 오면 그래도 나아지겠지 했던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욱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밖으로 드러내고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하게 비좁아진 생활 반경은 그야말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할 지경의 상태로 '코로나 레드'라 불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 블랙'은 회생조차 힘들어 보이는 현실을 마주할 때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암담하고 참담한 상황을 설명할 때 쓰고 있다. 진짜 걱정은 이 힘든 시기를 잘 버티고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그 마지막 힘까지 잃어버릴 것에 대한 염려다. 바닥을 쳤더라도 그 바닥을 짚고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올 수 없는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재앙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내 삶에서 길을 잃었다면, 현재 있는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방향을 설정한 다음, 인생 네비게이션에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하고 새 주소를 입력해서 다시 출발하면 된다. 우리들의 삶에 직진만이 능사가 아니다. 조금 돌아가도 유연함과 융통상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 방향을 위해 어제부터 작년에 읽다가 멈춘 <장자>를 다시 완독하기로 했다.
요즈음은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를 9시에 문을 닫는 강제 규정 때문에 일찍 잔다. 그리고 주님을 모실 기회가 적다. 그래 오늘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자 마자 <장자>를 읽었다. 오늘 만난 지리소는 이름 그대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아무렇 게나 뒤죽박죽 생긴 엉성한(疏)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곱추이다. 그러나 그는 바느질, 빨래, 키질 등을 해서 잘 먹고 살 뿐만 아니라 군대로 끌려가거나 부역에 불려 나갈 걱정이 없는 데다 나라에서 주는 후생비까지 받으며 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쓸모 없다'고 하는 이런 몸으로 이렇게 잘 살아가니, 이것이 "쓸모 없음의 쓸모"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외모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몸을 보존하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덕이 곱추인 사람이겠습니까?" 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하물며 덕이 곱추인 사람이겠습니까?" 이 말을 글자 뜻대로 하면, 덕이 지리(支離)한 사람, 도덕적으로 지리멸렬한 사람, 막돼먹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리소는 몸이 이렇게 막돼먹어서 이른바 군대에 들어가 장군을 생각할 수 없고, 부역에 충실해서 고위직 자리를 꿈꾸지 못한 채, 그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근면함으로 그렇게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아 지리멸렬, 뒤죽박죽이 되어, 이른바 일사불란한 체계나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니 하면서 일반적으로 훌륭한 덕이라고 떠드는 통상적이고 일률적인 가치 체계나 사고 방식 등을 무조건 숭상하거나 거기에 지배 받는 일 없이, 자신의 처지에서 욕심이나 허세 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근면함으로 그렇게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자신의 처지에서 욕심이나 허세 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다." 이 두 문장을 건졌다. 처해진 실존적 고독 속에서 욕심이나 허세 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나에게 약속된 일들을 하다가 죽는 거다. 그러나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그리고 활기차고 건실하게 하는 거다.
오늘은 동요 하나를 공유한다. 오늘 아침 사진도 이 노래를 생각하며 내가 늘 다니 탄동천 산책길의 나무를 쓰다듬고, 올려다 보면 찍은 것이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있구나!
겨울 나무/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지내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우리는 내가 누군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한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이다. 왜냐하면 앎은 무지를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질문이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지난 20세기가 그랬다. 지난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으로 이분법이 지배한 세기이다. 그리고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그 안에 온갖 지식과 정보가 그득하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에서 로고스로 변주되어야 한다. 그 때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다.
그 글쓰기가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이유는 여럿이다. 첫 번째, 글을 쓰려면 사유가 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생각이 명료하고 맑아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생성되고 논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명한 언어, 논리적 일관성을 지향하게 되면 욕망의 불꽃은 저절로 사그라진다. 두 번째 글을 쓰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을 하려면, 생리 구조가 수승화강(水丞火降)의 상태가 되어야한다. 수승화강은 평정의 다른 이름이다. 세 번째, 글쓰기에는 어떤 노동이나 운동보다 고강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욕망을 잠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으로 투여한다는 뜻이다. 네 번째, 글이 생산될 때의 성취감은 짜릿한 쾌락과는 클라스가 다르다.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의 파동은 온 몸을 촉촉히 젹셔 준다. 이게 글쓰기가 주는 마력이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 으로 옮긴다.
이런 글쓰기와 함께 우리는 지성의 바다에 빠져야 한다. 노동과 화폐에 지배당하지 않는 시간, 육체적 정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 시공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길을 가는 자가 디지털 노마드이다. 노마드의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국내 첫 저작물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노마드』를 쓴 손승관 저자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면서 불가피하게 삶의 방식과 노마드적 삶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하고 아날로그 시대가 토지, 자본, 노동이라는 유형의 자산의 시대였다면, 디지털 시대는 지식, 기술, 정보라는 무형의 자산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노블레스 노마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의 8 가지로 요약하였다. 나는 여기에 모두 속한다. 그래 나는 2021년부터 나 자신을 "디지털 노마드"가 되고자 하며, 이 8 가지를 내 일상에 적용하려고 노력 중이다.
(1) 그들은 일도 여가처럼 하고, 직장에서도 휴가지 에서처럼 산다.
(2) 그들은 매사에 창의적이다.
(3) 그들은 개인의 행복 추구가 우선이다.
(4) 그들은 인문학적 소양이 깊다.
(5) 그들은 소유 대신 경험을 중시한다. 가지는 것은 끝이다. 임대 비즈니스에 매달린다.
(6) 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7) 그들은 상품 가치가 뛰어난 지식 사업가이다.
(8) 그들은 감성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연줄은 가라! 그들은 생각이나 지향점이 같으면 형제이다.
이 8 가지를 통해, 디지털 노마드가 추구하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다양한 정보의 길에서 지성과 영성을 향한 새로운 속도와 리듬을 구현하는 존재적 삶이다. 글쓰기가 그 실천이자 전략이다. 언어를 창조하고 스토리를 구성하고 사건을 연결하는 일이다. 어떤 활동보다 역동적이다.
예전에 글쓰기는 커다란 서재를 가지고, 지식이 많은 자들이 천재성을 무장하고 자의식으로 넘치는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재도 지식도 자의식도 필요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 있다. 필요할 때 참조할 수 있다. 검색이 오히려 중요한 시대이다. 이게 바로 디지털 노마드이다. 이들은 노트북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 영상과 음악 그리고 미술과 디자인 등의 작업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것들은 글쓰기보다 여전히 너무 많은 비용과 시설, 공정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반면 글쓰기는 너무 간단하다.
<주역>의 이치인 간(簡, 간단함)과 이(易, 쉬움), 즉 간단하고 쉬워야 한다는 것처럼, 글쓰기는 지극히 단순하다. 기교나 테크닉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간단하고 쉬운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야 뭇 생명을 낳고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무수한 변이와 생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은 지엽말단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실외 활동이 제한적이라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지만,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봄이 오면, 주말 농장을 통해 자연에 대한 탐색을 재개할 생각이다. 또한 여행이 자유로워지면, 정기적인 여행 속에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며 세계를 깊게 탐색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글쓰기로 이어지는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리 디지털 노마드라도 우리의 일상과 분리된 글은 생명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노트북 그리고 인터넷의 위력은 더욱 빛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19 이후의 시대에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뉴-노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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