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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8)

187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8일)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제7장 "파 뿌리의 지옥, 파 뿌리의 천국"을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본다. 끝까지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뿌리를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을 믿는다.

파뿌리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다. 우리가 행하는 보잘것없는 선행 한 가지도 하느님의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옛날에 아주 인색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살아생전에 한 번도 선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서 죽은 후에 지옥에 던져졌다. 이 노파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좋은 일 한 가지를 가까스로 찾아내어 “저 노파는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느님은“그럼 네가 그 파를 가져다 가 불바다 속에 있는 노파에게 내밀어 그걸 붙잡고 나오도록 해라!”하고 대답하셨다. 천사는 노파한테 달려가 파를 내려주면서“할머니, 이 파를 붙잡고 올라오세요!” 라고 말하고 조심스럽게 그 파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노파가 거의 다 끌어올려 졌을 무렵,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자기네들도 노파와 함께 나가려고 모두가 그 파뿌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다른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나를 끌어 올려 주는 것이지 너희들이 아니야, 이건 내 파란 말이야!”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파는 뚝 끊어지고 노파는 다시 불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수호천사는 구슬피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소설에서 막내 아들 알료샤를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얼료사는 수사가 되려 했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신부가 죽고 그 몸이 썩자 창녀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 놓는다. '내가 수사가 되기는 틀렸다. 고결한 성인도 저렇게 되는데, 나는 이미 죄인이나 다 글러 먹었다.' 그때 창녀가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파 뿌리 이야기이다. 그날 알료사는 꿈에서 죽은 신부를 만난다. 천국에서 신부가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파뿌리들이야." 인간은 다 구제불능으로 이기적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각자 붙들 파 뿌리 하나씩은 있었던 거다.

스승 이어령이 해주는 말이다. 이어서 스승은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앞에서 말한 자연계, 법계, 기호계의 구분처럼, 어떤 한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인지와 행위와 판단의 영역으로 기준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생각을 다루는 것은 인지론이고, '착한가 악한가'라는 행위를 다루는 것은 행위론이다.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들어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루는 것은 제 각각 미를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표현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어떤 한 가지 대상을 사고할 때, 우리는 인지와 행위와 판단의 영역으로 기준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칸트가 그 세 가지 영역을 질서 있게 정리했다. 진실(眞)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선악(善惡)의 윤리 문제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아름다움(美)에 관한 것은 <<판단이성비판>>에서 다뤘다. 서양은 세 가지 다른 기준으로 진선미를 구분하는데, 동아시아는 좀 두루뭉실하다. 진이 선이고, 선이 미이고, 미가 선인 걸로 착각을 한다.

스승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보편성이 없다. 사실 모든 생물이 다 그렇다. 그러나 생명이 아닌 것은 안 그렇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 과학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생명이 없는 정물이어야 한다. 과학은 인간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주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특히 수학이 그렇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예술은 그렇지 않다.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나온 거다. 스승의 말에 따르면, 인문 운동가는 예측 불허의 확장성으로 덮여 있던 이불을 들추고, 그 안의 낯선 세계를 , 세계의 민 낯을 현미경처럼 비추는 일을 한다.

어제는 오전 내내, 온갖 검사를 받았다. 뭐가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주치의가 하라는 대로 했다. 매 검사실마다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는데,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전날 MBC <스트레이트>라는 프로에서 방영되었다는 것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래 오늘의 시를 한 편 공유하고, 그때 들었던 생각들을 인문 운동가의 눈으로 이불을 들추고 싶다. 왜 오늘아침 사진은 파일까? 오늘 아침 시처럼, "비밀"이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불통/홍해리

이번 시집 제목이 무엇입니까?
'<비밀>'입니다.

시집 제목이 무엇이냐구요?
'비밀'이라고요.

제목이 뭐냐구?
'비밀'이라구.

젠장맞을, 제목이 뭐냐니까?
나 원 참 '비밀'이라니까.


우리 사회는 '돈'에 미친 사회이다.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다. 돈이 가치의 기준이고, 우용성과 효용성을 가치의 척도로 살고 있다. 그때 그때의 상황과 관계되는 경험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가 지배한다. 이와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로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답다. 이 이야기를 도스토옙스키는 하고 싶은 거다.

최근에 대통령 후보라는 한 분의 부인이 기자와 나누었다는 인터뷰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경악스럽다. 통화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공직을 노리는 그 문제의 부인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미투(Me too·성폭력 고발 운동)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투가 터지는 것이 다 돈을 안 챙겨 주니까 터지는 거 아니야"라며 "보수들은 챙겨주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뭐 공짜로 부려 먹거나 이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김 씨의 육성 그대로 담겨 있다. 이어 "돈은 없지, 바람은 피워야겠지, 이해는 다 가잖아. 나는 다 이해하거든"이라면서 "보수는 돈 주고 해야지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나중에 화 당한다"고 했다. 또 "지금은 괜찮은데 내 인생 언제 잘 나갈지 모르잖아. 그러니 화를 당하지, 여자들이 무서워"라고 덧붙였다. '돈 주면 미투 안 한다'는 말은 장본인
의 경우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인문 운동가로서 입을 그 문제의 통화에 입을 다물 수는 없다. 내 눈에 비친 그녀의 통화는 다 계산 된 거다. 이게 우리 사회의 민 낯이다. 김건희의 폭로된 말들을 보면, 길을 잃고 있는 보수정당을 그녀가 접수한 것 같다. 영악하게 다 계산된 발언 같다. 민주주의는 숙의 민주주의다. 숙의가 없고 현대판 샤머니즘 정치에 의지하는 정치로 다시 보수정당이 퇴행 당하고 있음이 그 예이다. 다른 이야기도 좀 나열해 본다.
(1) "김건희씨는 정치 구단 김종인 선생마저도 먹을 것 있는 잔치판을 기웃거리는, 원래 오고 싶어 했던 그렇고 그런 인물로 묘사했다"고 했다.
(2) "조국의 적은 민주당이라든가, 박근혜의 탄핵도 보수가 한 것이라는 김건희 씨의 논평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상황과도 맞지않다"며 "윤 후보가 탄핵을 뒷받침한 칼잡이 검사였다가 이제와 보수 텃밭에서 후보가 되었으니 다분히 표를 의식한 계산된" 발언이기도 하다"(추미애)
(3) 대한민국 최고의 공직을 노리는 배우자로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소한도의 주의를 요하는 수준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투가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된 것"이라는 언급은 위험하다.
(4) 전 추미애 장관의 분석에 따르면, "윤 후보가 걸핏하면 '공정과 상식'을 들먹였던 것도 이번 선거를 조국의 선거로 몰고 가겠다는 김씨의 배후 조종이 작용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 구호도 자신의 학력 위조와 신분 사기로 인해 남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다.

정치 이야기를 시작 했으니, 인문 운동가로 최근 아쉬운 것이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말이다. 김건희 미투 발언과 선거판을 달구고 있는 것이 '여성가족부 폐지', 단 7글자이다. 나도 혼란스럽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제기된 이슈다. 여가부 폐지가 공론화될 때마다 세상이 뜨겁게 달궈지는 이유가 뭘 까? 질문을 해 본다. 그 답을 <뉴스핌>의 오승주 가자에게서 얻었다.

"우리 사회는 남녀에 대한 세대간 인식차이가 크다. 어린 시절부터 '남녀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 지어 교육받은 40대 이상, 지금은 '꼰대'로 통칭되는 세대는 여성의 차별을 가정에서부터 세뇌돼 온 경향이 크다. 하지만 20대 이하는 그렇지 않다. 현재 20대는 남녀의 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별로 다른 특성을 갖고 태어났을 뿐 '꼰대 세대'에 비해 남성이라고 이득을 얻는 경우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대남'들은 남성이기 때문에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식이 강하다. 일단 1년 반 가량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하는 '병역' 등에서 불평등하다고 여긴다. 물론 '이대녀'들도 할 말은 많다. 여전히 채용과 어렵사리 직장에 들어가서도 승진 등에서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인식이 많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누구 편을 들 수 없는 문제다. 여전히 세상은 개인이 부딪히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단순한 셈법으로 단칼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단순히 선거때만 되면 불거지는 이슈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가진 내적 갈등을 포괄하고 있는 '담론'일지도 모르겠다. 담론은 시대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숙제다. '남녀'를 갈라 쳐서 표를 얻기 위한 꼼수가 아니라, 대선을 앞두고 이 참에 한번 진지한 사회적 고민과 방향을 잡는 역할을 했으면 싶다. '내가 대통령 되면 얼마를 더 줄게'라는 속사포 같은 공약보다 '여성가족부 폐지론'에 담긴 한국사회의 내적 갈등과 세대간 이해 등을 진정으로 되짚는 대선후보들을 보고 싶다.

대한민국 국민은 '얼마 더 줄게'보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미래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후보에 목마르다. 물론, 여가부 폐지론보다 중요한 이슈는 널렸다. 언급하는 순간 '대통령은 물 건너 갔다'고 여길지 모르는 연금개혁과 세금문제, 재정혁신 등 '이대남' '이대녀'들이 짊어져야 할 미래 부담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선후보가 절실한 요즘이다."

다시 스승의 인터뷰로 돌아온다. 올 겨울은 눈이 오지 않는다. 쌓인 문을 못 본다. 스승에 의하면, "밤사이 내린 눈은 눈부신 쿠데타"라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눈 오는 날 아침에 창문을 열면, 하루하루 똑같던 날,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는 것과 같다는 거다. 잠자는 사이에 세상이 바뀐 거다. 보통 쿠데타가 밤에 일어나니까, 밤에 내린 눈은 아름다운 쿠데타라는 거다. 그러나 쿠데타와 다른 것은 눈은 곧 사라진다는 거다. 그러니까 스승은 "아름다운 쿠데타"라 이름 지었다. 눈 뜨면 달라진 세상, 그런 경이로움을 문학에서는 '낯설게 하기'라 한다.

스승은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고 했다. 짐승 중에는 웃는 짐승이 없다고 한다. 사람도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웃음도 있다 한다. 눈물과 웃음은 동일한 거다. 기쁨의 눈물이라고, 기쁠 때도 웃고, 슬플 떼도 웃는 게 인간이다. 스승은 좋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기여차, 할 때 '어기'에는 힘을 주고, '여차'에는 힘을 빼거든. '여'에서 쉬는 거지, 웃음의 역할이 그렇다네."

그 다음은 춤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춤을 좋아한다. 그런데 춤 축 기회가 별로 없다. 머리나 감정을 많이 쓰는 사람은 춤으로 몸을 써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다. 그런데 스승은 인생은 춤이라고 정의를 내리신다.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이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이렇게 말씀하시고, 스승에게는 글을 쓰고 사는 게 춤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