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2일)

어제는 서울 강의를 가는 바람에 <인문 일기>를 업로드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오늘 아침 두 개의 <인문 일기>가 공유된다.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화두를 잡고 싶다. (1)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일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늘 기억하지만, 진짜 죽음을 직면해 보았는가?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나 곁에서 먼저 하늘 나라로 간 아내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2)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 이야기. 제목 만으로 호기심이 생긴다. 신의 콜링?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3)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이건 나도 경험했다.
스승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한다. 글 쓰는 사람은 에고이스트이다. 왜냐하면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된다. '자아'를 통과한 글만이 만인의 심장을 울리기 때문이다.
스승은 암에 걸려 죽을 때까지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면, 암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다.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 알 수 없다. 다만 스승은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방사능 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며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ubker-Ross) 이야기 나온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고 이를 인지하기 까지의 과정을 다음의 5단계로 구분 지었다. "부인(denial)-분노(anger)-협상(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이다. 이를 '죽음의 5단계'라 하지만, '분노의 5단계'라고도 한다. 이 모델은 사람이 죽음과 같은 엄청난 상실을 겪을 때 보이는 심리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다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지.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다.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 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는 거다.
신의 부름은 고통 없는 죽음이 아니다.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것이 신의 콜링이다. 스승은 니체 이야기를 했다. 신이 없다고 한 그도 십 년간 식물인간처럼 살다 죽었다.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다.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 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진다. 마부에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울다가 미쳤다.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다. 그때 니체는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 한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다.
스승은 언어가 틀에 갇히면, 사고도 틀에 갇힌다고 했다. 이 틀을 벗어나려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그게 인문학 적이거나 예술적인 접근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중국이 두 글자, 또는 사자성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선왕께서 말하기를……이야'라며, 먼저 말한 모델이 있어야 인정해주는 것 때문이다. 내 머리로 생각해야 전혀 다른 앵글이 나온다.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거다. 우리는 의문이 생겨도 의문을 질문으로 꺼내어 표현하는 용기가 부족하다. 민주주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다.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된다.
나는 늘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 그래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사람마다 살아온 경력이 다르니까.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거나 주입하려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니까. 이런 가운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그를 매우 반갑게 생각하고, 그와 음모를 꾸민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 몰래 꾸미는 일)'라고 말했다. 이 음모의 시작은 서로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하며, 뭉클한 위로를 받을 때가 공감하는 순간이다. 음모를 사전에서는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밈 또는 그런 꾀"로 정의하지만, 고 신영복 교수는 음모를 "현실에서 든든한 공감의 진지(陣地)"라고 말하면서, 음모는 우정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정의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변화시키는 힘은, 내가 오늘 아침에 결정한 결심과 그것을 이루려는 연습이다. 그 연습은 내 삶을 어떻게 끌고가야 할지 질문하며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회가 주는 명칭은 나의 군더더기이다. 올해는 시선을 외부에 두지 말고, 나의 내면을 찾는 시간을 많이 가질 예정이다. 잘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발견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평상시 그저 생각하던 습관을 바꿔, 두 번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의 나의 모습에서 관조할 생각이다. 나 자신, 즉 내가 나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는 유일한 자이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 의해 나에게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과 불행은 내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결과이다. 인간은 행위의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막을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을 야기하는 행위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매일 아침 공유하는 시도 블로그로 옮긴다. 시가 길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를 공유한다. 좀 길지만, 강요된 비대면의 시간에 좀 긴 시를 읽어 볼 기회이다.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 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행위를 결정하는 원인인 생각을 훈련시키는 노력이다. 생각을 훈련한다는 것은 본성을 개조하는 일이며, 개성을 주조하는 작업이다. 어제의 자신을 정복하고 초월하는 가운데, 힘이 생기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서 환희가 생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생각으로 운명과 개성이 결정되는 거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크기만큼, 위대하던지 시시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 생각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이기심, 욕심 그리고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높은 차원의 사고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해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우선 생각의 크기를 키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질문(質問)이란 한자는 내가 오늘이라는 숙명적인 과정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가치이다. 그것이 '질(質)'이다. '질'은 남들도 다 확인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원칙이자 바탕이다. '질'은 보이지 않는 나만의 내공이다. 보통 사람들은 수량에 환호하지만 자신만의 전설을 찾아 나선 인간은 '질'을 다듬는데 하루를 사용한다. 한자 풀이로 보면, '질'이란 '두 손에 도끼날과 같은 정교한 정과 망치를 들고 자신만의 패물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건너가기 위한 경계를 훌륭하게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질문은 그 문(問, 물음)을 통해 변화무쌍한 미래로 진입하기 위한 자신만의 무기이다. 칼 포퍼에 의하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라 했다. 문제해결을 위한 문제들은 답을 요구한다. 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찾나? 그 답을 찾으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답이 없고, 질문이 잘못되어도 답이 없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던 답도 질문을 바꾸면 길이 보이고, 같은 듯 보이는 문제도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다른 답에 이른다.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은 그에 적당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질문은 달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스스로에게 습관적으로 묻는 훈련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이라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그 시간이 빚어낸 공간 안에서 자신이 완수해야 할 임무를 스스로 묻기를 주저한다면, 우리는 오늘을 헛되이 보낼 공산(公算)이 크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의 목적은 해답에 있지 않고 질문 자체에서 발견된다. 이런 질문은 자신의 삶을 더 숙고하는 질문을 유도하기도 한다.
나는 매일 아침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사는가? 그래 내 임무는 인문 정신을 고양시키는 인문 운동가이다. 그 답을 문학평론가(전영규)의 칼럼에서 찾은 적이 있다. "문학의 역할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불러내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는 일이다." 그리고 박경리 작가의 말에서도 찾았다. "작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작가의 본질, 인류의 운명을 고민하는 게 작가가 가는 길이다." 문학이 타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작가에겐 생존만큼이나 치열한 고뇌와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별 볼일 없는 내 문장들이 나와 무관한 자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가를 꿈꾼다. 더 나아가 그 위안이 삶-죽음이 아닌 살림-을 향한 연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바람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명성이 곧 능력인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미국이 "할리우드가 헤겔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오프라 윈프리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나 인문정신의 측면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대통령이 되는 능력과 대통령을 잘 하는 능력 사이의 간극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대통령직은[정치 리더의 역할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균형감각이다. 영어로 말하면, 밸런싱이다. 밸런스(균형)은 명사이고, 밸런싱은 동명사이다. 그러니까 밸런싱은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행위로 실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를 잘 하기 위해서는 자질도 훈련도 필요하다. 특히 공공성과 민주주의-국민주권의식-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지니고, 공적 서비스 경험이 있어야 한다. 사익을 위해서만 일한 사람은 더 특별한 공적 서비스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초연결된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선거 능력과 정치 능력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치공학적으로 만 움직이는 선거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명성이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문 운동가이다. 올해부터는 우리들의 삶이 달라졌으면 한다. 어떻게? 하나는 안전, 또 하나는 평화로, 또 하나는 '저녁이 있는 삶'과 '사람이 먼저'인 세상으로. 이런 휴머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구현되려면 두 축이 돌아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의 제도 변화를 촉구하고, 정부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적폐 관료들을 청산하고, 사회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또 하나는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위대한 개인'으로, '위대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 "내 삶이 달라지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 간부들은 부하 직원을 저녁에 붙잡거나 육아 휴직에 눈치주지 말고, 직원들은 근무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남편들은 부인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고, 여성은 과감히 다양한 직종에 도전하는 것이다. 각자 위치에서 할 일을 일하는 시간만큼은 충실하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네 가지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가족, 친구, 건강 그리고 영혼(참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알프레드 디 수자 (0) | 2022.01.13 |
|---|---|
| 타타타/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김국환 노래 (0) | 2022.01.13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 (0) | 2022.01.12 |
| 깡통 / 곽재구 (0) | 2022.01.12 |
| 까뮈/이기철 (0) | 2022.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