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9일)

어제에 이어, 이어령 교수의 2022년 1월 1일자 김지수 기자의 인터뷰,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 믿으라"에서 나의 눈길을 끈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본다. 그리고 이어서 작년 11월에 나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몇 가지 내용을 이어갈 생각이다. 이 책의 부제가 "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대화"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수 기자는 책에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어령 교수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몸, 육체)와 마인드(마음) 그리고 스피릿(영혼)을 설명한다. 이해가 쉽다. 컵이 육체이다, 죽음은 이 컵이 깨지는 거다. 유리 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이 내 몸이 깨지는 거다.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진다.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다. 그게 스피릿, 영성이다. 원래 컵은 비어 있다. 거기에 뜨거운 물, 차가운 물 담기는 거다. 말 배우기 전에, 세상의 욕망이 들어오기 전에, 세 살 핏덩이 속에 살아 숨 쉬던 생명, 어머니 자궁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의 허공, 그 공간은 우주의 빅뱅까지 닿아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라는 컵 안에 존재했던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스피릿, 영성이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질서, 그래서 우리는 죽으면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다.
이어령 교수는 컵(육체)가 깨지고, 그 안에 담긴 물(욕망 감정 등의 마인드)이 쏟아져도 컵이 생길 때 만들어진 원래의 빈 공간(영혼)은 우주에 닿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를 위로했다. 그러나 자주 '마인드를 비우고, 하늘의 별을 보라'고, '빈 찻잔 같은 몸으로 매일 새 빛을 받아 마시며 살라고, 비어 있는 중심인 배꼽(타인과의 연결 호스)과 카오스의 형상인 귀의 신비를 잊지 말라고 우리들 다독였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이 이어령 교수의 현재 상황을 잘 설명한다. "나는 늘 밤을 부엉이처럼 뜬 눈으로 지새워요. 이젠 어둠과 팔씨름을 해도 초저녁부터 져요. 빛나던 단추를 모두 뜯긴, 패전 장군의 군복 같은 수의를 입어야 지요.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 죽어도 그 입술에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하시며, 우리들에게 지혜를 한 번 더 전달해 주심에 큰 감사를 드린다.
시대의 지혜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2022년 새해에 산소 같은 지혜를 불어 넣어 주신 것들 중 몇 개를 공유한다.
- 그는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최상의 힘을 낸다고 했다.
- 그의 죽음은, 죽어도, 영성의 세계를 갖고 간다는 거다. 영성은 컵 안의 빈부분이다. 공간의 문제이다. 그래 생각을 비우기 위해 '멍 때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멍 때리기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판단 중지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 방어 기재로 쓰는 거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거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된다.
- 말이 글보다 중요하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김소월)처럼, 감정도 말로 표현해야 감정으로 나오는 거다. '슬픔? 아 슬프구나' 처럼, 슬퍼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말을 하니까 슬퍼지는 거다. 인간은 말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말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이 없는 거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교수는 제도와 법률의 세계인 노모스(nomos, 법계), 물질과 자연의 세계인 피시스(physis, 자연계), 표현과 상징의 세계인 세미오시스(semiosis 기호 상징계)를 분리해서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법계의 진리는 오늘이라도 바뀔 수 있지만, 상징계와 자연계는 안 바뀐다. 예를 들어, 어제까지 '산'이었던 것이 '손'으로 못 바꾸고, 0도에서 물이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다. 그래 글 쓰는 사람이 버틸 수 있다. 권력 가진 자들이 법은 지배해도 나의 언어는 못 건든다. 자연계, 법계, 상징계를 진선미의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순수이성이 진이고, 실천 이성이 선이고, 미가 판단 이성이다. 이 3 가지 범주를 섞지 말고 분별해서 사고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서 좋으면 그게 진리이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하는 게 자신의 몫이다.
- 이어령 교수는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재미나게 살아 오셨다. 우리가 말하는 '자기 다움'은 나만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이어주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회의는 하나의 기쁨을 낳고, 또 하나의 기쁨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이렇게 순환한다. 그에 의하면,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 한다. 그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향해 썼고, 자신이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라 했다. 타우마제인이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 '놀라움'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대한 관찰과 숙고와 함께, 우리가 인간의 지성을 무엇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나도 매일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난다. 우리는 '타우마제인'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 매일 글을 쓰며 발산하고, 그 발산한 만큼 수렴을 하고 싶게 만들어, 또 책을 일고,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발산과 수렴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래 오늘은 폴란드 시인인 비스와라 쉼보르스카의 <경이로움>이란 시를 공유하고, 동시에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의 덧붙임도 같이 읽는다. "칸트는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과 경외로 나를 떨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그렇다. 우주 속 지구라는 별에 의식 있는 존재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경이는 없다. 우주의 입자가 수 없는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현재 내 몸을 이루고 있다. 수 억도 열로 달구어지다가 차가운 암흑의 공간에서 헤매기도 했다. 어떤 인연이 이 꼴을 만든 것일까?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고,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나일까?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답이 없는 질문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의 끝 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는 누구일까? 잔잔히 흐르던 물길이 돌부리를 만난 것 같다."
경이로움/비스와라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 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인터뷰에서 만난 이어령 교수의 말씀 중, 나를 흔들었던 내용들을 더 이어간다.
- 이어령 교수는 독서와 여행이 '나'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가장 능동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책을 서문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고, 짐승이 새싹을 뜯어 먹듯이 하라고 권하신다. 그는 소가 풀을 뜯듯이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 했다.
- 그는 단독자로 살라고 했다. 아흔아홉 마리 양으로 떼를 지어 살지 말고 한 마리 양으로 생을 어슬렁거리라고 한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은 목자 엉덩이만 쫓아 눈앞의 풀만 뜯어 먹지만, 한 마리 양은 구름을 보고, 꽃향기를 맡다 홀로 낯선 세계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독자'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들뢰즈의 '단독성'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혼자를 감각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생명이다. 인간이 집단이 되면 추상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집단화하면, 개인의 얼굴과 숨결은 다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 각성하여야 우리는 단독자가 된다. 다시 말하면 유니크해진다.
'단독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는 일반성(generality)과 특수성(particularity)을 구별하는 것이 핵심적인 작업이었지만 들뢰즈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일반성 안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들끼리는 교환이 가능하다.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으로 보면, 모든 개체는 교환 가능하기 때문에 소모품처럼 소비되지만, 단독성의 개념으로 보면 모든 것이 교환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중하게 된다. 인문운동가는 타인이나 사물, 혹은 사건에서 단독성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이것이 인문정신의 핵심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그를 생각만 해도 쾌적함이 올라와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생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부류는 그저 그렇다. 보면 좋고, 안 봐도 좋다. 대체가능한 존재들이다. 그런 단독자는 시대의식을 포착하고, 포착된 시대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자각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람은은 자신의 폐쇄적인 시선을 벗어나 시대를 들여다보고, 거기서 문제를 발견하려고 덤빈다. 어떻게?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런 호기심이 발동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독립된 주체,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라고 한다.
단독자는 대답하는 일보다 질문부터 시작한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신의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 우리는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인 것이다.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이다. 반면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한다. 대답과 질문은 다른 차원이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다시 말하면, 대답은 기능의 차원이지만, 질문은 인격적인 문제이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도식이 가능하다.
'질문-독립적 주체-궁금증과 호기심-상상력과 창의력-시대에 대한 책임성-관념적 포착-장르-선도력(리더십)-선진국'. 선진국에서는 "너 참 독특하고 유일하다(Your are so unique.)"라고 칭찬한다. 이러한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근거로 자기 삶을 꾸리면 자기 주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지 않는 윤리적인 삶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더 좋은 우리의 삶의 터전을 위해 집단지성에 기여해야 한다. 집단 지성을 높이는 방법은 우리가 사회 발전 방향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 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뒤에서 비평만 하는 것은 멈출 일이다. 네 주변엔 비평가가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브랜던 비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속이 상할 것이다.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것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 없다." 매일 지켜보면서도 그걸 할 수가 없다면 슬픈 일이다.
- 놀이가 중요하다. 특히 유년 시절의 놀이가 즐거웠다. 싫증이 안 났다. 유년은 아직 육체가 마인드라는 물로 채워 지기 전의 영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받은 충격은 상징계의 언어와 법계의 언어가 부딪혔기 때문이라 했다. 어린 시절 게임에서 '너 죽었다' 하면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되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에서는 '너 죽었다'하면 기관총으로 쏴 죽이는 거였다. 그리고 최후 승자가 인간애를 믿고 희생애를 간직한 주인공이었다. 사실 현실에서는 인정사정 없는 놈이 이길 것 같은데, 상징계에서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 이겼다. 그리고 그가 본 <오징어게임>은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고해성사라는 거다. 그 드라마 속에서 소외되고 짓밟힌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물어뜯으며 쨌고 뺐는 게임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준 거다. 그러나 이건 창피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거다. 진짜 무서운 것은 감추는 거다. 오히려 모순을 드러냈기에 더 자유로운 거다. 그리고 선이 악을 이기고, 인간은 믿을 만 하다는 것을 보여준 거다.
- 이어령 교수는 인터뷰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계가 이미 다 세팅된 것 같아도, 더 나은 길과 몫이 반드시 있다'고 하셨다. 코로나 시대는 이제 비주류, 마이노러티가 진짜 경쟁력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출구가 여러 개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환경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휴머니티, 자기 안의 영성을 믿어야 한다. 착한 작가 반드시 이긴다고 강조하셨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인간이 되려면, 그 바탕에 휴머니티가 있어야 한다. 그게 생명 자본이다. 질서 있는 것은 무질서해지고, 뜨거운 것은 식어가고, 모든 것이 엔트로피 순방향으로 멸망해 가지만, 오직 생명만이 거슬러 올라간다.
- 일찍이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 기술과 감성의 공존)'라는 말을 만드신 이어령 교수는 메타버스 세상이 되어도, 중요한 것은 인터페이스라 했다.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라고 했다.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이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 우리는 목을 중요시 했다. 그래는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 하고, 길목, 손목, 나들 목이라는 말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우리 미래 사회의 관건이다. 생명자본, 디지로그 모두 이 '사이'를 부드럽게 풀어서 이어준 명명이라 했다. 디지로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등분이 아니라 융합하고 새끼 쳐서 새 생명이 나오는 생명 자본의 세게이다. 남녀가 만나 어린아이를 낳듯, 이질적인 것이 섞여 새 세상을 만드는 거다.
그는 다시 한 번,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는 말씀이 변함 없다고 하셨다. 그에 관한 <인문 일기> 쓰는 데, 이어령 교수가 <동아일보>(1월 4일)와 다시 인터뷰를 하셨다. 나를 뜨끔하게 했던 몇 가지 이야기도 좀 공유한다.
- 우리 사회는 여전히 눈이 멀거나, 성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누군가를 판단한다. 사람들이 편견을 가는 건 당연하다. 이를 바로잡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즈음 지식인들은 정치, 경제에 종속됐다. 지식인 제 역할을 못하니까 편가르기와 진영 싸움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치 밖에서 정치를 객관 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2030세대가 절망하는 원인을 파악해 제거해 줘야 한다. 젊은이들을 키워야 미래가 생긴다. Rm 다음은 세대갈등이다. 창조적 긴장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80대와와 20대가 공생해야 좋은 세상이다. 젊은이들을 선거판의 '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 전염병을 계기로 푸코가 말한 '바이오폴리틱스(biopolitics)', 즉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명정치 현상이 세계를 덮쳤다. 과거 독재자는 '나를 죽이는 사람'이었다. '내 말 안 들으면 너를 죽인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0가 퍼진 사회에서는 '내 말 들어야 너를 살려준다'는 식이다. 독재자를 피해선 도망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도망가면 백신도 맞을 수 없다. 국민이 구가지도자를 영우이라고 떠받들게 된다. 잘 모르면 감시 사회가 될 수 있다.
- 포스트 코로나 세상은 물질 가치가 '생명 가치'로 바뀌고, 인류의 생명 가치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를 이끄는 건 주류가 아니라 보리밭처럼 밟히고 올라온 마이너리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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