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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2년 전 오늘 아침에도 비가 왔군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봄비 잦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봄 비는 벼농사의 밑천이다. 봄 비가 잦으면 마을 집 지어미 손이 크다. 부녀자 손이 크면 지난 봄 비가 잦았던 것이다. 봄 비는 잠 비요, 가을 비는 떡 비라는 말도 있다.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 비처럼'이란 노랫말에서 보듯 봄비는 더할 나위 없는 서정적 소재이다. 그리고 봄비는 요즘처럼 미세먼지로 온 국민이 고통받는 현실에서 고마운 존재이다. 구질구질하다는 이유로 더이상 봄비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 놈의 봄비는 왜 이리 시도 때도 없이 오나”라고 버릇처럼 되뇔 일도 못 된다. 우리 모두에게 생명수인 까닭이다.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봄은 '보기' 때문에 봄이라는 이가 있다. 그러니까 이 봄 비가 그치면, 세상 만물이 더 잘 보일 것이다. 새싹을 기르는 봄비는 꽃의 부모라고 한다. 봄비를 꽃을 재촉하는 비란 뜻의 '최화우(催花雨)'라고도 한다.

어젠 제법 요란하게 봄비가 왔다. 들뜬 내 마음에 간이역을 세워 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끝없이 여행을 한다. 그것들의 목적은 여행 자체이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또 하나의 '간이역'이다. 그래 나는 오는 것 막지 않고, 가는 것 붙잡지 않는다. 붙잡는다고 갈 것이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등떠민다고 오는 것이 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기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 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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