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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춘분

120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어제는 춘분(春分)이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 날이다. 오늘부터는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진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따스한 봄볕과 봄 바람에 물러갔으면 한다. 오늘은 주말 농장 상추 등 채소를 이식할 생각이다. 어제 대전역 중앙 시장에 나가 모종을 잔뜩 샀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선은 중용(中庸)이고, 악은 모자람과 과함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품격의 원칙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그 반대가 중용이 부족하거나 과도한 상태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무절제'라고 한다. 중용의 사전적 정의는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부족과 과잉의 중간 지점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중용을 '아레테'라고 불렀다. 이를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덕(德)'이다. 자연과 인간의 길인 '도(道)'가 일상에 구현된 것이다. 이 '아레테'는 인간 삶의 최선으로, 자연의 운행 원칙이다. 항상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 조용히 정진하는 자연스런 노력이자 습관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아레테는 어원적으로 힌두교의 '르타(rta)'와 라틴어 '아르스(ars)'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르타'가 '우주의 당연히 그래야 하는 힘찬 자연스러움'으로 인간 사회에 적용되면 '다르마(darma)'가 되고, 인간에 적용되면 '카르마(Karma)'가 된다고 했다. 이 '다르마'가 한역(韓譯)되면서 '법(法)'이 된다. 그리고 '카르마'는 '업(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레테를 이데아의 세계에 숨겨져 있는 원칙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테(德, 덕)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발굴해야 할 인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그는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들을 모두 중용을 통해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無謀)와 비겁(卑怯)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쯤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아레테는 극단을 피하고 그 중심을 잡는 일이라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그 적당한 중간 지점을 '아름다움'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대칭(對稱), 비율(比率) 그리고 조화(造化)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감정인 사랑을 자아내며, 인간 문명의 기초인 건축, 교육, 정치 등을 통해 장려되고 재생산된다."

배교수에 의하면, 중용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고 했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나를 평화롭게 하는 통찰을 얻었다.

배철현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인 "세오리아(theoria)"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가치가 측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고, 만일 B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인 것이다."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선한 사람은 선한 부분이 51%이고 악한 부분이 49%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이제 세상과 사람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조(觀照)하는 힘이 생겼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우리는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인간 삶의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어로 ‘쎄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theory'는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이론’이란 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인내하며 볼 때 슬그머니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 어울리는 생각, 말 , 행동을 '중용(中庸)'이라고 말한다. 배철현 교수는 "인류의 비극은 인간이 가만있지 못할 때 생겨난다"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을 제어하는 방법 두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하나는 아침 명상이다. 묵상을 통해 삼매경으로 진입하는 훈련을 통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그 반대로 인간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훈련이다." 쉽게 말하면, 고요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요함은 나의 집착과 욕망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런 훈련을 통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I'm nothing)'라는 것을 되찾는 일이다. 고요함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자기-자신의 최선을 기억하고 그 안으로 진입하는 기쁨을 얻는다고 배교수는 자신의 <매일 무상>에서 여러 번 말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어제는 춘분(春分)이었다. 밤과 낮의 같아진 날이다. 오늘부터는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진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따스한 봄볕과 봄 바람에 물러갔으면 한다. 오늘은 주말 농장 상추 등 채소를 이식할 생각이다. 어제 대전역 중앙 시장에 나가 모종을 잔뜩 샀다.

흔적/최승호

맑은 하늘에 비행기구름 두 줄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저 흔적을 남기려고 제트비행기가 날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믄요'
'비행기구름은 오래 가지 않나 보죠?'
'그러믄요. 그림자 얹는 하늘이니까요'

잠시 하늘 보던 시인과 농부는 다시 밭일을 한다.
호미 끝에 대가리 찍힌 지렁이가 갈 생각을 않고 몸을 뒤틀고 있다.
죄 없기가 이처럼 힘들다.
콩밭의 모기들이 대낮인데 목덜미를 쏘아댄다.
敵 없기가 이렇게 힘들다.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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