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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종소리는 둥글게 세상으로 퍼진다.

2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입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난 주부터 소리를 생각한다. 소리 중에서 종소리는 "오래 우려낸 침묵"의 소리라는 이재무 시인의 시를 오늘은 공유한다. 시인은 종소리는, 다만 침묵으로 울리면서, 저마다 한 생애를 보내는 생명들을 부드럽게 보듬는 것을 잘 포착했다. 나도 이젠 사람들을 보듬지 못하는 말을 하기보다 오히려 침묵하기로 했다.

좋은 시이다. 난 지난 주일에 바다가 보고 싶어 장장 4시간의 버스를 타고 가서, 강릉 정동진 바닷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군사상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시민에게 접근이 허락되지 않던 길을 지자체가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정확하게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이다. 여기서 '정동'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심곡'은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동진의 ‘부채 끝’ 지형과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의 모양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같아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지명이 선정되었다.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2300만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 단구이다.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과 웅장한 기암괴석에서 오는 비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그 동안 해안경비를 위해 군 경계근무 '정찰로'로만 이용되어 온 곳으로 천혜의 비경을 선사한다.

시인이 말하는 바다는 동해가 아니라 서해이다. 물론 그곳도 바다이다. 강물은 단 한걸음도 후퇴하는 법 없이 꾸준히 하구에 당도하여 그 많은 사연을 바다에 내려놓고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의 구절도 공유한다.

시인의 생각의 흐름을 잘 따라가면, 매우 흥미롭다. 종소리는 둥글게 세상으로 퍼진다. 종소리가 만든 "소리의 원 안"으로 들어온 생명들은 귀를 씻는다. 귀를 씻는 일은 새로운 귀를 얻는 일이다. 소리는 듣는 게 아니라, 들려오는 것이다. 귀를 씻은 시인은 종소리 속에서 "바다에 다 와 가는 강물"을 본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면 더 이상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바다가 된다. 자기를 열지 않는 강물은 바다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다가 말한다. "괜찮다"고. 고통스런 삶도 한 순간일 뿐이라고 위로한다. 좋은 시이다.

소리/이재무

오래 우려낸 침묵 동그랗게 퍼져서 간다
저 소리 어찌 저토록 맑고 깊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두툼한 손길 닿는 곳마다
새순 불쑥 키가 자라고
또래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흐르는 냇물
쑥스러워 한 박자 숨소리 낮추는 것을
꽃들은 홍조 띠며 더욱 붉어가고
가지에 걸터앉은 꽁지 짧은 새
서산낙일에 눈시울 붉어지는 것을
고달픈 한 생애가 소리의 원 안에 들어와
귀 씻고 제 안 골똘히 들여다보는
다 늦은 저녁 천년 잠든 돌 고요히 눈을
뜬다 저 자애로운 소리의 상호 앞에서
누군들 열린 단추 여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다에 다 와 가는 강물처럼 당신은,
산사(山寺) 떠나 숲 사이 우렁우렁 걸어오셔서
빠진 이처럼 춥게 서 있는
마을의 지붕 위에 괜찮다, 괜찮다, 고
잔기침 흩뿌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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