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25일
다음은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에 있는 내용인데, 각색된 것을 형수님이 보내주셨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 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는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는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정말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애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 지를 아는 것이란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에 다가가 그 태생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내가 아니라 그에 맞추어 주는 걸 말한다." 어제 춘화현상(春化現象)이란 말을 검색하다 만난 글이다. 중앙일보에 한의사분이 <윤경재의 나도 시인>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현상"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장자> "지락"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공유한다.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왕은 이 바닷새를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왔다. 술을 권하고, 제례악 음악을 연주해주고, 제사 음식인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양하는 방법으로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 게 아니다.
그 글의 제목이 "추운 겨울 견뎌야 꽃 피우는 화초가 있다, 사람도 그럴까"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글 속에 이런 말이 들어 있다. "진정한 자서전이 되려면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어떤 타자를 만났는데, 그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다는 내용을 고백해야 하는 게 자서전의 본질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였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바뀌었다'가 되어야 인생의 말미에 쓰는 겸허하고 진정한 서사시가 되는 거다."
이젠 몇 일전부터 이야기 해오고 있는 화두로 돌아간다. 같은 맥락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글쓰기가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활동이라 주장했다. 생명의 자율성과 능동성에 가장 적합한 행위라고도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나아가 지혜를 알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싶어 한다. 그걸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길이 글쓰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노동이면서 활동이고 놀이이면서 사색이다. 그 길은 홀로 가는 담대함이 요구되지만 동시에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타자와 깊이 뒤섞여야만 가능하다. 생식과 생장의 원초적 본능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지성을 요구한다. 고미숙은 글쓰기가 노후 대책으로 좋다고 강조한다. "노후 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로 하겠다" 개그맨 전유성의 말도 소개했다.
사는 건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느냐 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는 건 소유가 아니라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노후대책은 관계와 현장의 활동이다. 한 평생을 직장과 핵가족에서만 산 사람은 은퇴 후 힘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돈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걸로는 해결이 안 된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관계와 활동이다. 계속되고 부지런한 활동은 예전의 끈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노후 대책은 관계와 현장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이다.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속에서 같이 읽고 쓰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스토리들이 확장될 수 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구처럼,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지/인생을 등에 지면 짐이 되고/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되는 거야." 인생이 짐이든, 사랑이든, 산다는 것은 늘 어떤 약속을 지키는 것의 연속이다. 그래 오늘도 코로나 블루이든, 코로나 레드, 아니 h로나 블랙이든, 내가 정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그날 주어진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니 특별한 삶, 특이한 죽음 같은 것은 없다. 오늘 아침 사진은 아직 눈이 남은 산책길을 걷다가 찍은 것이다. 느릅실 할머니가 보이는 듯하다.
느릅실 할머니와 홍시/신광철
인생이 짐이라고
아니야, 사랑이야
인생은 홑이불 같이 가볍기도 하지만
비에 젖은 솜이불 같기도 한 거야
등이 굽었지만 앞산보다는 덜 굽은
진천 느릅실 할머니가 장작을 나르며 말했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지
인생을 등에 지면 짐이 되고
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되는 거야
짐이 홑이불처럼 가벼워지지
농익은 홍시가 떨어지고 있었다
석양에는 홍시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자식도 등에 지면 짐이지만
자식을 가슴으로 안아봐
하나라도 더 주고 싶고
안타까워 내 뼈 부서지는 것도 모르지
고생이 오히려 고마울 때가 있지
그것이 사랑 아니겠어
나이를 먹을 수록 걱정되는 것이 치매이다. 그 예방책은 적절한 수면, 항산화 음식, 유산소 운동 그리고 지속적으로 뇌를 자극해서 인지와 계산, 사고 능력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일이다. 실천 사항으로는 가급적 스마트폰 대신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 메모하면 기억 능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읽기와 쓰기가 최고 치매 예방법이다. 실제로 읽고 쓰기는 양생술로도 최고다. 특히 쓰기는 뇌와 심장을 젊게 해준다.
주변에 있는, 책과 함께하는 관계와 현장에 접속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를 어려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어려운 것은 맞지만 재능이 필요한 영역은 아니다. 문학과 달리 지혜를 연마하는 글쓰기에는 나이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언어는 천재성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서 시작한다. 언어는 각종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만 발달될 수 있다. 문자는 더 하다. 문자는 진입 부터가 이미 집단적 지성을 전제로 한다. 문화, 전통, 관습, 대안 등 온갖 사회적 가치들을 습득해야 문자의 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 그래야 문해 력(literacy)가 나온다. 문법과 문자체계를 터득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인간적 성숙과 사회적 통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숙과 통찰의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 이건 천재성과 무관하다. 삶을 총체적으로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교육은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야 한다. 교육의 핵심은 읽기와 쓰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 읽기와 쓰기는,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보편적 활동이고 생존의 토대이다. 그래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 삶에 대한 질문
- 사람에 대한 궁금증
- 사물에 대한 호기심
-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그리고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계속 이어가려면, "항심(恒心)과 하심(下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항심은 시간으로 통과하는 힘이라면, 하심은 어디 서건 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천재성이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앎에 대한 절실함과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항심과 하심이 중요하지 글쓰기에는 천재성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 오히려 천재성이 빛나는 사람들은 재능을 타고난 대신 정신적 불균형-약골 체력 혹은 감정 기복, 지나친 인정욕구 등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는 공정한 영역이다. 특히 디지털이 정착되며 기존의 학연, 지연, 계층 등의 경계와 차별을 가차없이 없앴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보면 그렇다. 거기에선 학연은 물론 외모, 인기, 권위 어떤 기준도 통하지 않는다. 유저들의 욕망과 접속할 수 있느냐 만이 관건이다.
고미숙은 글쓰기의 실전편에서 18세기 조선 정조 시대의 문인 이옥의 '흥미로운' 창작법을 소개하였다. 이옥에 따르면, 내가 지은 게 아니고, 천지만물이 나를 의탁해서 쓴다는 거다. 나도 개인적으로 글쓰기란 우리가 화장실에 가서 배설하는 행위와 같다고 주장한다. 우선 가득 채우고, 넘치면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이옥 식으로 말하면, 가득 채우는 것이 천지의 리듬과 우선 접속하는 일이다. 물 흐르듯이 귓구멍과 콧구멍, 눈구멍을 따라 들어가 단전에서 맴돌다가, 줄줄이 입과 손끝을 따라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옥의 창작 론에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한가지는 만물은 만 가지 물건이라 하나도 같은 게 없으니, 차이를 찾으라는 것이다. 하루도 서로 같은 게 없고, 한 곳도 서로 같은 게 없고 사람도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다름을 찾는 것이 독창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진부하게 쓴다는 것은 전혀 나의 신체적 울림이나 차이를 발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지털 노마드 (1) | 2021.03.10 |
---|---|
about 웃음 (0) | 2021.03.10 |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0) | 2021.03.10 |
좋은 삶은 성장이고 순환이다. (0) | 2021.03.10 |
수요일에 만나는 시대정신 (0) | 2021.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