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12일)
1
입추 경에는 하늘의 구름이 아름답다. 사실 우리가 자연에서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 하늘이다. 돼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평생 눈앞의 먹이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땅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하늘이라는 ‘이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하늘의 구름들은 끝없이 움직이고, 모이고, 옅어지며 사라진다. 바람에 따라 흐르는 구름들을 보며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하루에 한 번 구름을 보는 것은 좋은 명상법이다. 지구별에서 우리는 모두 잠시 지나가는 존재다. 오늘 아침 사진을 보며, 천상병 시인의 <구름>을 공유한다.
구름/천상병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은
지상을 살피러 온 천사님들의
휴식처가 아닐까.
하느님을 도우시는 천사님들이여
즐겁게 쉬어 가시고
잘되어 가더라고 말씀하소서.
눈에 안 보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할지 모르니
널리 용서하소서.
절기를 만든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통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닌가? 달력을 들여다보면, 어떤 날에는 씨를 뿌리라 하고, 어떤 날에는 김을 매라 한다. 농경 사회에서 만들어진 절기이지만, 그 속에는 지구의 호흡과 태양의 리듬이 절묘하게 담겨 있다. 이미 우리는 농경사회를 지나고, 산업혁명의 시대를 지내고, 전자화된 디지털 문명의 초기 사회를 지나 오늘 같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세상을 살고 있다. 인류가 가진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지구는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 거의 완벽히 탈바꿈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대단한 위력 앞에 허약한 존재일 뿐이다. 무더운 여름을 에어컨이 이기게 해주지만, 그건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잔재인 건물 안의 얘기일 뿐, 그것도 우리나라처럼 에어컨 장착 비중이 큰 나라의 얘기일 뿐이다. 지구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낱 더위를 이기지 못 하고 절규한다. 찬란한 문명을 이룬 유럽은 그간 에어컨 없는 삶에 익숙해 있었지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이상 열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러니 인간은 아직도 유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발달한 인류문명도 자연을 거스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논밭을 일구지 않아도, 절기의 감각을 잃지 않는 건 그 신기한 예언 같은 힘 때문이다. 대형마트가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정확한 건 몸의 감각이기도 하다. 한 여름 밤 창문을 열고 누웠을 때, 몸을 감싸던 공기의 질감이 다르고, 어느 날부터는 소슬한 바람에 작은 쓸쓸함이 실려 들어오기 시작하면 가을이 함께 오는 것이다. 자연은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그 과정은 늘 새롭다.
2
어제에 이어, 예수회 수사님 브라이언 브로간이 쓴 <<품격 있는 황혼>>의 내용과 내 생각을 공유한다.
성숙한 성찰은, 이냐시오 전통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만남을 기피 하는 것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고 만남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사랑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강의를 갈 때는 성공적인 강의보다 듣는 분들에게 사랑을 건네는 봉사여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자기 중심적인 오만한 판단과 사랑의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 사이에서 늘 선택해야 한다. 이런 경우 이냐시오의 충고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선하게 해석하라는 거다. 하루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작은 짜증은 은총이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우리의 모든 만남은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상황은 마음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니까 이젠 긍정적이고 친절한 말이 아니라면 아예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거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저를 사랑 안에서 성장 시켜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거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 펼쳐지고, 성장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이렇게 느리고 예측 불가능한 성장 과정에 맞춰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까 그 분의 사랑을 받으려면 충분히 비워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현존은 수난, 공통, 죽음을 통해서 였다. 우리가 이웃들, 특히 세상의 가난한 이들, 멸시 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하게 될 때 그 신비는 깊어진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가련한 사람들 속에, 여기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하느님은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계시며, 감추시는 가운데 무수히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본래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풍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좋은 사람들, 곧 우리를 위해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우리를 조금 더 편안하게,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 주려고 애쓰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우리가 부모님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사 시간에 성찬 전례의 감사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선한 것이 나온다'는 말로써 진정한 사랑의 기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내 주변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선함은 무엇이든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뜻하는 거대한 확언이다.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3
유대인들에게 ‘40’이란 숫자는 특별하다. 40은 변화를 열망하고 훈련하여, 오래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훈련소 입소 기간이다. 기원전 12세기, 문명과 문화의 메카인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 삶의 목표로 알았던 사람들이 광야(廣野)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40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광야는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없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들은 이 기간을 통해, 선택 받은 민족으로 다시 태어난다. 40은 아무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발을 디뎌 본 적이 없는 공간과 시간을 이르는 추상(抽象)이다.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한 사람들이 히브리인들(Hebrews)이다. ‘히브리’란 의미는 ‘임시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나그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들어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노동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르는 용어가 바로 ‘히브리(Hebrew)’다. 스스로 자기가 속한 혈연 공동체를 떠나 경제적 자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다.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고향이나 도시를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이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극형이 성벽 밖으로 범죄자들을 내쫓는 행위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어원이 되는 ‘아바르’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법을 위반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사실을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망의 노예로 살기 보다는 자신을 자신 답게 만드는 자유를 찾아,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행위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는 40일 동안 두 번의 금식기도를 감행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식탐을 억제하여 자신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금식이다. 모세는 한번은 인간의 기본 규율을 상징하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머물렀다. 다른 한번은 그가 하산하여 금 송아지를 아직도 숭배하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을 보고 화가나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부순 뒤, 다시 산에 올라가 40일을 지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도 그를 살해하려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로부터 도망쳐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시내산 동굴로 들어가 40일 동안 묵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신은 천둥, 번개,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엘리야는 신은 그런 자연현상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40일 동안 동굴에 있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듣는 신비를 경험한다. 이 상태를 수련한 자는 남들이 들을 수 없는 형용모순인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신은 건물에 있지 않고, 인간의 심연에 존재한다.
목수로 생계를 유지하던 청년 예수도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기도를 통해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빛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스스로 빛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그 빛으로 자신을 소멸 시키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버려야 할 단점과 부추겨야 할 장점을 직시할 수 있는 밝음을 주었다.
어거스틴(아프리카 알제리 출신)도 엘리야가 들었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이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섬세하고 미세하지만 강력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었고 자신의 귀로 내면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 소리를 우리는 "똘레 레게(tolle lege!)"라고 한다. 흔히 교회에서는 '집어서 읽어라'는 뜻으로 <<성서>>를 읽으라는 데 쓰인다. 그러나 "톨레 레게"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로도 쓰인다. 오늘 나는 무엇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할까? 이 기준의 원칙은 선하게 살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사막에서 홀로 수도 생활을 했다는 성 안토니우스가 들은 것이,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였던 것처럼,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었다고 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때부터 그는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한 순간의 취사선택을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웅장한 건물의 틀을 잡은 사람이다. 예수는 앞으로 등장할 그리스도교의 청사진을 찍었다면, 바울과 베드로는 그리스도교의 터전을 마련했고,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외벽을 만든 자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그 후,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제 신의 옷을 입은 자로, 신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4
하느님께서 내 안에 거 하시는 곳이 기도의 장소이다.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다(고린도 1, 3:16). 성령이 머무르신다. 이게 내 영혼에 있다. 기도를 드릴 때,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시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신다."(로마 8:26) 성령께서는 내 마음의 성전 안에서 나를 위해 성부와 성자께 이야기하고 계신다. 기도는 마치 호흡처럼,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은총의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하느님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한, 아주 깊은 수준의 기도 상태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하느님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신비스러운 현실에 눈뜨게 해준다.
내가 이해하기로 기도는 내 안의 양심, 아니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께 무한히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르 성장하게 하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랑의 응답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느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이라는 거룩한 음악에 맞추어 점점 더 조율해 가는 것은 축복이다.
이런 마음의 기도와 우리의 호흡은 공통점을 지닌다. 호흡은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꾸준히 계속된다. 이처럼, 몸과 영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기도를 위한 거룩한 존재로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작은 골방이 있어야 한다. 자신 만의 성스러운 공간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고요 속에 잠겨야 한다.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이 경청이 더욱 깊어지게 하여야 한다. 고요해야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주님은 매우 조용하게 오신다.
그리고 욕망의 억제는 소박함(樸)을 통해 가능하다. 그 소박함을 일깨우는 검소한 차실(茶室)이나, 기도하는 작은 골방 같은 구별된 공간을 갖는 일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몸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영혼이 메마르면, 몸도 마음도 메말라 버린다.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물을 주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에 물을 주는 시간이다. 물을 주는 기도는 골방에서 홀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품위는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품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갖춰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못 생긴 여자가 아름다워지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헛된 짓일 것이다. '위대한 개인'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이 자기만의 골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늘 <인문 일지>에 소환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기도 또한 골방에서 하라고 일렀다. 한데 가난한 기도가 사라져가고 있다. 통성기도가 잦아지고 있다. 함께 울다가 일제히 그친다. 목사는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된다고 소리친다. 예수가 언제 잘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더럽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번듯한 성전이 아닌 마기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떡과 포도주 한잔을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요즘 신도들은 헌금과 통성기도가 쌓였으니 천당이 예약되었다고 믿는다.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안팎의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다.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미래를 창조하였다. 복음서 저자들은 희망을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별에서 찾았다. 이 별은 고개를 가만히 들고 드넓은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조용히 찾으려는 소수에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이 별을 발견한 자를 '동방박사'라고 소개한다. 동방박사는 머나먼 땅 페르시아에 거주하면서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섬기는 사제인 '마기'(Magi)들이었다. 마기들은 한글 성경에는 동방박사로 번역됐다. '마술사'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magician'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별의 움직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던 '마기'들은 밤하늘에 등장한 커다란 별을 보고 유대까지 왔다. 이들이 별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 궁궐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동네의 누추한 마구간이었다.
주님은 매우 조용하게 오신다. 한편 성모님은 '침묵에 싸인 여인'으로 묘사된다. 성모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속삭이시는 소리를 들었다. 성모님께서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자신이 더 고요해지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하는 거다. 하느님께서 생명이 없는 진흙 덩어리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우리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창세기 2:7)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숨결 하나하나는 특별이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불어 넣어 준다. 언젠가 숨은 나의 몸에서 떠날 것이다. 그러니 생명의 호흡은 소중하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 있음에 하느님께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오리는 거다. 어쩌면 단순히 내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야훼(Yahweh)는 온유함과 자비로 가득한 하느님이시고,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야훼는 희망과 위로가 가득한 아름다운 단어이다. '야흐-웨', 숨을 들이쉴 때 '야흐' 소리가, 숨을 내쉴 때는 '웨'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나의 호흡이 늘 기도를 준비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호흡 총량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 숨을 다하고 나면 우리는 생을 마감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급하게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천천히 숨 쉬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에 대한 헌신의 징표로 잠시 시간을 내어 자신의 호흡을 바치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의 영혼은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몸으로 기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 봉사하려는 지향으로 일하는 것이 곧 기도이기도 하다. 또는 '성가는 두 배의 기도"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했다. 우리는 경배 할 때 고개를 숙인다. 기도할 때 손을 모으고 성호를 그으며 몸을 축복한다.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기도 속에서 그 분을 만난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는 그 분을 만날 때 마다 인사 드리고 그분이심을 알게 될 때마다 축복해 드리네." (홉킨스) 기도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문제이다. 이 관계에서 우정을 쌓는 거다. 그러나 우정의 핵심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 곧 우리의 신성화이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성 이레데오)는 말이 와 닿는다.
우리는 그 관계의 우정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주님처럼 된다.
▪ 덜 이기적이면서,
▪ 유쾌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열린 태도를 갖고,
▪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게 되고,
▪ 고통을 참고 인내하게 된다.
삐걱거리고 힘든 것도 없이 우리의 좁은 마음의 문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우정이 자라나길 원하기에, 이 목표를 앞에 두고 조금씩 나아간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만남은 우리를 변화 시킨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신의 삶이 사랑의 곡선을 배워가면서 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는 계명에 맞추어 나아가는 거다. 이 계명이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덜 비판적이게 된다. 나는 이전에 지녔던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나 자신과 부딪히려 하지 않는다. 이젠 자신은 흐름에 맞서려 하는 대신, 흐름을 타고 가려 한다. 원한, 상처, 좌절에 빠져 있는 시간을 보내기보다 감사하는 데 시간을 더 보낸다. 이런 식으로 나는 여전히 진행 중인 한 편의 작품인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장자가 말한 "승물유심(乘物遊心)"이 소환된다. 이 말은 '일과 사물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타고 넘어 자유로운 마음에 노니는 삶'을 뜻한다. '실패든 성공이든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라'는 거다. 더 멋진 해석은 '흐르는 물처럼 상황을 타고 노닐어라'는 거다. 원문은 이렇다. "乘物以遊心(승물이유심) 託不得已以養中至矣(탁부득이이양중지의) 何作爲報也(하작위보야) 莫若爲致命(막약위치명)"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遊心)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託不得已), 중심을 기는 데(養中) 전념하십시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는 것"만 하면 된다는 거다.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사(世上事)의 파도를 타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며 자신이 걷는 길을 풍요롭게 가꾸라'는 말이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이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주목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더욱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도 도움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한 사랑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뉴스를 볼 때도 한 걸음 물러선 구경꾼이 아니라,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를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본다.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들 안에 있는 선함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들 안에 있는 나쁜 것이 사라지도록 그분께 요청한다. 기도는 전적으로 관계를 발전시킨다. 과거에 대한 성찰은 풍요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준다.
시편의 "어리석음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를 공유한다. "하느님, 당신의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 말라 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 (시편 63:2)
4
연중 제19주간 수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믿음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희망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사랑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착함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고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부드러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깨끗함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품음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섬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살림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5
내가 있는 공동체에 주님께서 머무르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2026/8/12/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18장 15-20절: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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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동체
마태오 복음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명시적 표현이 1장에 등장하고, 복음서 마지막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곧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우리 편에서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머무르시기 위한 조건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시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지요. 처음에는 단둘이, 그다음에는 둘이나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갈등 해결을 시도하고, 그도 안 되면 공동체 전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친교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오늘도 하느님의 현존을 모실 아름다운 성전이 되길 소망합니다. 박재형 미카엘 신부(글라렛선교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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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힘겨운 숙제는 무엇일까요? 경제적 어려움이나 건강 문제도 크지만, 결국 우리를 가장 깊이 아프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가정과 직장, 심지어 성당 공동체 안에서조차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마음이 틀어지면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고통이 되고, 결국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온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죄로 인해 깨어진 거룩함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책임감’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가슴 아픈 환시를 목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극에 달하자, 마침내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셔야 할 거룩한 성전이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제 9,4)의 이마에 표징을 찍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공동체의 죄악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다시 자비의 손길을 펴십니다.
죄로 얼룩진 공동체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선포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뒷공론을 하거나 소문을 내는 대신, 단계별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가서 단둘이 만나 그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 절차의 핵심은 상대를 단죄하여 쫓아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 영혼을 부끄럽지 않게 보호하고 회복시켜 ‘형제를 얻기 위함’(마태 18,15 참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복음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당사자와 마주할 용기는 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내 편을 만들고 상대를 고립시키려 합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공동체에 더 큰 분열을 가져오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곁을 떠나게 만드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단둘이 만나라”는 권고는 대단한 영적 용기를 요구합니다. 내 감정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의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모으는 것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척박한 관계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현존하시어 평화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손가락질하고 너무나 빨리 관계를 끊어버리는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SNS 공간에서 단 한 번의 잘못으로 누군가를 매장하는 냉혹한 논리가 우리 가정과 신앙 공동체 안까지 침투해 들어오기도 합니다. 가족 모임에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수년째 등을 돌린 가족이 있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냉대하는 교우가 있습니까? 상대를 마음속으로 단죄하는 동안 우리 영혼의 성전은 평화를 잃고 황폐해집니다. 우리는 "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안 들어"라고 비난하기보다, "주님, 저희의 나약함을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평화를 주소서" 하고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있는 형제가 있다면 그의 허물을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않는 ‘침묵의 절제’를 시작해 보십시오.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주님의 손을 잡고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먼저 청하십시오. 주님은 의인들만 모인 완벽한 곳이 아니라, 죄지어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이 서로 용서하려고 버둥거리는 그 가련하고 겸손한 모임 중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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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 먼저 ‘단 둘’이 따로 만나 그가 잘 알아듣도록 좋은 말로 타일러 보고,
▪ 그가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으면 ‘제3자’인 증인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주라고 하십니다. ‘욱’하는 주관적 감정에 휘둘릴 땐 상황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기에 잘못된 판단을 하지만, 제3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길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 이 정도 선에서 문제가 원만하게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교회 공동체에 공적인 중재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고집 센 사람이라도 본당 사제가 진지하게 말하면 적어도 듣는 시늉이라도 할 테니까요.
자칫 이런 절차는 둘 사이에서 조용히 끝내고 말 것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 일을 크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론화까지 시키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파인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거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절차를 밟으라고 하시는 것은 그 사람과 나 두 사람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형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남남’이라면 그 사람 하고의 관계가 어찌되든 아무 상관 없지만, 형제 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그리고 그 사람을 나 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도 너무나 슬픈 일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소중한 형제와의 관계를 그냥 놓아버리지 말고 어떻게든 그와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로 노력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뭐 하나 내세우거나 자랑할 거리 없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 같아도 내가 땅에서 풀어주고 탕감해주는 작은 행동 하나가 ‘하늘’에까지, 즉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일생 일대’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나’라는 존재가 내리는 결정 하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그토록 중요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니만큼, 기왕이면 미움과 원망으로 상대방을 죄에 매어두는 결정을 하기보다, 용서와 화해로 상대방을 죄에서 풀어주는 결정을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런 결정을 많이 할수록 나와 마음을 모아 하느님 아버지께 같이 청해줄 ‘형제’들이 늘어날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시며 힘을 실어 주실테니까요. 구원의 문제에서는 적을 늘리는 것보다 ‘내 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는 게 엄청 유리하다는 거 잘 아시지요?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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