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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조금 모자란 삶이 오히려 더 평온 하다.

378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8월 11일)

1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욕망과 권태 사이의 진자 운동'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삶이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추일 뿐이라는 거다.  그는 인간의 만족은 지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으로 괴롭고,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로 괴롭기 때문에 모든 만족감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필연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쫓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채워지면 곧 지루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욕망을 끝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것을 적당한 수준에 머물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난 한 주 동안 수입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 번 주는 휴가철도 끝나고 잘 될 거다. 좀 여유를 갖자.

"만족은 소망을 사라지게 하고, 그리하여 기쁨을 사라지게 한다. 그렇기에 만족이나 행복의 실현은 고통의 완화, 욕구 충족 이상의 무언 가가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그러면 그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족감이란 이제는 충족되어 사라져버린 과거의 고통과 결핍을 떠올릴 때 간접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중요한 것은 조금 모자란 삶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점이다. 
▪ 덜 가지겠다는 여유, 
▪ 덜 채우겠다는 절제, 
▪ 그리고 지금 가진 것 안에서 머무를 줄 아는 태도이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균형이며, 가난이 아니라 성숙이다.  아침의 맑은 공기처럼,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 숨이 쉬어지듯이, 삶도 약간의 여백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모자람은 여유를 만들고 그 여유는 행복을 만든다. 따라서 조금 모자람은 미학이기 이전에 생존 전략이고, 부족함을 유지하는 능력은 개인의 품격이자 지혜가 된다. 이 시대에서는 더 많이 갖는 사람이 아니라, 덜 가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강함으로 인정받고 있다.

성철 스님은  사는 게 편안 하려면 다음 5 가지를 줄이라고 했다. 줄일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거다. 
▪ 손에 일을 줄인다. 할 일을 무작정 줄이기 보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거다. 덜어낼수록 삶의 힘이 모인다. 
▪ 몸에는 소유를 줄인다. 많이 가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진다. 꼭 필요한 것만 남겨 존다. 비움이 곧 자유가 된다. 
▪ 입에는 말을 줄인다. 말이 많아질수록 실수도 늘어난다. 꼭 필요한 말만 담백하게 한다. 침묵은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 
▪ 대화는 시비를 줄인다. 이기려는 말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수록 관계도 삶도 훨씬 편해진다. 
▪ 위에는 밥을 줄인다. 과식은 몸을 무겁게 하고, 마음까지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적당함이 건강과 평온을 지켜준다.

오늘 아침 고른 시는 이정록 시인의 <구부러진다는 것은>이다. 봄 줄이고, 삶을 구부리자. 노자 <<도덕경>> 제45장에 "대직약굴(大直若窟)"이라는 말이 나온다. 구부러진 것이 오히려 크게 곧은 것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자벌레를 가만히 보면, 굽어져야 곧아지고, 곧아져야 굽어진다. 곧아지려면 굽어져야 하고, 굽어지려면 곧아져야 한다. 굽어짐이 곧 곧아짐이고, 곧아짐이 곧 굽어짐이다. 굽어짐과 곧아짐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구부러진다는 것/이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치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솟구치는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2
"조금 모자란 삶이 오히려 더 평온 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늘 더 가지려 하고, 더 채우려고만 애를 쓴다. 그러나 삶이 힘들어지는 순간은 부족해 서가 아니라 넘치기 시작할 때가 많다. 그래서 ‘모자람의 미학’은 단순한 생활 태도가 아니라, 매우 철학적인 사유이다. 사유의 반대가 본능이다. 사유 없이 살면, 본능의 노예가 된다. 동서양의 현인들은 넘침보다 부족함을 더 깊은 완성으로 보았다. 

나는 넘침보다 부족한 사람, 완벽함보다 틈을 보이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틈이 있어야 인간적이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는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 부른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 부른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보다 어딘 가에 부족한 듯이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느낀다. 제주도의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돌담을 살펴보면 돌과 돌의 사이를 메우지 않았는데,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설 수가 있는  빈틈이 있어야 한다. 그 틈이 넘침이 아닌 부족함이다. 

실제로 일상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리적 틈새가 아닌 제 3의 공간인 틈새가 존재할 때에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내 마음에 빈틈을 내고 나 자신의 빈틈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빈틈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주도의 돌담처럼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모자람도 미덕이 된다. 빈틈이 있어야 햇살도 파고든다. 빈틈없는 사람은 박식하고 논리 정연해도 정이 가질 않는다.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틈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창구이다.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유이다.

3
어제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몸이 구부러질 정도로 예수회 수사님  브라이언 브로간이 쓴 <<품격 있는 황혼>>을 읽었다. 어제에 이어 책의 내용과 내 생각을 공유한다.

인생 후반에 얻는 축복 가운데 하나는, 정말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보다 명료해 진다는 점이다. 나이 들면서, 포기해야 할 일들을 배웠다.
▪ 게임에서 이기는 것
▪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
▪ 항상 정시에 도착하는 것
▪ 최후의 발언을 하는 것
▪ 까다로워지는 것
▪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옳은 일'을 하는 것 등

좋은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 집과 차 그리고 정원을 보기 좋게 관리하고,
▪ 개인의 건강과 외모에 대해 적당하게 관심을 갖는 일 등이다.

그보다 더 크고 좋고,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이다. 신약 성경의 위대한 계시는 하느님이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룩하신 세 위격, 삼위일체이시라는 데 있다. 성삼위(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는 사랑의 삶을 공유하시며,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적인 사랑 안에서 온전히 행복하시다. 성삼위는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기 원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이다. 상호적인 사랑의 관계.

무엇이 중요한 가를 물을 때, 읽어 보면 좋을 일화이다. 

어느 시간 관리 전문가가 졍영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을 하게 되었다.
그는 윗부분이 넓은 4.5리터짜리 병을 탁자 위에 놓고, 그 안에 주먹 크기의 돌멩이 12개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돌을 안에 더 넣을 수 없게 되자, 그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병이 가득 찼나요?" 모든 학생이 "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탁자 밑에서 한 양동이의 자갈을 꺼냈다. 그리고는 다시 자갈을 넣고 병을 흔들었다. 자갈이 돌멩이들 사이사이에 잘 위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었다. "병이 가득 찼나요?" 이쯤 되니 학생들도 눈치를 체고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가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탁자 아래에서 한 양동이의 모래를 꺼내 병에 붓자, 돌멩이와 자갈 사이사이 비어있는 공간으로 모래가 들어갔다.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이 병이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외쳤다.

이번에 물을 찰랑찰랑 해질 때까지 부은 다음 학생에게 물었다. "이 시범의 요점은 무엇일까요? 어떤 학생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일정이 꽉 차 있어도, 노력만 하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잇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큰 돌멩이를 먼저 넣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그것을 아예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필요한 한 가지'를 우리 삶 속에 채워 넣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첫 번째 우선순위여야 한다. 그 다음으로 다른 일상적인 일들을 배치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짧은 통화만으로도 관계는 환히 밝혀질 수 잇다. 그런데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내어준다. 긴 기도를 하는 이유를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했다. 이해가 된다. 서로 사랑하니까.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시고, 저도 하느님을 사랑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품격 잇는 황혼>>의 저자인 브라이언 그로간 수사님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이런 이야기 나누라고 하신다.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 안에 숨겨진 좋은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 달라고 청할 수 있다는 거다.

인문학에서는 "신과의 합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 인간 각자는 내면에 신성이 들어 잇다. 그 신성을 만나는 것이 삶의 올바른 방향성이라고 본다. 인문학은 무한과 영원을 향한 영혼의 등대로 '희망의 학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거울에 비추어보라. 볼록한 배, 가는 다리, 퀭한 눈동자. 생물학적인 존재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볼 품이 없다. 그러나 소멸해가는 존재일지라도 자신만의 왕국임을 자부하며 자기 완성의 길을 멈추지 않도록 돕는 것이 인문학이다. 먼지에 불과한 존재일지 언정 천지와 우주와의 합일을 꿈꾸고 바라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는 이유는 인문 정신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웃의 고통을 내면 화 하지 못하는 불치의 병이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의 파고 속으로 밀어 넣는데 어떻게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인문학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은 없다. 전쟁은 국가와 자본이 공모한 학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는 마음의 힘이 욕망에 막혔기 때문이다.

4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가 소환된다. '도'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작은 것을 크다 하고, 약한 것을 강하다 하고, 깨끗한 것을 더럽다 하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들의 비웃음을 산다. 참된 진리를 말한 사람은 다 그랬다.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돈 사람 취급을 받았고, 물을 이용해서 시계를 제작할 수 있다고 했던 장영실은 따돌림을 받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동설이나 자격루는 과학에서의 큰 '도'가 되었다. 그래서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지구는 돌면서 엄청난 소리를 내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인 우주에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그래서 "대음희성(大音希聲, 큰 소리는 소리가 없다.)",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모습은 형체가 없다)"이다. '도'는 들리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만물이 태어나고, 이루어지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존재다.

<<도덕경>> 제41장의 도입부 중,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라는 문장을 다음과 같이 속되게 번역하였다. 그런데 통쾌하다. "하삐리 새끼들이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웃긴다고 깔깔거릴 거야. 그런데 그 새끼들이 깔깔대고 웃지 않는다면 내 도는 도가 아닐 수 없는 거야!"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上士聞道(상사문도) 勤而行之(근이행지):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中士聞道(중사문도) 若存若亡(약존약망):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하고,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하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 하류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선비라는 말을 지식인으로 읽고 싶다. 훌륭한 지식인(士)은 노자가 말하는 '도'에 대한 철학에 동조하고 실행에 옮기겠지만, 중류, 하류 지식인들은 의심하거나 크게 비웃을 것이라 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진정한 진리(道)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노자는 자신의 도에 대한 철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거다. 위대한 진리는 처음에 배척을 받거나 무시를 당했다. 새로운 진리의 시작은 사람들의 불신이 함께 했다.

여기서 나는 "상사"의 모습에서 한나를 만났다. 한나는 여든 네 살의 과부였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홀로된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세상의 즐거움을 좇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겉보기에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을 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고 기록하고 있다. 어제 아버지 기일 미사의 말씀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시간을 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을 살았다. 세상의 화려함 대신 성전의 침묵을 택했고, 육신의 편안함 대신 단식과 기도를 택했다. 그 결과, 그녀는, 수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요셉과 마리아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얻었다. 예루살렘의 그 어떤 권력자나 부자도 보지 못한 세상의 구원자를 직접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녀의 노년은 허무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침내 만남으로 완성되었다.

5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로 말씀은 <마태오 18,1-5.10.12-14>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되찾은 양의 비유" 이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지금처럼 영원히>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보잘것없는 이를
있게 하는
보잘것없는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보잘것없는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이를
있게 하는
작은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작은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낮은 이를
있게 하는
낮은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낮은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여린 이를
있게 하는
여린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여린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착한 이를
있게 하는
착한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착한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고운 이를
있게 하는
고운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고운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이를
있게 하는
부드러운 이는
지금처럼
영원히
부드러운 이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6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 이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봅시다.
2026/8/11/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마태오 복음 18장 1-5.10.12-14절: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작은 이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어린이 혹은 작은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어리다고, 혹은 나보다 부족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도 요청하십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나와 동등하게 바라보라 하시는 당부이지요. 그리고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통해 작은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을 넘어, 이제 스스로 작은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으로의 초대이자 작은 이들과 기꺼이 하나 되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서 어린이와 같은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누구 하나 내치지 않으셨고, 예외 없이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셨으며, 사람이 되시어 기꺼이 우리와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이렇듯 주님이며 스승이신 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작은 이들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재형 미카엘 신부(글라렛선교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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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무더위 속에서도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다는 것을 책임감을 갖추고 세상 이치를 깨닫는 긍정적인 과정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어른으로 살다 보면 어느새 남과 비교하며 서열을 따지게 되고, 영혼의 기쁨은 메말라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하늘나라의 새로운 법칙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방식대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서열을 따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낮추어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라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고통과 재앙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쓰디쓴 고통처럼 보였지만, 그가 순종하여 입에 넣었을 때 그것은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3,3)고 고백합니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십자가의 사명조차 달콤한 은총으로 변한다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계산하고 거부하는 어른과 달리, 어린이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꿀처럼 달게 받아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온전히 자신을 맡깁니다. 반면 어른은 내 힘으로 능력을 증명하려 애쓰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쉽게 절망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길 잃은 양’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 영적 가난함을 깨닫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그 순수한 신뢰가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만듭니다.

오늘은 이러한 어린이의 순수함으로 하느님만을 의지했던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입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는 세상의 명예를 버리고 가난이라는 두루마리를 기꺼이 삼켰습니다. 그녀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거절하고, 오히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권리”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세상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지만, 하느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어린이 같은 믿음을 가졌던 성녀에게 그 가난은 산해진미보다 꿀처럼 단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작아질 때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깨에 메고 기뻐하실 것이며, 일상의 고단함을 은총의 단맛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하늘나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잊지 맙시다. 성체의 은총 안에서 굳어진 마음을 풀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맑게 웃을 수 있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됩시다.

“영원한 사랑이신 주 하느님, 저희가 세상의 기준에 갇혀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비교하며 영혼의 기쁨을 잃어버렸음을 고백하나이다. 오늘 성녀 클라라의 모범을 따라, 세상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당신께만 온전히 의지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주소서.  제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가 비록 쓰디쓰게 보일지라도, 당신을 신뢰하며 삼킬 때 꿀처럼 단 은총이 됨을 체험하게 하소서. 저희가 스스로 작아져서 당신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복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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