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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다.

37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31일)

1
아침에 우연히 언젠가 적어 두었던 행복해지는 한 가지 방법을 읽게 되었다. 행복은 지난 시간의 복기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전혀'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생각 없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말을 쓴다. 예컨대, "우리 집에는 사랑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것만 있고, 나쁜 것은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이다. 100% 완벽하게 좋기 만을 바라면 90만큼 좋아도 안 좋은 10만 보이고, 안 좋은 것만 무의식에 남는다. 그런데,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0에서 부터 하나하나 따져 가면 안 좋은 10보다 훨씬 더 많은 90의 좋은 것들이 보인다. 좋은 것을 복기 하다 보면 긍정적이 되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루하루 참으로 좋았던 일들을 추려내고 감사의 목록을 작성하다 보면 훨씬 더 행복해진다. 그리고 행복은 사랑하는 일에서 나온다.

행복/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매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은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이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야기 하나를 공유한다. 일본 도쿄에 올림픽이 열렸을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이 된 건물을 헐게 되었는데, 지붕을 벗기던 인부들은, 뒷다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관리인은 인부들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인부들은 한결같이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사실의 전말을 알아보기 위하여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 다 주는 것이었다. 그 도마뱀은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먹이를 가져다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인간성의 반대는 야수성이라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말했다. 다른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해와 사랑은 느림이 주는 선물이다. 그에 반해 성급함과 우쭐거림, 자기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오해와 불신을 만들어내는 부엌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통념을 잠시 내려놓지 않고는 남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2
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어정칠월'이 이렇게 지나간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 실감난다. '흰 망아지가 빨리 지나가는 순간을 문틈으로 언뜻 본다'는 뜻으로, 세월과 인생이 없이 짧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다른 차원에서 행복해 지는 길은 각자 자신의 팔자대로 살 때이다. 그런 함께 사는 공동체는 건강하다. 

팔자(八字)는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뜻한다. 생년월일시의 간지(干支) 여덟 글자를 기반으로 미래를 점치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서 나온 말이다.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가지 기둥을 각각 두 글자씩(여덟 자)로 나타내어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나 숙명을 뜻한다.
 
사주팔자(四柱八字)의 뜻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여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면, 4개의 기둥과 여덟 개의 글자라는 말이다. 의역하면, 통상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運)과 명(命)을 말하기도 한다. 태어난 시점에 각각 연월일시(年月日時)가 존재하는데 이때 천간(天干)과 지지(地支)가 조합을 이루어 하늘과 땅에 하나의 기둥을 이루게 되며 이를 각각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라 하고, 운명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이라 하여 사주(四柱)라 부른다. 또한 사주(四柱)가 구성하고 있는 글자의 수가 모두 8개이기에 팔자(八字)  부르게 되었다. 이 두 개를 조합하여 사주팔자(四柱八字)라 부르고 인간의 타고난 운명(運命)을 살피는 기초로 삼고 있다. 사주팔자(四柱八字)란 용어는 같은 뜻을 가진 사주(四柱)와 팔자(八字)라는 단어가 의미 중첩되어 구성된 말이다.
 
천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의 10가지이고, 지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의 12가지이다. 사주는 간지로 나타내는데 '간(干)'은 10가지이므로 '십간'이라 하고, 사주의 윗글자에 쓰이므로 '천간(天干)'이라고도 한다. '지(支)'는 12가지이므로 '십이지' 라 하고, 사주의 아래 글자에 쓰이므로 '지지(地支)'라고도 한다. 

간지를 교합하면 '갑자(甲子)'부터 '계해(癸亥)'까지 60개의 조합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육십갑자(六十甲子)라 한다. 예를 들어, 1911년 양력 8월 26일 오후 6시에 태어난 사람의 사주는 신해(辛亥 : 연주)·병신(丙申 : 월주)·무진(戊辰 : 일주)·신유(辛酉 : 시주)와 같이 된다. 그리고 1915년이 을묘년이고 60년후에 1975년 다시 을묘년이 된다. 60년마다 같은 사주팔자가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주어진 팔자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거다. 왜 그런 가? <계사상전> 11장에 나오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시지덕 원이신 괘지덕 방이지(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而知): 시초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고, 괘의 덕은 모남이 있어 할 일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시초란 주역점을 칠 때 사용하는 신성한 도구로서, 시초의 덕이란 시초를 통해 드러나는 하늘의 뜻이다. 이 하늘의 뜻은 원을 이룬 모습이며 신묘하다는 말이다. 다음 그림 같다.


둥근 원으로 상징 된다. 여기서 원은 인류의 여러 문명에서 완전무결함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모두 궁극의 일자인 하늘이 펼쳐진 결과로 생겨난 것이지만, 어느 것 하나 모난 모습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이에 비해 만물을 표상하는 64괘의 모습은 다음 그림과 같다. 


사람 역시 세상 만물에 포함되므로 이는 사람 역시 모두 모가 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둥글고 원만한 모습이 아니며 완전무결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자꾸 자신의 팔자를 탓하게 되는 것이다.
 
카를 융도 모든 인간의 내면은 불균형 하며, 또한 이러한 불균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불균형이 꼭 필요하다. 융에 따르면, 원시 부족의 심리 상태일수록 불균형이 적다. 그러므로 막연히 균형이 좋고, 불균형은 나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3
사람에게는 모남이 있어 자기 할 일을 아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도 완전무결한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것을 영성(靈性)이라 한다. 사람 마음의 심연에는 두 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영성의 '성'이고, 다른 하나는 혼백(魂魄)이다.

영성에서 성(性)은 㣺(마음 심)과 生(날 생)을 합친 것으로 내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이미 있었던 최초의 마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직 나에게 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니, 이 성(성)은 의식 이전의 것으로 하늘이 내게 부여한 것이다.
 
<<중용>> 첫 구절이 다음과 시작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 성에 따름을 <도>라 하고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부른다는 거다. '성'은 내 마음의 씨앗이자 핵으로, 이후 나의 성질, 성격, 특성, 가능성 등이 모두 이 '성'에서 비롯된다. '성'은 하늘이 부여한 '신령한 성;이라는 의미에서 영성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대개 본성(본성)으로 칭하며,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장(如來藏) 또는 장식(藏識)으로 명명한다. 위의 사진처럼, 완전무결한 원을 이룬다. 이는 인간의 영성이 완전무결하다는 사실, 순수의 결정체 그대로 이며 혹 사람이 어떤 과오를 범한다 해도 인간의 영성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심층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영의 바깥 층위에 모남이 있는 혼백(魂魄)이 자리하고 있다. 위의 그림과 같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리아식(阿梨아識), 서양의 신비주의 사상에서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라고 부른다. 인간의 감정, 욕망, 무의식적 기억을 담는 미묘한 에너지체로, 물리적 몸과 정신 사이에 존재하며 모든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고 영혼의 일부로 여겨진다. 물리적 몸과 가장 가까운 에너지체로, 감각을 담당하며 아스트랄체와 상호 작용하는 것의 이름은 에테르체(etheric body)라 한다. 
  
4
다음 그림은 우리의 마음 구조를 볼 수 있는 거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가장 바깥 층위에 가서야 비로소, 즉 가장 표층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평상시 마음 속 심연에 잠겨 있는 영성과 혼백의 심층 구조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눈을 감고 명상이나 삼매에 드는 이유가 바로 마음의 심연으로 깊이 내려가서 혼백을 넘어 순수 결정체인 영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혼백은 완전무결한 둥근 원형 영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크게 튀어나온 부분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어서 모가 나 있다. 이런 모습은 완전무결한 영성이 유한한 물리 공간인 인간 육체의 형질에 담기면서 그 제약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혼백은 혼(魂)과 백(魄)이 합쳐진 거다. 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부분(영성의 반영)이고, 백은 땅에서 연유한 부분(형질의 반영)이다. 이 때문에 별도로 혼을 '신령한 혼'이라는 의미에서 영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각기 하늘과 땅에서 연유한 이원성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 특성이다.
 
대승 불교는 아리야식이 불생불멸의 요소와 생멸의 요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다고 해서 화합식(和合識)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리아식에서 각(覺)과 불각(不覺)이 겨루게 된다고 했다. 서양의 신비주의 사상에서는 아스트랄체(아스트랄계)에서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운다고 설명한다.
 
우리 마음의 심층 구조에서 혼백②에 해당하는 부분은 하늘과 땅에서 연유한 이원성이 합쳐져 생긴 것이다 보니 모난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둥근 영성①에 그대로 머문다면 아무런 운동력이 없기 때문에 혼백②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영성의 상태로는 아무런 창조가 일어나지 못한다. 반면 혼백② 같이 한 방향으로 모가 나면 그 방향으로 흐르는 방향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운동 에너지가 생긴다. 이때 사람은 그 방향성으로 인해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역>>이 말한 모남(方, 방)이 있어서 '자기 할 일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인용한다. 

"시지덕 원이신 괘지덕 방이지(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而知): 시초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고, 괘의 덕은 모남이 있어 할 일을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예술혼을 불태운다', '투혼을 불사른다', '혼을 다 바친다' 등의 표현을 쓰는데, 사람이 영성①의 완전무결하게 둥근 영성의 상태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혼백②같이 모남이 있어서 자기 할 일을 알 때, 비로소 예술혼을 불태우고, 투혼을 불사르며, 혼을 다 바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온갖 삼라만상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비틀기'라는 게 내 철학이다. 우리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어떤 존재에나 '동사적인 삶'으로 힘을 일으키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일어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彈性, 체에 외부에서 힘을 가하면 부피와 모양이 변하였다가, 그 힘이 없어지면 본래대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성질, 튐성, 힘을 더하면 형태가 바꾸지만, 힘을 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성질)이 바로 힘이다.  
 
다시 팔자 이야기로 돌아온다. 하늘의 의도를 알면 팔자의 방향이 보인다는 거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혼백②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사람의 팔자는 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②의 방향성은 우리 마음의 구조에서 표층의 의식보다 깊은 곳에 놓인 심층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에서 나의 자아('나'라는 생각)는 표층에 놓인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는 나를 고집하는 마음으로  흔히 '에고(ego)'로도 불린다. 이 자아가 주동이 되어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만, 나의 마음 전체에서 보면 이 자아는 아주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②의 방향성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은 ②의 심층적인 힘이 자신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느끼기에 팔자 탓을 하게 되는 거다.
 
강기진 선생이 제시하는 다음 그림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 각자가 자신에 심긴 지향성의 방향대로 나아갈 때 모두가 1등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자에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그림이다. 내 옆에서 달리는 사람은 함께 뛰며 서로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이지, 나의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목적지가 각자 있어 서로 다 다를 뿐이다,  
 
또한 이렇게 모두가 각자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사람이 모인 공동체는 전체로서 보다 큰 원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공동체의 집단 지성이 인간 개체의 한계를 넘어 더 커짐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 인류의 성공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내면에 특정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힘(팔자)이 담겨 있는 이유는 각 개인도 행복하고, 공동체 전체로도 조화롭기 위한 것이다.
 
또한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에게 새겨진 팔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운이 좋아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이 원하는 방향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그 길이 동시에 공동체 전체가 조화로운 원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로 말씀은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당신은 신비입니다>
삶의 길에서 만난
당신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당신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당신을
알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무엇을
알아갈 뿐
바로
당신을
오롯이 알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은
늘 그렇게
조금씩 열리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6
나는 익숙함에 가려, 곁에 계신 주님과 가까운 이의 사랑을 놓치고 있진 않나요?
2026/7/31/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마태오 복음 13장 54-58절: “예언자는 어디에서 나 존경 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 만은 존경 받지 못한다.”

익숙함이 가리는 것
우리는 가까운 것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늘 보던 사람, 자주 다니던 길, 동네 골목 하나하나, 성당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 미사 중에 들려오는 말씀까지도 어쩐지 다 안다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다 안다’는 마음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로 여긴 이들은 빤한 익숙함에 갇혀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는 주님을 향해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친숙함의 함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 눈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이냐시오 성인도 한때 자기 삶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누워 지내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삶을 처음으로 낯선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고, 바로 그 낯섦으로 회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물음이 주어집니다. 지금 내게 익숙해진 것은 과연 무엇인지요. 말씀인지, 기도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인지 그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익숙한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굳어진 마음 위에 새로운 눈을 열어 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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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31일 금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현존을 가로막는 인간의 거대한 장벽인 ‘완고함’과 ‘선입견’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아울러 오늘 기념하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 완고함의 사슬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 영적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막중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성전 뜰에 서서 예배하러 오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이 성전을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주님의 경고를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사제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멱살을 잡고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자신들의 죄를 아프게 찌르는 하느님의 진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으니 안전하다”는 종교적 안일함과 고집에 갇혀, 자신들을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가슴 아픈 통곡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유다 지도자들과 똑같은 ‘영적인 눈먼 상태’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지혜롭게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만, 그 감탄은 이내 의심과 시기심으로 바뀝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 13,54-55).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가난한 목수 집안의 청년’이라는 선입견의 틀에 그분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릴 때부터 잘 아는데 별수 있겠어?"라는 익숙함과 교만이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가슴 아프게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인간의 열린 믿음이라는 그릇이 준비될 때 비로소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위대한 영적 스승이자 예수회의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를 기억합니다. 성인은 원래 가문의 명예와 화려한 기사 작위를 꿈꾸던 군인이었으나,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 주님의 섭리로 회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위대한 성인이 된 비결은 나자렛 사람들처럼 과거와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 앞에 과감히 자신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쫓던 세상 명예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성인이 정립한 ‘영신수련’은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내 안의 사사로운 욕심과 선입견을 분별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선택하도록 돕는 소중한 영적 나침반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입견과 교만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가장 뜻밖의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 경험과 지식이라는 낡은 자를 내려놓읍시다. 성 이냐시오의 모범을 따라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이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이 되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내 고집을 꺾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나자렛에서 멈추었던 주님의 놀라운 치유와 생명의 기적이 오늘 여러분의 삶 한가운데서 눈부시게 시작될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 저희가 얕은 지식과 익숙함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당신의 현존과 이웃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했던 완고함을 용서하소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전구를 청하오니, 저희가 세상의 헛된 명예와 고집을 과감히 내려놓게 하소서.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시고, 열린 믿음으로 오늘 저희 삶에 준비된 당신의 풍성한 기적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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