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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 2

375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8일)

1
장마인지, 어제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 그래 오늘 아침은 <비 오는 날의 전화>라는 흥미롭지만, 비 소리 속에서 '니가 너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소리를 들으라는 반전이 있는 시를 공유한다. 

비 오는 날의 전화/박경자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 소리마저 지우더니 적막이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요란한 전화벨 소리 울리더니 여보세요 439-8696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아 예 그라믄요 저 혹시 대구에서 살다 오신 분 맞습니꺼 예 그런데요 아 그럼 너 성식이 아이가 성식이 맞제? 예? 아니 아닌데요 아이라꼬? 내 다 안다 니 성식이 맞데이 아 아닙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어허 니 사람이 그라믄 못쓴다 니 분명 성식이 맞는데 왜 자꾸 아이라카노 여보세요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전화 이만 끊습니다 니 참말 너무 한데이 니 성식이 맞데이 내는 못 속인다 아이가 여보세요 저는 성식이가 아니고 김경호입니다 전화 끊습니다 아 잠깐 잠깐만 니 정말 성식이가 아이라 이기가? 예 아닙니다 그럼 좋데이 니가 성식이가 아이고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거 뭘로 증명할끼고 예?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하며 전화 끊어지더니 제 소리 마저 지운 빗소리 적막이더니 '니가 너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소리만 온종일 들려 오더니

이제는 누구도 전화번호를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대신 이젠 그 노력을 삶의 훨씬 더 중요한 일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나 우리의 학술과 교육이 전화번호를 500개 외우게 하던 이전 시대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는게 아닌지 항상 뒤돌아보게 된다.

2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불러내고, 인공지능(AI)이 몇 초 만에 그럴듯한 보고서를 써주는 시대다. 바쁜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편리함의 취기가 가신 자리, 인류는 뜻밖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책은 AI에 생각의 주권을 통째로 넘겨준 현대인들의 인지적 위기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 내비게이션 없이는 길을 찾지 못하고,
▪ 알고리즘의 추천 없이는 취향조차 결정하지 못한다.
▪ 생각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다 보니 모르는 사이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하고, 결과물만 받아 쥔다.
▪ 아직은 생을 살아오다 AI를 접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머잖아 태어날 때부터 AI를 접한 세대는 비판적 사고력마저 거세당할 것 같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기술을 끊고 원시로 돌아가야 할까. 저자는 인간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 AI를 쓰되 최종 해석과 결정만큼은 내 몫으로 남겨두는 것.
▪ AI앱을 열기 전에 최소 5분은 스스로 고민하고,
▪ 가능하다면 종이에 적어보고, 그다음에 AI에 물어보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기,
▪ 질문하는 능력 키우기 등이다.

AI 아닌 ‘나’에게 주도권을을 주려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좋은 질문을 할 수 있고 훌륭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AI 시대에 무엇이 인간다움인가를 질문하며 그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 알다시피 요즘 사회의 변화 속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대본을 순식간에 만들고, 영상까지 빠르게 제작하는 시대가 되었다. 변화의 속도만큼 시청자들의 취향도 더욱 빠르게 변하고 잇다. AI가 애자일(agile) 하게 만들어내는 영상의 품질은 눈에 띄게 높아졌고, 더빙 음성 역시 사람의 목소리와 거의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애자일 하게'는 사전적 의미인 '날렵한', '민첩한'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로, 상황 변화나 고객의 피드백에 맞춰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일하는 방식을 의미이다. 거창한 계획을 한 번에 세우기보다, 작은 단위로 실행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업무 스타일을 뜻이다.

AI가 생성한 것들을 보면, 좋긴 좋은데 뭔가 인간의 온기가 빠진 느낌이다. 낯설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자리 잡아가는 과도기에서 느끼는 낯섦과 이질감 정도가 아닐까? 몇 년 전만 해도 블루투스 이어폰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는 혼자 말하며 걸어가는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곤 했다. 대부분이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낯섦도 결국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AI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휴먼엔지니어라는 분의 브런치 글에서 읽은 거다.  일본 건축가 쿠마 켄고는 콘크리트 구조물의 두 가지 모습을 말하였다. 하나는 콘크리트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고 페인팅하여 외관을 만드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콘크리트를 타설할 때 거푸집이 남긴 질감과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후자의 콘크리트는 꾸미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재료가 가진 본래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AI  시대에 인간만이 가지고 있어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생성형 AI는 기능과 효율을 극대화 하는 도구에 가깝다. 위에서 말한 마치 콘크리트 위에 화려한 페인팅을 입힌 거솨 같다. 지금 당장은 보기 좋고 완성도도 높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타설 되고 굳어지며 구조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지는 본질까지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까 AI 시대에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 인간만이 가진 온기와 경험
▪ 시간 속에서 축적된 흔적을 잃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야 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3
어제부터 공유하고 있는 심우도의 3단계와 4단계를 오늘 읽는다. 제 3단계인 견우(見牛)는 "'소(참된 나)'를 마주하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다. 소의 흔적을 따라 숲의 깊은 곳에 도달했다. 이제 자신은 마침내 그 소와 맞닥뜨린다. 심우도의 세 번째 단계인 '견우(見牛)'다. 수많은 발자국 끝에 마침내 그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기쁨보다는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참나'는 생각보다 너무나 평범하거나, 혹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낯설기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현재'와 '이상적인 미래'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낼 때 비로소 창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소'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낯선 떨림은, 당신이 드디어 '가짜 나'를 넘어 '진짜 나'와 대면하는 창조적 긴장의 정점에 서 있음을 말해준다.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은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비전)'과 '현재 처한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간극을 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혁신과 성장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 심리적, 조직적 상태를 뜻한다.  피터 센게(Peter Senge)가 주장한 개념으로, 현재의 상태와 지향하는 비전 사이의 괴리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힘이다. 그의 저서 <<제5경영(The fifth Discipline)>>의 핵심 개념으로 널리 알려졌다.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동력의 원천: 비전(목표)과 현실을 명확히 인식할 때, V(비전)-R(현실)의 차이만큼 발생한다.
▪ 에너지의 방향: 이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현실을 비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당기는 힘'을 만들어 낸다.
▪ 결정적 차이: 단순한 스트레스나 불안(감정적 긴장)에 머물지 않고, 목표를 향한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깨달음을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대단한 각성의 순간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견우(見牛)의 순간은 오히려 아주 정직한 대면이 된다. 감추고 싶었던 나의 그림자, 타인의 시선에 맞추느라 짓눌려 있던 나의 욕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순수한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은 마치 '거울 속의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응시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참된 나'는 어디 멀리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끝까지 그 자리에 있을 존재다. '소'를 발견했다는 것은, 밖을 향해 쏟아내던 모든 에너지를 멈추고 내면의 거울 앞에 서서,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나의 참된 형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대면이 중요한 이유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의 완성에 있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의 노력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무엇이 자신을 진짜로 행복하게 하는지 명백히 안다.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소'는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를 찾았는가? 아니, 자신은 이미 '소'를 보았다.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그 '나'는,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모습인가, 아니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모습인가?" 그 대답을 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십우도 여정의 가장 핵심적인 전환점이 된다.

 

4
4 단계인 득우(得牛)는 "내 손에 닿은 본질"이다. '소(참된 나)'가 숲 속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견우, 見牛)과 그 소의 고삐를 잡아 내 것으로 만드는 것(득우, 得牛)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책을 읽다가, 명상을 하다가, 혹은 뼈아픈 실패를 겪다가 “아, 이게 나였구나” 하는 짧은 찰나의 각성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통찰은 대개 찰나의 안개처럼 흩어지기 일쑤다. 득우(得牛)는 그 스쳐 지나가는 통찰을 단단한 삶의 실천으로 붙잡는 ‘결단’의 단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습관의 신경 과학(Neuroscience of Habit Formation)'이다. 뇌는 새로운 통찰을 얻는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뇌는 반복되는 신경 경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소'를 보았다는 사실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통찰을 삶의 뇌 회로에 새기기 위해, 우리는 그 '소'를 내 일상이라는 마당으로 끌어와야 한다. 깨달음이라는 지적 유희를 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고삐를 쥐는 것. 그것이 바로 득우의 본질이다.

습관은 뇌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의식적 결정을 무의식적 자동 루틴으로 바꾸는 신경 적용 과정이다. 핵심 신경 회로인 기저핵(Basal Ganglia)이 관여하며, '신호(Cue) - 빈복 행동(Routine) - 보상(Reward)'의 구조로 형성된다. 뇌의 기저핵(Basal Ganglia)을 중심으로 반복된 행동이 신경 경로를 고착화하여 '자동화된 나'를 만드는 원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신호: 특정 시간, 장소, 감정 상태 또는 이전 행동이 뇌에 '행동 시작'을 알리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
▪ 반복 행동(Routine): 신호에 의해 촉발되는 신체적, 정신적 행동 패턴이다.
▪ 보상(Reward): 행동을 마친 후 뇌가 도파민을 분비하여 '이 행동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해당 신경 회로를 강화한다.

노자는 길을 걷는 이의 태도를 이렇게 말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言者不知)." <<도덕경>> 제56장에 나오는 말이다.

知者不言(지자불언) 言者不知(언자부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塞其兌(색기태) 閉其門(폐기문): 입은 막고, 문은 폐쇄하고
挫其銳(좌기예) 解其分(해기분): 날카로운 것은 다듬고, 얽힌 것은 풀어주고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눈부신 것은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是謂玄同(시위현동): 이것을 일러 오묘함과 하나됨이라 한다.

이 부분을 도올은 다음과 같이 멋지게 번역하였다. "참으로 [도를] 아는 자는 함부로 말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말하는 자는 참으로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의 구멍을 막고, 그 욕정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이 튀지 않게 하며, 그 티끌이 고르게 되도록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가물한 고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지자불언"은 '깨달은 자는 언어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로 풀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로 설명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진실을 호도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소'를 얻은 사람은 깨달음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아침 명상에 앉고, 매 순간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정돈해 나간다. 말은 관념의 영역에 머물지만, 행동은 실재의 영역에 뿌리를 내린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내 '소'가 아니며, 삶으로 살아내는 것만이 진정으로 나의 '소'를 소유하는 길이다.

이제 우리는 '소'의 고삐를 쥐었다. 하지만 '소'는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상태다. 갑자기 돌출되는 감정, 불쑥 튀어 나오는 이기심, 타인을 향한 시기심이 고삐를 쥔 당신의 손을 거칠게 흔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통찰의 순간에 우리는 순수한 자아를 보았지만, 그 자아를 일상의 진흙탕 속에서 온전히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훈련이기 때문이다. 고삐를 쥔 그 손에 힘을 주어보는 거다. 거창한 변화를 꿈꾸기보다, 오늘 하루 내가 내린 결정이 나의 본질과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그것이 득우의 시작이 아닐까? "오늘 당신이 쥔 고삐는, 관념이라는 허상인가, 아니면 당신의 오늘 하루를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인가?" 이제 소를 얻었다면, 그 소를 잃지 않도록 나의 일상을 경작할 차례다.

5
연중 제15주간 토요일로 <마태오 12,14-21> "주님의 종 예수님" 이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당신께서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15-16)

물러서는 당신을 따르니
당신께서 오히려
당당하게 이끄십니다
슬픈 당신을 위로하니
당신께서 오히려
부드럽게 위로하십니다
아픈 당신을 보듬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정성스레 보듬으십니다
작은 당신을 품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따뜻하게 품으십니다
숨은 당신을 찾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간절하게 찾으십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을 바라보니
당신께서 오히려
애틋하게 바라보십니다
쓰러진 당신을 일으키니
당신께서 오히려
거뜬하게 일으키십니다

6
내가 가진 신앙은 예수님께서 비장하게 심으신 씨앗입니다.
2026/7/18/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마태오 복음 12장 14-21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처음 든 감정은 비장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있어 율법에 어긋남은 없는지 계속해서 주시합니다. 결국 자기네 뜻대로 되지 않자 예수님을 없애버릴 모의까지 하였지요. 그런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물러가셨는데, 수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상식적으로는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광야나 산속에 숨어 안전할 때를 기다림이 마땅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치유’라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순간에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좋은 땅이든, 길가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 씨 뿌리는 사람은 묵묵히 씨를 뿌립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해치려 함을 아셨지만, 그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얼마 후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백성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씨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묵묵히 비장하게 뿌리신 생명의 씨는 지금도 교회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한 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세상의 비정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하느님의 지극한 온유함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제1독서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밤낮으로 악을 꾸미며 약자들을 짓밟지만,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 속에서도 오히려 상처받은 이들을 조용히 치유하시며 참된 구원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의 깊은 영적 타락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침상에 누워서도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을까 끊임없이 불의를 꾸미며, 아침이 되면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기는”(미카 2,1)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법도,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도 없습니다. 오직 '내 손의 힘'만이 유일한 정의이자 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의 논리로 움직이며,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짓밟히는 것이 비정한 법칙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엄중한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인간이 쥐고 있는 임시적인 힘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이웃의 눈물 위에 세운 성벽은 결국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힘을 과시할 때,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지만, 예수님은 그 음모를 아시고도 그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조용히 그곳을 물러나십니다. 권능을 지닌 예수님이라면 하늘의 군대를 불러 그들을 단번에 심판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큰소리를 내거나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의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고요하고 겸손한 행보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 12,19). 주님의 구원은 시끄러운 혁명이 아니라, 밤사이 내리는 이슬처럼 고요하게 아픈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랑을 통해 세상에 스며듭니다.

오늘 복음의 가장 아름다운 절정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묘사한 다음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마태 12,20). 세상은 쓸모없어진 ‘부러진 갈대’를 미련 없이 꺾어 버리고, 매캐한 연기만 나는 ‘타다 남은 심지’를 차갑게 비벼 꺼버립니다. 효율성과 가치만을 따지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무기력해진 존재는 흔히 귀찮은 짐으로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죄와 상처로 영혼이 꺾여버린 '부러진 갈대' 같은 우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싸매어 주시고, 신앙의 열정이 식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연기 나는 심지' 같은 우리 마음에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불꽃을 살려내십니다. 오늘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시다. 지금 내 마음은 세상살이에 치여 사정없이 꺾여버린 ‘부러진 갈대’와 같지는 않습니까?. 혹시 나는 가정이나 일터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약한 이웃을 비정하게 꺾어버리는 세상의 힘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의 부러진 자존감과 상처를 조심스레 어루만지시는 온유한 목자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망가지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세상과 싸우려던 완고함을 내려놓고 부러진 갈대 같은 내 모습 그대로 주님의 온유한 손길에 나를 맡겨드립시다. 주님께서 내 삶의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시어, 다가오는 새로운 주간을 생명의 빛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저희가 세상의 거친 힘에 치여 상처 입고 낙심할 때마다,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당신의 다정한 사랑으로 저희를 품어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저희가 세상처럼 약한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저버리는 비정함을 닮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연민 어린 눈을 갖게 하소서. 오늘 저희의 꺼져가는 영혼의 심지에 당신의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어, 다시금 사랑의 불꽃을 피워 올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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