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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 1

37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7일)

1
오늘, 7월 17일 제헌절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여 1949년에 국경일 지정되었다. 이후 1950년부터 공유일로 쉬었으나 2008년 주 5일 근무제 도입 여파로 제외도었다가, 올해 2026년 공휴일법 개정에 따라 18년 만에 다시 법정 공휴일로 부활하여 쉬는 날이다.

대한 민국은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 일본이 패망하여 우리가 광복한 날은 1945년 8월 15일, 
▪ 헌법이 제정된 날은 1948년 7월 17일,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은 1948년 8월 15일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으로부터 정부 수립까지 29년이 걸린 셈이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두 개의 국경일을 제정했다. 하나는 ‘건국 기원절’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 선언일’이다. 건국기원절이 개천절이고 독립선언일이 '삼일절'이다. 그런데 1949년 국경일을 제정할 때 개천절, 삼일절에 광복절과 제헌절을 추가했다. '건국절'은 없었다. 한글날은 2005년에 국경일이 됐다. 여기까지 팩트이다.

인문 일지를 저녁에 쓴다. 오늘은 수녀님 누나가 계신 안성에 다녀왔다. 토마토를 사주신다고 농가에 함께 갔다. 거기서 찍은 사진이다. 싱그러운 초록 빛 자연이다. 영성우 시인의 시가 소환되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양성우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모든 들풀과 꽃잎들과 진흙 속에
숨어사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신비하다

바람도 없는 어느 한 여름날
하늘을 가리우는 숲 그늘에 앉아보라

누구든지 나무들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무수한 초록 잎들이 쉬지 않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 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직 하나
살아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것들은 무엇이나 눈물겹게 아름답다.

2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를 잘 설명하고 있는 페친의 담벼락을 따라가고 있다. 몇 년 전 시도했던 "참 나를 찾는 여행"이 생각났다. 오늘부터 시리즈로 공유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정표를 만난다. 성공의 길, 행복의 길, 때로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 위에서 정작 ‘나’라는 본질은 자주 길을 잃는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는 잃어버린 본래의 나, 즉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열 단계의 여정을 담은 안내 지도이고, 우리 삶을 향한 지성의 성찰이라 했다. 잘 따라 가며 정리를 해 볼 생각이다.

십우도는 심우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십우도의 기원은 12세기 중국 송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승인 곽암사원(廓庵師遠) 선사가 이전부터 전해지던 소를 찾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열 개의 그림과 시로 체계화하여 완성했다는 거다. 여기서 ‘소’는 우리 내면에 감춰진 "참나" 혹은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징한다.

현대 심리학과 뇌과학의 관점에서도 십우도는 매우 선구적이다. 십우도의 여정은
• 자아를 탐색하고(尋牛, 심우),
• 흔적을 발견하며(見跡, 견적),
• 본질을 대면하고(見牛, 견우),
• 이를 일상으로 통합하며(得牛 득우, 牧牛목우),
• 마침내 나라는 관념까지 비워내는(人牛俱忘. 인우구망) 고도의 정신적 성장 과정이다. 

이는 현대인이 겪는 분열된[영혼과 분리된] 자아를 통합하고, 타인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내면적 동기에 집중하게 하는 심리학적 원리와 맞닿아 있다. 나아가 십우도의 가치는 깨달음이 산속의 은둔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는 깨달음을 얻은 이가 다시 저잣 거리, 즉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모습이다. 이는 나의 성장이 곧 이웃과의 연결이자 세상에 대한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自利利他(자리이타)'의 대승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 통찰처럼, 십우도는 멈춰 서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예술'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리고 있는가? 그 질문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은 타인과 환경이 조종하는 대로 흔들리는 부유물에 불과해진다. 십우도는 그런 우리에게 다시 주체적인 삶의 운전대를 쥐어주는,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안내지도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소를 찾아 떠난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그 위대한 여정을 시작해 보자는 거다. 이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 그토록 찾던 '참나'는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했다.

3
1단계인 심우(尋牛)는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리는 용기" 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으며 산다. 손에 쥔 것보다 아직 닿지 못한 곳,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 혹은 도달해야 할 미래의 어떤 목표들을 찾으며 산다. 그러나 그 바쁜 걸음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존재, '참된 나'라는 소를 놓치고 살 때가 많다. 선불교의 열 단계 그림인 '십우도(十牛圖)'는 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런데 이 긴 여행의 첫 번째 단계인 '심우(尋牛)'는 소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심리학에는 '자기 불일치 이론(Self-Discrepancy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의 나', '이상적인 나', '당위적인 나' 사이의 간극을 느끼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 간극이 벌어질 때 우리는 극심한 불안을 경험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 세상이 정해 놓은 성공의 기준에 나를 맞추느라 정작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 즉 내 안의 '소'를 방치한다. 1단계인 심우(尋牛)는 바로 이 괴리감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 있는 첫걸음인 것이다.

자기 불일치 이론은 심리학자 워드워드 히긴스(E. Tory Higgins)가 제안한 이론으로, 개인이 인식하는 실제 자아와 내면화된 기준(이상적 자아, 당위적 자아) 간의 격차가 우울,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다.
▪ 실제 자아는 자신의 실체 모습에 대한 생각이며,
▪ 이상적 자아는 자신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신념이며,
▪ 당위적 자아는 자신이 소유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모습에 대한 신념이다. 인간은 실제 자아와 이상적 자아, 당위적 자아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할 때 불편한 정서를 경험한다.
실제 자아와 이상적 자아가 일치하지 않을 땐 우울이나 낙담, 불만족, 슬픔 등의 정서를 경험하게 되고, 실제 자아와 당위적 자아가 일치하지 않을 땐 동요나 불안 등의 정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삶의 이치를 이렇게 꿰뚫었다. "남을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知人者智), 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自知者明)." 타인의 욕망을 읽어내는 지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지식은 결국 타인의 잣대에 나를 깎아 맞추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반면, 나를 아는 밝음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비추는 등불이 된다. 우리가 느끼는 짙은 허무함은 단순히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본질적인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무의식의 신호다. 자신의 결핍을, 자신의 상실을, 그리고 자신의 분열을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그 지점이 곧 깨달음의 시작 점이 된다.

<<도덕경>> 제33장을 다시 읽는다.
知人者智(지인자지) 自知者明(자지자명) :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自勝者强(자승자강) :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세고,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知足者富(지족자부)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족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강한 사람, 행함을 관철하는 자의 행동에는 지조가 있다.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이런 사람은 제자리를 잃지 않으니 오래가고, 죽어서도 잊혀 지지 않으니 장수한다.

구체적인 효과를 바로 보여주는 것 같은 "지인(知人) - 승인(勝人) - 강행(强行)"의 방식보다는, 조금 유약해 보이거나 소극적인 것 같지만 "자지(自知)" - 자승(自勝) - 지족(知足)"의 방식이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위대한 효과를 담보해 준다는 거다. 일상을 살아가는 좋은 통찰을 주는 내용이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타인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라면, 자기를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이 힘이 있는 자라면,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이 부자다. 억지로 일 벌리는 사람은 의욕만 앞서는 자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 오래 간다. 몸은 죽어도 오래 기억되는 자가 장수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밝다는 것은 첫째는 흘러감의 이치에 밝음 이고, 둘째는 자신의 마음 흐름에 대해 밝게 보고 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졌을 때 자기를 바로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타인의 기대라는 길을 걷느라 정작 나의 '소(참된 나)'는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있지는 않은가? '참 나'를 찾는 여행은 무언가를 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인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연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다. 참된 나를 알기 위한 고요한 탐색, '지기(知己)'의 여정은 바로 여기서부터 이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고 한다. "지금 내가 애쓰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정말 나의 '소'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이 잔신을 조금 더 깊은 "자기(self)"에게로 데려다 줄 것이다. 바른 진단에서 바른 처방전이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4
2단계인 견적(見跡)은 "흔적을 따라, 본질에 닿는 시간"이다.

'소(참된 나)'를 잃어버렸음을 인정했다면, 이제는 그 '소'가 남긴 흔적을 찾아야 할 차례다. 심우도의 두 번째 단계인 '견적(見跡)'은 말 그대로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먼저 내 삶의 불일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그 갈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단서들을 짚어볼 시간이다.

우리는 흔히 삶의 해답이 저 먼 곳이나 타인의 성공 담 속에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심리학의 '자기 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실제로 인간이 진정한 활력을 얻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외부의 보상이 아닌,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내적 욕구가 충족될 때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허무감은 외부 지향적인 삶을 사느라, 내면에서 끊임없이 보내오는 이 '자율적인 신호'를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기 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정립한 동기 부여 이론으로, 인간은 자율성과 유능감을 추구할 때 본질적인 동기가 발현된다는 심리학적 근거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려는 본질적인 내적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동기를 끌어내기 위해, 다르게 말하면,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기본 심리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 자율성(Autonomy)은 외부의 압력이나 보상 없이 자신의 행동과 의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이다.
▪ 유능성(Competence)은 자신이 유능한 존재라고 느끼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다.
▪ 관계성(Relatedmess)은 타인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이 세가지 욕구가 충족될 때 개인은 행동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내재적 동기'를 갖게 되며, 외적인 보상 없이도 주도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게 된다. 교육, 조직, 상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의 잠재력과 웰빙을 극대화하기 위한 핵심 원리로 활용되고 있다.

"심우도'에서 제 2단계인 발자국을 찾는 일은 거창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는지, 어떤 순간에 마음이 가장 편안했는지, 도대체 나는 왜 분노하고 왜 기뻐하는 지를 관찰하는 일이다. 노자는 이를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했다. 이 말은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춘다'는 뜻이다.

廻光返照(회광반조)라는 말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생겨 순간적으로 마음이 선량해 지는 것이 한 번 생기고,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한다’는 의미였다. 사형수들이 죽기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까? 그리고 예전에 스님들이 행각이나 탁발에 나설 때 반드시 삿갓을 썼는데, 밖으로 눈을 돌리지 말고 늘 자기를 살펴 조심하라는 경계의 뜻이 삿갓에 담겨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힘이 넘쳐 나던 젊은 날에 지은 수많은 죄를 죽기 전 갖는 단 한 번의 반성으로 죄를 씻어야 한다면 너무 시기가 늦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회광반조'의 정신을 일상에서 살려내서 순간, 순간은 아닐지라도 날마다 짬을 내서 조용한 자기 시간을 갖고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회광반조'의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이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밖으로만 뻗어 나가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내면의 발자국을 살피는 것, 그것이 곧 견적(見跡)이다. 소의 발자국이 숲 길을 따라 흐릿하게 찍혀 있듯, 자신의 참된 성품도 자신의 사소한 습관과 감정의 떨림 속에 흔적을 남겨두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을 따라갈 때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습관, 저것은 나쁜 감정이라며 재단하지 마라. 그저 발자국을 따라가듯, 내 마음이 왜 이런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그 결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마치 추리소설의 탐정이 범인을 쫓듯, 당신의 삶이 걸어온 궤적 속에서 자신의 '참나'가 머물렀던 자리를 조용히 한번 짚어보라는 거다.

페친 민웅기에 의하면, 흔적을 찾았다는 건, 이제 내가 '나'를 관찰할 수 있는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라 했다.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소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거다. 오늘 자신이 마주친 감정의 발자국은 무엇인가? "지금 이 마음의 흔적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길 위에 있는가?" 그 물음표 하나가, 당신을 잃어버린 소 앞으로 성큼 데려다 줄 것이라 했다.

5
오늘은 연중 제15주간 금요일이고, 말씀은 <마태오 12,1-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이기에>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굳이
안식일에
당신의
사람들은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까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안식일
빌미삼아
사람을
내칩니다
비록
안식일이지만
나의
사람들이
너무 배고프기 때문이지요
사람과
함께하는
사람이
안식일이기에
더욱 더 정성껏
사람을
품습니다

6
지켜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많으시다면, 우선 사랑해 보세요.
2026/7/17/연중 제15주간 금요일/제헌절
마태오 복음 12장 1-8절: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사랑은 단순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똑똑한 동시에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복잡한 안식일 규정을 그 상황에 따라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람을 고발했지요. 바리사이들의 사고로는 이 모든 것이 정의였고 정당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판단에는 분리와 배제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은 단순하셨습니다. 배고픈 이들의 굶주림에 함께하셨기에, 복잡한 안식일 규정에 매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히려 안식일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정의를 담아내는 사랑, 여기에는 관용과 포용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르는 십계명과 수많은 율법의 규정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실천 가능한 말씀, 단순하면서도 풍요로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도 무겁거나 복잡하지 않은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사랑 가득한 하루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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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결코 차가운 규칙에 매몰된 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자비와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의 현군 히즈키야 왕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습니다. 이때 그가 취한 행동은 참으로 절박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벽을 향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적인 수단을 차단한 채,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독대하겠다는 절박한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진실한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이사 38,5). 하느님은 당신이 내리신 결정마저도 자녀의 눈물 섞인 기도 앞에서는 바꾸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며 흘리는 진실한 눈물입니다.

복음에서는 히즈키야가 만난 자비의 하느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즉각 고발합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의 참된 정신은 잊은 채, 수백 가지 자잘한 규칙이라는 ‘문자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굶주린 인간의 아픔보다는 규칙 준수 여부만을 따지는 차가운 심판의 눈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향해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7-8). 여기서 ‘자비’는 형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감싸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을 규칙으로 얽매기 위함이 아니라, 지친 이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질인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성전 마당만 더럽히는 가짜 제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종교적 일류 선수’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듯 우리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시고, 히즈키야의 눈물을 보시듯 우리의 아픔을 돌보시는 다정한 분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향해 들이대던 뾰족한 판단의 자를 내려놓읍시다. 바리사이의 차가운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의 약함을 품어줄 때, 우리 자신 또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저희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낙심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향해 기도하는 믿음을 주소서. 종교적인 형식 뒤에 숨어 형제를 쉽게 단죄했던 교만을 용서하시고,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라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겨 오늘 저희가 만나는 이들에게 당신의 따뜻한 숨결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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