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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이 때는 매사에 무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374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6일)

1
어제는 삼복(三伏) 중의 초복이었다. 24절기 속에 속하지 않는 삼복은 중국 진나라에서 유래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잇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 여름을 나는 일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에서 느껴진다. 더위에 몸의 기운이 쉽게 약해지니, 입술에 붙은 조그만 밥알도 무겁게 느껴질 만큼 한여름에 사소한 일도 힘겨워진다는 뜻이다.

삼복(三伏)의 복(伏)자는 사람 인(人)변에 개 견(犬)자로, 사람이 개처럼 축 늘어져 엎드려 있는 형상을 본뜬 글자다. 한마디로 삼복더위에는 사람이고 개고 축 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복은 초복, 중복, 말복을 말한다. 삼경(三庚)이라고도 한다. 육당 최남선은 저서 <<조선상식>>에서 ‘엎드리다’, ‘굴복 하다’는 뜻을 지닌 '복(伏)'의 어원에 대해 “더운 기운이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제압해 굴복 시켰다”고 풀이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복이라고 한 것은 음기가 장차 일어나고자 하나 남은 양기에 압박돼 상승하지 못한다고 하여 음기가 엎드려 있는 날이라는 뜻으로 복일이라고 이름한 것”이라며 “복날에는 온갖 귀신이 횡행하므로 온종일 문을 닫고 다른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삼복/권지숙

하루가 먼 산허리 마냥 지루하다
여름은 순식간에 왔다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놀이터의 아이들도 어느새 다 자라 버마재비같이 다리만 길어졌다
날카로운 햇살이 흉기처럼 두렵다
낯설기만 한 내 집 발도 머리도 둥둥 떠다니고
손에 잡히는 건 잘게 부서져 낭자한 바닥 그 위를 겅중겅중 뛴다
밖엔 늙은 개 한 마리 땀 같은 피 흘리고 있다

삼복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화(火)가 매우 성하고 금(金)이 가장 쇠약해지는 시기다. 이때의 더위를 ‘삼복더위’라 부른다. 한 해 중에서 몸이 가장 무기력해지는 때다. 금이 화에 굴하는 것을 흉하다고 여겨 씨앗을 뿌리거나 혼인하거나 병을 치료하는 것을 삼가기도 했다. 임금은 국정을 쉬었다. 삼복에 몸을 보하기 위해 고기로 국을 끓여 먹고 시원한 물가를 찾아 더위를 이겨내는 일을 '복달임' 또는 '복놀이'라고 한다. 일종의 피서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이 때는 매사에 무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2
<<주역>>에 "여탈복(輿說輻-수레로부터 복이 빠졌다)"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번은 <풍천 소축> 괘 '구삼' 효사에 나온다. "輿說輻(여탈복) 夫妻反目(부처반목)"이라 했다. 수레에서 복토(伏兎)가 어그러지니 부부가 서로 반목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여탈복"이 부정적으로 쓰였다. 여기서 '복토'라고 "복(伏)"자가 나온다. 수레에서 바퀴 살이 어그러지니 부부가 서로 반목할 것이다. 그러니 조직과 가정에서 다툼과 불화가 잣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거다.

"여탈복(輿說輻)"에 "복(輻)"은 보통 '복토'라고 한다. '웅크린 토끼'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긴 가죽끈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복(輻)"이라는 것은 바퀴 축을 수레의 몸통에 연결 시키는 장치로써 축 양 쪽으로 자리 잡고 있고 축을 가죽끈으로 묶어 고정 시킨다. 

이 "여탈복"이 다시 제26괘인 <산천 대축> 괘 '구이' 효사'로 나온다. 여기서 "여탈복"은 수레에서 아래 복토 가죽끈이 끊어져 축이 이탈하는 바람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의 뜻은 나아갈 생각을 하지 마라는 거다. 물러나 실력을 기르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다.

'삼복지간'에는 매사에 무리하지 않는 때이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복토"를 때어내고 쉬면서 실력을 쌓는 거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때를 아는 사람은 기다림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상황에 따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주체적으로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는 거다. 서로 먼저 나아가려고, 앞서가려고 난리를 치는 세상에서 하늘이 정한 때에 순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도 다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알아야 한다. 이를 고전에서 '시중(時中)'이라 한다. '시중'의 사전적 의미는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용>> 제2장의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냥 '때에 맞게 행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공자의 중용은 산술 평균이 아닌 '시중(時中)'이다. '중용'에 대해 조금 정리를 해 본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중용'은 책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중용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우주가 부여한 자율 조절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사에 자신의 감정을 조화롭게 표출하는 '중화(中和)의 중용', 
▪ 그 때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사는 '시중(時中)의 중용', 
▪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한 '신독(愼獨)의 중용' 등등은 
인간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꿰뚫는 원리이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자기중심과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중용의 인생'은 우주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은 중간이 아닌 역동적인 평형'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 있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주자) 여기서 용(庸)은 '평상시, '언제나'란 뜻이다.  '중용'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 '관계의 중용', '행동의 중용', '판단의 중용' 등 인간은 중용을 통해 완벽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는 말을 하다가, '시중'이라는 말과 여기서 나온 '중용' 이야기로 빠졌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 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3
때, 시중(時中) 이야기 하다가, 큰 인물은 하늘과 인간이 만든다는 말이 소환되었다.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精氣)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한 명의 인물이 나오려면 보통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거기에 맞는 인물이다. 이것을 동아시아에서는 '삼재(三才)'라 한다. '삼재'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사(人事)를 가리킨다.

▪ 시간은 타이밍이다. 흔히 영웅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인물이 출현하는 데는 천시(天時), 즉 타이밍이 중요하다. 공자도 가장 어려운 판단이 시중(時中)이라고 했다. 곧 타이밍을 잘 맞추는 일이다. 타이밍을 모르는 중생을 가리켜 '철부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철'은 사시사철을 말한다.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를 모르는 '철부지'이다. 철을 모르는 게 철부지라는 뜻이다. '철들다'라는 말은 바로 이 절기, 제철을 알고 사는 것을 뜻한다. '철부지'는 지금이 어느 때 인지를 알지 못하니(不知, 부지) 어리석다는 의미이다. 때를 알아야 하는 것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씨 뿌릴 시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가 어긋나고,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에겐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처럼, 결국 철이 든다는 것은 지금이 어떤 계절인 지를 알고 제 때 해야 할 일을 하며 산다는 것, 봄이 오면 나무는 꽃을 피우고, 새들은 둥지를 짓고, 농부는 씨앗을 뿌린다. 우리도 역시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도록 태어났다. 다 제철이 있다.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이다. 비 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거다.
▪ 인물이 나오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은 '유전자(DNA)'라고 할 수 있다.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쑥대 밭에 쑥대 난다'는 말이 있다. 한 집안에는 그 집안의 유전자가 있다. 바로 다음 대에 유전되기도 하지만 몇 대를 지나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 한다. 친가 쪽도 그렇지만 외가 쪽 유전자도 동일한 비중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혼인을 잘 맺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에 돈이 많이 붙은 손자가 태어나는 사례는 증조부대에 쌓아놓은 적선(積善), 즉 적금을 후대에 가서 이자까지 복리로 받는 셈이다. 이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 없고,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 인물이 나오는 마지막 조건이 '터'이다. '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태어난 장소'가 기운이 뭉쳐 있는 자리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조상의 묏자리가 명당인가?' 이다. 기운이 왕성한 터는 자 자리에 30분 정도 앉아 있어 보면 안다. 기운이 꼬리뼈를 타고 척추를 통해서 올라온다. 이 기운이 뒷머리를 지나 정수리를 넘어 두 눈썹 사이의 미간으로 내려온다. 이런 기운이 좋은 터에 오래 앉아 있으면 피곤하지 않다.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충전 작용을 하는 셈이다. 아주 미세한 난자와 정자가 어머니 배 속에서 만날 때는 땅에서 올라오는 지자기(地磁氣)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래서 인물이 태어난 장소는 비범하다. 정기가 뭉쳐 잇다는 뜻이다.
4
인생에 정답이 없다. 왜? 우리는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중요한 것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뒤 그것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사르트르도 한 말이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느냐 에 따라 자기 삶이 형성된다는 거다. 이걸 우리는 실존주의라 한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거다. 그러니까 선택은 단순히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행위에 그친다. 선택한 삶을 책임 있게 살아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비슷하게 말한다. 어떤 생각이나 선택의 가치는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느냐 에 따라 드러난다. 좋은 직장을 골랐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능력을 키우며, 좋은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그 선택은 좋은 선택이 된다. 반대로 처음에는 훌륭해 보였던 선택도 무책임과 나태함으로 대하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연결해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만든다. 같은 실패를 경험하고도 어떤 사람은 “그 일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실패 덕분에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라고 말한다. 사건은 같지만,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의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정답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책임과 노력으로 정답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가능성만 바라보며 현재를 후회로 소모한다. 같은 선택도 한 사람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의 오답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처음부터 완성된 정답이 많지 않다. 어떤 선택은 헌신을 통해 정답이 되고, 어떤 실패는 성찰을 통해 교훈이 된다. 그리고 어떤 오답은 용기 있게 수정할 때 새로운 정답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정답을 발견하며 사는 존재라 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정답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래 사는 건 선택과 책임의 연속일 뿐 정답은 없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삶이다. 삶에 답이 있고, 올바른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무기력해 진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답이 없고, 길을 찾아야 하기에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답이 없기에 다양성이 있고, 길이 없기에 새로운 길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처럼.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존재는 마주하는 이 시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고 있는 '길'에 확신을 가지고 싶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고은, 2000)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김규동, 2005)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휘파람 부는 사람/메리 올리버, 2015)

시는 자연에 쓰인 하느님의 편지 같다. 
그 편지에서 나는 지혜를 읽는다.

5
연중 제15주간 목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사람이 짐스러울 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사람이
짐스러울 때
그 사람
내게 지우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사람이
짐스러울 때
그 사람보다
더욱 짐스러운 나를
기꺼이 몸소
짊어지고 가시는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사람이
짐스러울 때
나를
믿으시기에
당신의 사람을
내게 오롯이 건네시는
당신을
헤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이
짐스러울 때
오히려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사람인
그 사람을
나의 사람이기에
당신의 사람인
그 사람을
당신께서 나를
짊어지시듯
나 또한
짊어지게 하소서

6
내가 진 십자가는 나만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인가요?
2026/7/16/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진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짐이 참 많은 듯합니다. 가볍게는 식사 때 무얼 먹을 것인지에 대한 메뉴 선택 문제부터 가족 문제, 경제적 문제, 자녀의 취업 및 결혼 문제, 직장 내 인간관계 문제, 건강 문제 등등. 한데 ‘문제’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였지만, 사실 하나하나가 우리의 품을 많이 들여 풀어야 할 숙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문제만 해도 자녀들과의 관계, 자녀들끼리의 관계, 자녀들이 꾸리고 있는 가정 내 문제, 경제적 상황, 손주들과의 관계, 신앙적 상황 등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이러한 짐을 지고 살고 있고, 그런 문제와 고민들을 보듬고 해결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짐에 불과합니다. 사실 짐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지고 있다면 그것은 애덕(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십자가’를 진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루하루 내 십자가를 지고 주위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 우리는 침묵과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를 상징하는 ‘카르멜산의 복된 동정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세상살이의 고단함 속에서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우리 모두를 향해, 주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가장 안전하고 다정한 피난처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한 갈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 26,9).
여기서 ‘밤’은 단순히 해가 진 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시련, 마음의 어둠, 그리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는 그 막막한 어둠 속에서도 세상의 헛된 위로를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오직 참된 평화를 베푸시는 하느님 한 분만을 그리워하며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카르멜산 역시 엘리야 예언자가 참 하느님을 만나고 성모 마리아의 영성이 깊게 뿌리내린 ‘침묵과 기도의 산’입니다. 잠시 세상의 소음에서 물러나 우리 마음속 카르멜산으로 올라갈 때, 우리는 밤을 밝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을 향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는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생계의 무게, 가족 부양의 책임, 노화와 질병의 고통, 그리고 내면의 죄책감과 관계의 상처까지.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지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격이 있어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생하고 지쳐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주님은 우리를 품어 안아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 바로 뒤에, 역설적이게도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고 말씀하십니다. 쉼을 주신다면서 왜 또 다른 멍에를 지우시는 걸까요?
그 비밀은 멍에의 구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의 멍에는 홀로 메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의 소가 한 쌍이 되어 함께 메는 구조입니다. 대개 힘이 센 우두머리 소가 한쪽에 서고, 약하고 어린 소가 다른 한쪽에 서서 함께 멥니다. 그러면 밭을 가는 무거운 힘과 방향은 큰 소가 다 감당하고, 어린 소는 그저 곁에서 발을 맞추어 걷기만 하면 됩니다. 곧,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수레를 예수님과 한 쌍이 되어 함께 끄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내 힘만으로 그 무게를 버티려 했기에 그토록 지치고 아팠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곁에 서서 그분께 삶의 무게를 맡겨 드립시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카르멜산의 성모님은 평생 하느님의 뜻이라는 멍에를 메셨지만,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셨기에 그 마음에는 늘 천국의 평화가 가득하셨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가 짊어진 모든 걱정과 불안을 주님의 제대 앞에 통째로 내려놓읍시다. 내 힘으로 삶을 통제하려던 아집을 내려놓고, 내 목을 주님의 다정한 멍에 곁에 나란히 밀어 넣읍시다.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그 길에서, 여러분의 영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깊고 고요한 안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안식처가 되시는 주님,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내면의 불안으로 지친 저희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가 혼자서 삶의 무게를 버텨내려 버둥거리던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소서. 가르멜산의 성모님처럼 침묵 중에 당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시고, 다정한 당신의 멍에를 함께 메고 걸음으로써 저희 영혼이 참된 평화와 쉼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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