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5일)
1
드라마 <겨우 서른>에 '‘구름 수집가’로 활동하는 남자가 건물 옥상에서 여자에게 구름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데, 난 그 드라마를 본 적은 없다. “서쪽에 있는 건 탑상운, 남쪽에 있는 건 권적운”이라고 말하면서 남자는 “권적운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라고 설명한다. 여자는 매일 보는 구름에 이렇게 많은 이름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하다가 “아름다운 걸 볼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라며 감탄한다는 거다. 그 때 남자의 대답은 “그러니까 당신의 아름다움도 알아본 거죠”라는 고백이었다 한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근대 화가론>>에서 일반인들이 하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안타까워하며 “하늘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과 대화하기 위한 자명한 목적으로 신이 가장 신경 써서 창조한 부분”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연에서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 하늘이다. 돼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평생 눈앞의 먹이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땅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하늘이라는 ‘이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날씨가 무덥지만, 하늘은 구름이 많다.
구름의 문장/복효근
울지 않는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춰보고
기척 없는 앞마당을 자꾸만 흘깃거리다가
소주병을 꺼내려다 만다
법구경 몇 페이지를 펼쳐보다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에 잠깐 멈칫거리다가
겨우 한 줄 써본다
'나는 나로써 나다'
애써 다독이는데
문득 댓돌 틈에 핀 괭이밥풀꽃 한 송이에
울컥
꽃은 너였다가 또 너였다가 또 너였다가
수많은 너였다가
한 줄 다시 써본다
'나는 너로써 나다'
서쪽 하늘엔 구름 한 무더기 모였다 흩어지고
2
산책 길에서 하늘의 구름들을 보면서, "접화군생(接化群生)"에 대해 사유 했다. 이 말은 뭇 생명들과 접촉하여 이들을 감화시키고 조화롭게 살아 간다'는 뜻이다. 신라 시대의 대학자 최치원이 우리나라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徒)'를 설명하며 사용한 핵심 개념이다. 인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 자연, 우주 만물까지도 깊이 교감하며 서로를 완성해 나가는 상생의 정신이다. 여기어 사회 통합의 가치가 있다. 서로 다른 개성과 집단이 갈등을 넘어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풍류도'는 자연과 예술, 인생이 조화를 이루며 멋스럽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고유의 전통 정신이자 미적 개념이다. 바람(風)과 물 흐르듯(流)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를 뜻하며, 사람의 성품이 속 되지 않고 고상하며 융통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風流徒)가 있으며, 이 도는 "모든 종교를 포함하고(抱合三界, 포합삼계) 생명을 기르고 교화한다(接化群生, 접화군생)"고 말했다. 즉,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우주의 원리와 하나 되어 삶을 온전히 즐기는 평화 사상이다. 풍류도는 신라 시대 청년 조직이었던 화랑도의 핵심 정신이기도 했다. 화랑들은 풍류도를 바탕으로 산천을 유랑하고(유오산수, 유오산수), 음악과 가무를 통해 서로 즐기며(상열이가락), 도의를 닦어 심신을 건강하게 단련했다.
오늘날 풍류도는 팍팍한 일상이나 고달픔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의 태도를 가리킨다. 우리 민족이 예술, 음주가무,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살의 활력을 찾던 문화적 뿌리이고 한국인의 미학적 가치관이다.
‘외딴 구름’, ‘바다 같은 구름’은 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의 호(號)다. 한자로 孤雲(고운)과 海雲(해운)이다. 같은 경주(慶州)가 본관인 조선 말기 최제우 선생의 호는 ‘물 같은 구름’으로 水雲(수운)이다. 고운 선생은 <<난랑비서문>>에서 ‘접화군생(接化群生)’을 말씀하였고, 수운 선생은 동학(東學)운동의 창시자로 ‘접주(接主)’ 제도를 처음 폈다. 두 선현이 시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 운(雲)’자를 같이 쓰고 ‘사귈 접(接)’ 자를 중시하여 시대고(時代苦)를 겪는 백성의 삶을 위해 몸소 가까이 다가가서 실천 궁행했다는 점이 똑같다.
‘사귈 접(接)’자는 ‘손 수(扌)’변에 ‘처녀여자 첩(妾)’자의 합자로 “처녀여자에게 가까이하여 교제하는 뜻”이 있다. 접(接)자는 원래 이성(異性) 간의 접촉으로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담긴 문자이다. 이처럼 접화(接化)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포함한 만물을 사랑의 감정으로 가까이 하여 이치(理致)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홍익인간이 되어 만백성이 무리 지어 잘 살도록 하는 것이 군생(群生)이다.
진리의 풍류를 즐기다가 묘향산 석벽의 녹도문(鹿圖文) 천부경(天符經)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에 대한 진의를 전도하기 위해서 한자로 번역해서 후대에 전파했다. ‘서로 싸우지 말고 어울려서 하나 되라’는 홍익인간 정신은 신라대에 와서 뭇 생명을 살리는 ‘접화군생’의 생명사상으로 이어졌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자연과 함께 상생하자는 접화군생의 풍류도 정신은 생명사상이다. 홍익인간 정신을 가진 동이 사람들이 후대로 이어온 고유한 정신사상이다.
3
우리는 왜 책이나 읽을 거리를 멀리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성인 열 명 중 여섯 명은 책을 읽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답한 성인이 무려 61.5%에 달했다. 어쩌다 한국은 이렇게까지 독서와 거리가 먼 나라가 되었을까? 분명 어릴 적에는 동화도, 청소년 소설도 즐겁게 읽었을 텐데. 어째서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어른으로 자라게 됐을까?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책을 싫어하게 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라는 내내 책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차곡차곡 쌓아왔다는 말이 더 옳다.
첫 번째 범인 독후감 쓰기이다. 한국인은 독서를 멀리하도록 아주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집단이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독후감이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쓸 말이 하나 없다며 고민하다가, 주인공의 일대기만 구구절절 적어 내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흔히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레 아이의 독해력이나 글쓰기 실력이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물론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독후감이 필력 향상보다 ‘독서를 싫어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만약 드라마를 볼 때마다 500자 이상의 감상문을 남겨야 한다면 어떨까. 아무리 재미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시청하기는 힘들 것이다. 독후감을 써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두 번째는 또 하나의 주범은 바로 필독 도서다. 우리는 매년 ‘유익한 책’의 목록을 접하며 자랐다. 같은 책이라 해도,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만 고집하는 아이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성장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 시리즈’를 통해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일이 흔했는데, 엄청난 책 벌레였던 나에게도 꽤 고역이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내재적 동기는 과도한 통제나 보상이 개입될수록 약해진다. 즉, 필독 도서를 지정하고 그 책을 읽은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는 방식이 오히려 독서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야기에 자기만의 상상을 덧 입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다. 거부감 없이 활자를 읽고 마음껏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니, 이보다 좋은 독서 교육이 또 있을까? 아이들은 보통 책을 고르는 일에 서툴기 마련이다. 그림으로 가득 찬 만화만 집어 들거나, 성인 독자를 위해 쓰인 두껍고 어려운 도서를 골랐다가 몇 단락도 읽지 못한 채 흥미를 잃곤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어떤 책을 읽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책을 고르는 데 실패하는 것 또한 독서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필독 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쓰던 아이들’이 ‘책 읽을 여유가 없고 딱히 쓸 말도 없는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을 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과 글쓰기의 후련함을 알려주는 데 더 집중할 때다. 유익한 책보다 더 깊이 남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니까. 군자의 도리나 군주의 덕목을 배울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하다. 송혜교 홈스쿨링생활백서 대표·작가의 글에서 얻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독서라는 사건이 벌어질 때, 우리는 오로지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이해와 사유의 영역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책일기는 일종의 저항이다.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 눈앞에서 번쩍이는 온갖 광고 메시지, 우리가 기꺼이 시간을 쏟는 숏폼 영상과 친구들의 SNS 메시지, 당장 응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는 온갖 알림들에 대한 저항이다. 책 읽기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는 셈이다. 이 소란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곳에 집중해 보기, 생각해 보기, 탐색해 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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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는 <디지털 교육 전망 2026>에서 생성형 AI가 수행 성과는 높일 수 있지만 학습 자체를 대신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글을 읽고, 이해하고, 머릿속에서 씨름하는 인지적 과정이 학습인데, AI가 정답을 곧장 제시하면 그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AI에 맡겨버리는 ‘사고의 외주화’가 심각하다. 목적지까지 빨리 이동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뛰거나 걸을 때 생기는 근육은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학생들이 숙제는 물론 발표 준비, 보고서, 문제 풀이까지 거의 모든 학습 활동에 AI를 사용한다는 거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본다. 학생들이 숙제는 물론 발표 준비, 보고서, 문제 풀이까지 거의 모든 학습 활동에 AI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생이 수학 문제를 사진 찍어 AI에 올려 답만 받아 적는 걸 보고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고 했다. 집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다. 고등학생 딸은 과제를 할 때 먼저 챗GPT를 연다. 최근엔 ‘원하는 주제를 골라 탐구 보고서를 쓰라’는 과제를 하면서, AI에 가장 먼저 “탐구 주제를 찾아달라”고 했다. “생각할 시간도 없고, AI가 더 잘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 중학교 교사는 “교사들이 먼저 ‘챗GPT에 물어봐’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제 AI 기업들조차 이런 위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최근 ‘교육용 AI’를 내놓고 있다. 정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힌트를 줘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AI다. 가장 앞선 AI 기업들이 오히려 ‘천천히 생각하게 만드는 AI’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 봐야 한다.
국가 차원의 고민도 시작됐다. 노르웨이는 오는 8월부터 학교에서 초등학생의 생성형 AI 사용을 사실상 금지하기로 했다. 중학생은 교사의 지도 아래 제한적으로 쓸 수 있다. 읽기와 쓰기처럼 사고의 기초를 먼저 익힌 뒤 AI를 접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우리 교육 현장은 AI 사용에 대한 논의가 아직 시험 부정 행위 차단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더 늦기 전에 생성형 AI를 어떤 나이에,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사용하는 게 좋을지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들이 생성형 AI에 의존하고 중독되기 전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AI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AI와 함께 살아갈 세대이기 때문에 일찍 익숙해지는 것이 미래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궁금한 것을 언제든 답해주는 ‘AI 튜터’가 사교육 문제와 교육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정부가 2023년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발표했을 때 먼저 던진 질문도 “챗GPT 같은 챗봇 기능이 들어가느냐”였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지금도 충격적이다.
아이들이 AI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공부할 때 만큼은 AI부터 켜는 습관을 들여선 안 된다. 논문을 읽을 때마다 AI를 사용한다. 논문 수십 편을 올리면 연구 목적과 핵심 결과를 순식간에 정리해 주는 AI다. 논문 읽는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었고 최신 연구를 누구보다 많이 읽는다는 뿌듯함도 크다. 그러나 분명히 읽은 논문인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적인 맥락만 떠오를 뿐, 무엇을 새롭게 배웠는지 설명할 수 없다.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많이 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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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로 말씀은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나와 너>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나를
너에게
주는
그만큼
너는
나이니
나를
너에게
주는
그만큼
나는
압니다
나인
너를
6
오늘 나는 무얼 망설이고 있습니까?
2026/7/15/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초복
마태오 복음 11장 25-27절: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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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언젠가 교중 미사 후 신자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처음 보는 초등학생 두 명이 제 앞에 섰습니다. 가족 휴가를 왔는데 첫영성체 교리 카드에 주일 미사 출석 체크를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싸인을 해주었는데도, 아이들은 저를 바라보며 머뭇거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어머니가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얼른 말씀드려!” “아프리카에 우물 만드는 거 저도 돕고 싶어요.” 그 아이는 지갑의 돈을 모두 꺼내 제게 건넸습니다. 당시 본당에서는 코로나 시기 동안 실질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없으니, 그 정성을 해외로 돌려 남수단에 우물을 만들어 주는 모금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가진 모든 걸 건네던 아이의 조그만 손과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 어린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즉각적이고도 순수한 반응 같습니다. 내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는 게 아니라 옳고 바르다는 판단이 서면 즉각적으로 투신하는….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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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전례의 말씀은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인 ‘교만’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는 열쇠인 ‘겸손’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우리를 깊은 성찰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 왕의 안하무인 격인 교만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당시 아시리아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민족들을 압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승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정화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잠시 ‘도구’로 쓰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영적 오만을 향해 날카로운 비유를 던지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이사 10,15). 도끼나 톱은 그것을 쥐고 사용하는 주인이 있을 때만 비로소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 지혜, 성공은 모두 하느님이라는 거룩한 ‘손’이 우리를 도구 삼아 베풀어 주신 은총의 산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과 겸손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는지 선포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여기서 ‘똑똑한 자’는 지식이 많은 이가 아니라, 자신의 아집과 기득권에 갇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반면 ‘철부지’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부모의 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게 당신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만 당신 나라의 가장 깊고 아름다운 신비를 열어 보이십니다.
오늘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주교이셨던 성 보나벤투라를 기억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혔던 성인이지만, 그의 방에는 수많은 책 대신 오직 십자가 하나만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학문의 원천을 묻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지식은 오직 저 십자가의 예수님 발치에서 기도로 얻은 것뿐입니다.” 성인은 학문의 최정상에 있으면서도 마음만큼은 하느님 앞에 늘 낮은 ‘철부지’로 머물렀던 것입니다. 나를 비워내지 않으면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교만의 도끼를 내려놓고 십자가 아래 나지막이 엎드립시다. 내가 낮아질 때, 하느님의 눈부신 자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히 차오를 것입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가 가진 작은 재능에 도취되어 당신 손에 쥐어진 도구일 뿐인 저희의 처지를 잊었던 교만을 용서하소서. 세상의 아집으로 마음을 채우기보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린아이의 겸손을 주소서. 오늘 성 보나벤투라의 모범을 따라 오직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게 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만 드러내시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기쁘게 맛보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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