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4일)
1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능소화 사진이다. 우선 시 한 편을 소환한다.
능소화/안소연
여름에 활짝 피는 꽃처럼
뜨거운 내 마음도
당신을 향해 피어있어요
여름이 지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대로 툭 떨어지는
꽃이 되기는 싫어요
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
가장 활짝 피었던 모습
그대로 떨어질 테니
그때의 모습으로 기억해주세요
차가운 바람이 불기 전에
툭 하고 떨어지기 전에
다시 나에게 돌아와 주세요
난 능소화를 보면 슬픈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그녀는 임금에게 눈에 띄어 하루 아침에 빈(嬪, 후궁)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자 다른 궁녀들의 시샘과 음모로 이어져 두번 다시 임금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병이 들어 죽은 후, 궁 담장에 묻어 달라는 유언대로 묻혔다. 그 자리에서 자란 덩굴이 능소화란다. 기다리다 지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담을 뛰어 넘는다. 능소화의 '능(凌)'자는 ‘능가하다, 깔보다’라는 뜻이고, '소(宵)'자는 ‘하늘 소‘자이다. 그러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덩굴의 기운 때문에 능소화라고 한다. 슬프다. 동시에 이 꽃은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말을 타고 금의환양(錦衣換陽)할 때 머리에 쓰던 화관으로 장식했다고 해서 '어사화(御使花)'라고도 부른다. 조심할 것은 꽃에 반해 꽃을 따다 가지고 놀면, 꽃의 충이 들어가 실명(失明)을 할 수도 있단다.
능소화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비가 오는 때를 기다려 수십 개의 주황색 나팔을 불어 댄다. 다른 꽃은 바람 불고 비가 내리면 꽃잎을 닫지만 능소화는 그렇지 않다. 한번 펼쳐낸 꽃을 다시 오므리는 법이 없으니 자존심 하나만은 최고이다. 봄의 꽃들이 다 지고, 뜨거운 여름에 당당히 피는 꽃이 능소화이다. 꽃 피우는 것을 힘들어 하는 꽃은 없다. 핀 꽃이 덥다고 모습을 바꾸는 꽃은 없다. 장마 더위에 귀를 활짝 펴고 웃는 능소화를 보라. 일반적으로 꽃이 피고 질 때는 꽃이 시들어서 지저분하게 보인다. 그러나 능소화는 꽃이 질 때 예쁜 모습 그대로 뚝 떨어진다. 꽃이 시든 채 나무에 매달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옛날 양반집에 주로 이 능소화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은 능소화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철없는 누이동생 같아요. 여름철에 피잖아요. 대책 없이 입벌리고 웃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냥 툭 떨어지죠, 그래서 무상하고 슬픈 꽃이에요."
능소화/나태주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얼핏.
2
어제부터 <<읽지 않는 사람들>>(나오미 베렌 지음/전병근 옮김)을 읽고 있다. 부제가 <AI만 읽는 시대, 퇴화하는 인간 지능에 관한 경고>이다. 다음 그림은 로댕의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뒷모습이다.. AI가 글쓰기와 읽기를 대신하면서 인간은 '프롬프트 작성자'로 전락하고 있다.

"요즘 소설 한 근(斤)에 얼마나 합니까?" 오래전 한 소설가가 취재 과정에서 한 사내로부터 받은 무례한 이 질문은 요즘도 회자된다. 무게를 잴 수 없는 소설을 정량화해 값을 매기려는 물음은, 소설가라는 직업과 무력한 소설 쓰기, 더 무력한 소설 읽기를 싸잡아 비웃는 조롱이었다. 하지만 저 질문은 오늘 더 유효해 보인다. 우리가 뭔가를 읽거나 쓰는 일을 기계, 즉 인공지능(AI)에 외주화하는 시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나오미 배런의 신간 <<읽지 않는 사람들>>은 AI가 잠식해버린 오늘날의 세상을 질문하면서 "읽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시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책이다. AI가 글쓰기와 글읽기를 대신하면서 인간이 독자가 아니라 '프롬프트 작성자'의 지위로 바뀐 오늘날을 경고하는 책이다.
"AI는 통계적 예측을 실행할 뿐이지 의미를 생성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인간의 분투는 요약본에 없다. 독서에서 통용돼야 하는 화폐는 노력이다." 인간의 읽기와 AI의 읽기는 겉으로만 봐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문학 작품이든 역사서 한 권이든 혹은 경제학 저서든 프롬프트를 통해 확인한 '줄거리'는 인간에게 즉각적인 만족감과 효능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나오미 배런은 인간의 읽기 능력과 AI의 읽기 능력은 전혀 다르다고 본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우리의 정신은 '문장, 문단, 쪽, 장'으로 이뤄진 더 큰 직조물 속으로 진입한다. 반면 요약문을 전달받아 내용만 훑는 책 읽기는 의미의 생성과는 무관하다.
성인 한 명이 1년간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은 뉴스지만, AI가 인간의 독서 능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는 통계는 작지 않은 충격을 준다. 책은 영국의 한 통계를 인용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성인의 35%가 '이탈 독자'로 자신을 표현했다. 한때는 책을 읽었지만 이제 더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이 중의 상당수가 독서를 그만둔 결정적 계기가 소셜미디어 사용이었다. 굳이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 책을 읽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간의 자유로운 독서는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진 필연적인 혜택이 아니었다. 독서는 인간이 피투성이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수백 년에 걸쳐 가까스로 이뤄낸 성취였다. 1500년대 영국의 문해율은 남성이 10%에 불과했고, 이 비율이 90%를 넘어선 건 무려 400년이 지난 1900년대였다. 양피지의 시대를 지나 구텐베르크의 시대를 건너면서 책을 읽기까지 '400년'이 걸렸다는 얘기다. 특히 여성은 문해력 습득이 아예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7개 언어를 읽고 말하는 수준이었지만 평범한 여성의 독서는 '건강에 해롭다'는 낭설 때문에 금지됐다.
사람이 아니라 사유재산이었던 흑인은 또 어떤가. 하와이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는 일꾼을 뽑을 때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은 돌려보냈다. 또 흑인들은 1868년 투표권을 부여받고도 투표권 행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직선을 이등분하되 수직선 중점에서만 직선이 되는 수평선으로 분할하라' 따위의 문해력 시험 문항 30개를 10분 만에 풀어야만 투표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쟁취한 독서의 힘은, 이제 AI가 차지하고 있다. AI 대규모언어모델(LLM)은 '0과 1의 세계로 이뤄진 무한대의 도서관' 지위를 점하는 중이다. 지금이야 공공도서관이 '무료'지만, 무료 도서관의 역사는 오래된 게 아니어서 사람들은 책을 구매할 돈이 없으면 회원제 도서관에 가입해야 했다. AI LLM은 일반 도서관처럼 발걸음을 옮긴 필요도 없이, 검색창에 저서명이나 저자명을 타이핑할 이유도 없이 인간에게 '답'을 전해준다.
AI로 인해 세계를 보는 행위는 당장은 편리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으므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잡한 읽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사회의 복잡성도 포기하게 된다. 복잡해 보이는 책을 읽는 건 지식의 습득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불편함을 지나치지 않고 온몸으로 통과하려 할 때 인간은 지식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의 내부에 축적하게 된다. 저자는 책 읽기를 단순하게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하는 행위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일종의 '이해의 노동'으로 접근하며 이런 결론을 낸다.
"인간의 사고 노력을 아낀다는 것. 정신이 공짜로 휴식을 누리는 게 아니라 사고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참고로 서두에서 언급한 소설가는, 자신에게 모욕적인 질문을 던진 사내를 자신의 소설 속 인물로 배치해 소설을 썼다. 이 작품은 훗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그는 "소설 한 편이 쇠고기 한 근보다 더 가치를 지닌 일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이고, 그의 이름은 윤흥길이다. 김유태 기자의 글을 갈무리 한 것이다.
3
“읽어야 할 책, 요약해 드립니다.” 유혹적인 말이다. 업무상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이거나, 시간에 쫓겨 벼락치기로 끝내야 할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럴 때 사람들은 슬쩍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창을 열고 질문을 보낸다. 최근 들어 이 수다스러운 챗봇을 시켜 우리 대신 글을 읽고 요약하고 분석하게 하는 일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읽지 않는 사람들>>에서 나오미 배런 아메리칸대 교수는 AI 챗봇이 우리 대신 독자일 때 인간 정신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최신의 다양한 연구 결과와 함께 보여준다. 긴 글을 대신 읽고 간추려 주는 기술은 얼핏 편리한 혁신처럼 보이나, 인간 문해력과 사유 능력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 중이다.
AI 등장 이전부터 전 세계 독서율은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었다.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1994년 약 87%에서 2025년 38.5%로 하락했고, 학생의 자발적 독서 비율도 눈에 띄게 줄었다. 교육 현장에서는 책 전체를 정독하며 맥락을 파악하기보다, 과제 해결을 위해 특정 부분만 골라 읽는 발췌독이 흔해졌다. AI 챗봇의 등장은 이런 현상을 더욱더 가속한다.
그런데 인간의 읽기와 AI의 읽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AI는 알고리즘에 따라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식으로 읽는다. AI엔 확률만 중요하다. 반면, 인간은 눈앞의 글을 지금껏 읽은 글, 축적된 경험, 내면의 가치와 결합해서 능동적으로 그 의미를 도출한다.
AI의 글은 매끄러워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하다. AI에는 경험도, 감정도, 윤리도, 만들고 싶은 세상도 없기에, 감동도, 통찰도 없다. 게다가 그 글엔 가치관 편향과 오류의 위험이 존재한다. 학습 데이터 자체가 특정 시각에 맞춰 기울어져 있다. 특히 영어 기반 모델은 서구 개인주의에 기초한 문장들을 기본 값으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AI 글은 대개 과장되어 있다. 실제 맥락을 체화하지 못했기에, 수시로 환각과 오류를 일으키고, 원문에 없는 걸 자의로 지어 넣는다. 내용을 검증하고 출처를 확인하는 용기 없이 AI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
배런은 인간의 독서를 네 가지 목적, 즉 판단을 위한 읽기, 의무적 읽기, 자발적 읽기, 사회적 연결을 위한 읽기로 분류해서 AI가 읽기를 대신할 때 생기는 일을 알려준다. 입학 지원서, 평가서, 법률 문서 등을 검토하는 판단 영역에서 AI 읽기에 의존하면 인간적 뉘앙스를 놓쳐 잘못된 의사 결정에 빠질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매사추세츠공대(MIT), 펜실베이니아대 등의 연구는 모두 학교, 직장에서 과제를 해결할 때 읽기를 AI에 넘기면,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되어 학습효과가 크게 떨어지고, 비판적 사고력,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는 힘, 타인의 마음을 읽는 힘이 약해진다고 말한다. 자발적 읽기와 사회적 연결을 위한 읽기를 기계에 내주면 내적 성찰을 통한 자아 구축의 기회와 인간적 유대를 상실한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조사는 AI에 맡기고, 인간은 창의적 사고에 집중하자는 말은 마케팅 구호에 가깝다.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AI 챗봇의 등장 이후, 인간의 정신적 노력은 문제 해결 대신 “AI 생성 정보를 검증하거나, AI 답변을 프로젝트의 특정 요구 사항에 맞추거나, 좋은 질문을 작성하는 작업”에 많이 쏟는다. 이는 정신 활동의 중심이 ‘생각과 상상’에서 ‘관리와 뒷정리’로 바뀌는 걸 뜻한다.
창의성은 ‘AI 쓰레기’ 처리와는 상관없다. 원본 자료들을 직접 꼼꼼히 읽을 때 마주치는 뜻밖의 발견에서 촉발될 때가 훨씬 많다. 더욱이 읽기를 AI에 떠넘겼다고 사람들이 갑자기 창의적으로 변하거나, 관련 책을 찾아 숙고하며 읽을 리 없다. 읽을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확신만 고집할 뿐이다.
AI 시대에 어떤 읽기에 힘쓰고 싶은지는 각자 결정할 문제다. 그러나 배런에 따르면, AI 요약보다는 직접, 자주 읽는 게 인지 에너지를 더 잘 쓰는 방식이다. AI 시대에도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뇌를 사용하고 인성과 영혼을 구축해야 한다.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시민으로 자신을 교육하며,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돼야 한다.” AI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도 자존감 높은 애독자들이다. 이들은 책으로 단련한 문해력을 바탕으로 AI가 생성한 글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오류와 잘못을 분별해 쓸 줄 안다. 독서가 인지와 사회 발달의 기초임을 생각할 때, AI 읽기를 과용하면 자신을 망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장은수의 글을 갈무리 한 것이다.
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자가 생긴 이후 ‘읽기’와 ‘쓰기’는 오랜 기간 특권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독점을 타파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의 한글 창제와 사용에서 알 수 있듯, 특히 읽기의 보편화를 위한 투쟁은 가열 찼고 다행히 승리했다. 인간 인지 능력의 핵심 기둥인 읽기가 만인의 것이 되면서 인류는 지식의 민주화와 함께 사회적 평등이라는 근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 세대 만에 인간의 독창적인 ‘읽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면서다. 어느새 ‘AI 시대’가 되면서 자료 읽기를 AI에 맡기고, 글쓰기마저 AI가 대신하는 세상이 현실이 됐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식에 기술이 어떻게 관여하는지 30년을 연구해온 언어학자 나오미 배런 박사는 신간 ‘읽지 않는 사람들’에서 어느새 우리 일상 깊숙이 침투한 읽는 AI, 즉 ‘읽기 봇(Reader Bot)’이 인간의 읽기를 대체하고 있다고 하면서 “AI에게 읽기를 내어 주는 만큼 인간의 삶은 텅 비어갈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묻는다. AI가 읽는 동안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혹은 무엇을 하지 않는가. 정보와 자극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혹자는 AI에게 읽기를 맡긴 다음 그 만큼의 시간을 절약했다고 자축하며 더 열렬한 ‘인지적 구두쇠’가 되기를 바란다. 인지적 구두쇠란 정신적 노력을 최대한 아끼려는 인간의 본능을 가리킨다.
문제는 읽기 능력이 한 번 익혔다고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배우지 않으면 생기지도 않는다. 매번 깊이 읽고 의미를 따지는 대신 AI가 내미는 가장 빠른 지름길과 그럴듯한 요약에 기대다 보면, 스스로 사고하는 인지 근육은 조용히 약해진다. 결국 표피적인 정보를 많이 접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맥락 속에서 읽고 해석하는 능력, 즉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빠졌는지를 가려내는 힘을 잃어간다. 인지 빈곤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사피엔스 출현 이후 최초로 인간 지능이 퇴보할 위기의 시대, 이른바 ‘텍스트포칼립스(Textpocalypse)’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실제로 지능 퇴보의 시대는 현실화되고 있다.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및 성인 문해력 추산 데이터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성인의 절반은 문해력이 중학생에게 필요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중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읽기와 쓰기조차 어려운 기능적 문맹 인구가 4300만 명에 이른다. 한편에선 인재 선발 과정에 AI를 활용하는 흐름도 포착된다. 2024년 기준 미국 대학 입학처의 82%가 입학 전형에 AI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I가 대신 써 준 자기소개서를 또 다른 AI가 대신 읽고 평가하는 진풍경이 현실이 된 것이다. 과연 이 선발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을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AI 생성 텍스트가 인간의 글을 질식 시키고, 사람들이 기계와 인간의 글을 구분조차 하지 않게 되면 ‘기술을 지배하는 소수가 정신을 지배하는 정보 불평등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직접 읽고 사고 해야 하는 이유다.
5
연중 제13주간 토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9,14-17>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이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 당신과 새 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당신은
늘 새 당신이니
늘 새 당신을
늘 새 당신으로
품을 수 있는
늘 새 내가 되고
나는
늘 새 나이니
늘 새 나를
늘 새 나로
품을 수 있는
늘 새 당신이 되어
늘 새 당신과
늘 새 나의
늘 새 서로 품음으로
당신은
늘 새 당신이니
늘 새 당신인
늘 새 당신에게
스밀 수 있는
늘 새 내가 되고
나는
늘 새 나이니
늘 새 나인
늘 새 나에게
스밀 수 있는
늘 새 당신이 되어
늘 새 당신과
늘 새 나의
늘 새 서로 스밈으로
늘 새 세상 열어요
6
익숙해질수록 내 마음의 온도는 어떻게 변하고 있나요?
2026/7/4/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오 복음 9장 14-17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익숙함
‘익숙함’. 우리가 살면서 자연스레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오랜만에 친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나 고향의 단골집 음식을 먹을 때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고 친근한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쌓인 익숙함은 일상의 많은 부분이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익숙함이 항상 좋기만 할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넘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던 긴장감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탈수록 점차 능숙해졌고, 긴장감이 떠난 자리에는 당연함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시에, 그 당연함은 조심성을 조금씩 앗아가 짐을 들고 타거나 묘기를 부리는 등 그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자전거를 타다가 다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비단 자전거를 타는 경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익숙해질 때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마음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 안에서 중요한 것들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잊혀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익숙해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주님을 향한 나의 온도가 익숙한 온도로 변해서 중요한 것을 잊었다면,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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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한 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는 ‘회복’과 ‘새로움’이라는 가슴 벅찬 희망의 메시지를 마주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폐허 위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재건 사업과 그 은총을 담아낼 ‘새 부대’와 같은 마음가짐에 대해 일깨워 줍니다.
이번 주간 내내 우리가 묵상한 아모스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엄중한 심판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서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의 진심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아모 9,11).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기 위한 아픈 사랑의 매였습니다. 주님은 죄로 황폐해진 우리의 삶과 상처로 허물어진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당신의 손으로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개입하시면 절망의 자리마다 생명나무가 자라나고, 메마른 산마다 기쁨의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구약의 단식이 죄에 대한 애통함과 자비를 구하는 간절한 청원이었다면, 이제 구세주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셨으므로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무거운 의무감에 짓눌려 억지로 걷는 고행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춤을 추는 기쁜 잔치여야 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 주님은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축성 없는 낡은 부대에 발효되는 새 포도주를 담으면 결국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의 기쁨, 곧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의 은총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를 담아낼 ‘새 부대’는 바로 우리의 변화된 마음과 부드러운 생각입니다. 여전히 율법적인 잣대로 타인을 심판하려는 굳어버린 마음(헌 부대)에는 주님의 유연한 사랑(새 포도주)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내 고집과 과거의 편견을 과감히 깨뜨려 스스로를 ‘새 부대’로 빚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재건이 가장 절실한 ‘무너진 마음의 성벽’은 어디입니까? 나의 신앙은 신랑과 함께하는 ‘기쁨의 잔치’입니까, 아니면 낡은 규칙에 매여 있는 ‘의무적인 단식’입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워 주겠다. 그러니 너는 이제 과거의 원망과 낡은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가 부어주는 새로운 사랑을 담을 새 부대가 되어라.”
오늘 하루, 내 안의 완고함이라는 헌 부대를 주님 발앞에 내려놓읍시다. 신랑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여 우리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오르는 복된 토요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회복의 주님, 저희의 죄와 허물로 무너진 마음의 초막을 당신의 자비로 다시 세워 주소서. 저희가 낡은 고정관념과 율법적인 마음에 갇혀, 당신이 주시는 복음의 생동감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 마음을 부드러운 새 부대로 변화시켜 주시어, 오늘 당신이 부어 주시는 사랑의 새 포도주를 기쁘게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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