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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시를 읽으면,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 등이 일어난다.

 

373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일)

1
7월부터 <인문 일지> 시를 한 편 읽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성선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7월/이성선

​7월의 하늘은
청자빛으로 열리고
땅 위의 모든 나무들은
초록색 피를 흘리며 숨을 쉰다.
​우거진 숲속을 걸어가면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내가 되는
신비로운 일체(一體) 속에
내 영혼은 맑은 샘물로 솟아난다.

우리만큼 시가 중요했던 나라도 없다. 예전에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 반드시 시를 연마해야 했다. 시가 권력으로 가는 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는 시를 잊고 산다.  시는 시인이 농축된 언어로 실제를 깊숙이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낸 결과물이다. 시를 누리는 사람은 그냥 건조하게 사는 우리네 삶과 다르다. 시 한 구절에서 우리들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잊고 지내던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삶을 다시 발견하고 다잡는다. 게 시의 힘이다. 그러니까 시는 우리들의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고, 언어를 통한 추론과 논리 능력을 키워 우리들의 인문 정신을 길러준다. 특히 시를 큰 소리로 낭독하면, 목소리도 안 늙고, 정서의 폭과 깊이도 생기게 한다. 더 나아가 시를 읽으면, 다음과 같이 좋다.
▪ 시를 읽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특히 내 영혼의 떨림을.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 구나, 이런 소재에 반응하는구나,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 구나, 몸의 반응을 느낀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으며, 저 단어가 내 인생에서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식일 거다.
▪ 시를 읽으면, 내가 시적화자가 되어,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배양되기도 한다. 어떤 시는 잘 모르는데, 시를 읽는 순간 내 몸을 파고 든다. '파고 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시적 상황에 깊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 시를 읽으면, 일상의 새로운 면, 일상에서 자기가 쓰고 있는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시를 만나면 가슴에 빗금이 그어진다.
▪ 시를 읽으면,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정신의 핵심은 질문하기이다. 질문 그거 싶지 않다.
요약하면, 시를 읽으면,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 등이 일어난다. 그 발견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고,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가깝게는 취향에, 멀게는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극이 된다.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답을 구하여, 우리는 진짜 우리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를 통해 다른 이들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알아야 타인과 진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침묵도 일종의 발화로 간주하며 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올라간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이 시는 무엇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인가? 왜 그에 대해서 꾸준히 일관되게 함구하는 것인지? 침묵과 공백을 단지 발화의 결여(缺如)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그래야 문장들 간의 사이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침묵이 강력한 발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려면,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에서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다. 그런 침묵을 듣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껏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시가 무엇에 대해 '구태여' 침묵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 과정 속에 우리는 좀 더 예민한 독해자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예민함을 키우면 감수성이 늘어 난다. 사유의 시선도 올라간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 생활에까지 그 감수성의 촉이 확장된다.

2
오랜만에 장자를 만난다. 장자는 "이상적인 인간(성인)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이나 어떤 수단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는 궁극의 경지, 논리나 개념이나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는 절대 초월의 경지, 이른바 '없음(non-being)'의 경지이다. (2)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사물 자체는 존재하나 아직도 거기에 경계가 생기지 않은 경지, 분화하지 않아서 '하나'인 상태, 이른바 '있음 자체(有, Being-self)'인 경지이다. (3)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사물이 개체(個體)로 분화해서 각각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경지이다.

옛 사람들은 그런 경지에서 살았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원숭이들처럼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밤낮 옳고 그름만 따져 도가 허물어지고 애착이 생겨나 아옹다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근원적인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진정으로 자유스럽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절대무(絶對無)의 상태에서 어떻게 사물이 생겨, 거기에 다시 구별이 생기고, 시비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은 원초의 정적(靜寂)에 음률을 더하는 것이어서 본래의 하나 됨이 허물어져 기호(記號)와 경계(境界)가 생기고 대립과 분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원초의 정적, 원초의 하나됨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이룸이 허물어짐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경>>에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박산측위기樸散則爲器)하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본래 비분화된 도가 분화될 때, 세상의 여러가지 구체적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원초의 세계가 분화의 세계로 바뀔 때, 거기에 대립하고 얽히는 세계, '소외'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不割)"고 하고, 또 멈출 줄 안다(知止)고도 하였다. 멈출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세계는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 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 제28장과 제32장) 장자는 이렇게 원초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사람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고,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시비를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것(庸)에 안주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밝음(明)이라고 말한다. 이를 이우제용(而寓諸庸)이라 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지혜, 명(明)이라는 것이다.

3
어느 직장인이 쓴 "우리 팀장이 딱 홍명보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게시 글에 따르면 작성자는 자신이 속한 팀에 성과가 뛰어나고 외부 평가도 좋은 직원이 있지만, 팀장이 유독 그 직원을 핵심 업무에 투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작성자는 해당 직원을 “일도 잘하고, 잘한 일을 티 내는 것도 잘해서 상사들에게도 예쁨 받고 외부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팀에서도 “그 사람 있잖아요”라고 언급할 정도로 존재감이 큰 직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팀장의 태도였다고 했다. 작성자는 외부에서 해당 직원을 추천하면 팀장이 다른 사람을 붙이고 회의에서 그 직원의 의견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 화제를 돌리는 일이 반복됐다고 주장했다. 또 그 직원이 참여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오히려 팀장이 편해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작성자는 처음에는 단순한 업무 스타일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일정한 패턴이 보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팀장이 해당 직원을 싫어한다 기보다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 대목에서 작성자는 최근 한국 축구대표팀 상황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홍명보 감독이 손흥민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손흥민에게 악감정이 있다기보다, 손흥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적었다. 이어 자신의 팀장도 비슷하게 “그 사람이 없어도 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글의 핵심은 능력 있는 구성원이 조직 안에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작성자는 에이스를 쓰지 않는 선택이 팀장 본인에게도 손해라는 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슷한 결정을 반복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사람은 일도 잘하고 아무 죄가 없는데 계속 희생양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직장인은 과거 팀에서 가장 일을 잘하던 직원이 결국 회사를 떠났다고 경험담을 전했다. 그는 능력 있는 직원이 빠져나간 뒤에도 상사가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이긴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댓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언급됐다. 타 부서와 관계가 좋고 성과도 뛰어난 직원이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잘되면 팀장이 못마땅해 하고 실패하면 “내 말이 맞았다”는 식으로 반응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그 직원은 경쟁사로 옮겨 인정받았고 회사는 인재를 지키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커뮤니티 글은 이런 대표팀 논란을 직장 조직 문화와 연결했다는 점에서 확산됐다. 특정 인물을 향한 단순 비판을 넘어, 조직 안에서 능력 있는 구성원이 왜 배제되는 지에 대한 직장인들의 체감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흔히 말하는 조직내 리더십 문제도 이와 맞닿아 있다. 리더가 성과보다 자신의 권위와 판단을 우선할 경우 능력 있는 구성원은 오히려 견제 대상이 될 수 있다. 구성원의 성과가 리더의 판단보다 더 주목 받거나 외부 평가를 받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상사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방식은 조직 전체의 손해로 이어진다. 핵심 인재는 동기를 잃고, 팀은 가장 좋은 카드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구성원들은 성과보다 상사의 심기를 살피게 되고 조직 안에는 “잘해도 소용없다”는 분위기가 퍼질 수 있다. 축구대표팀 사례를 떠올리게 한 글이지만, 실제로는 회사 안에서 반복되는 인재 배제와 리더십 불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홍명보가 많다. 조직보다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는 리더가 실제로 있다. 

그리고 "스타 선수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는 글을 봤다. 축구는 물론 야구, 농구까지 한 시대를 호령 했던 스타 선수들이 감독 지휘봉만 잡으면 이상하게도 죽을 쑤기 일쑤라는 거다. 반면 명감독 중에는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낸 경우가 드물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염경엽 감독, 유럽 축구의 앨릭스 퍼거슨 감독, 조제 모리뉴 감독, 위르겐 클롭 감독, 미국 프로야구의 브루스 보치 감독 등 명장들은 선수 시절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보통 팀에는 스타 선수가 1~2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평범한 선수다. 뛰어난 선수는 평범한 선수의 능력과 열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인간은 늘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대다수를 구성하는 평범한 선수들의 심리를 간파해야 팀 전체를 끌고 갈 수 있다. 그런 쪽이라면 평범한 선수 출신이 유리할 수 있다. ‘평범함의 반전’이라고 할까? 이런 논리는 스포츠 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신문> 김상연 수석논설위원의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4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가진 것보다 태도로 평가 받는다. 젊을 때는 능력이나 성과가 중요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가 그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그래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을 늙어 보이게 하는 건 주름이 아니라, 점점 좁아지는 마음과 태도라고 말이다.
 
1위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가장 추잡해 보이는 모습은 결국 이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가족 탓, 세상 탓, 남의 탓부터 하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완벽한 사람보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더 높게 평가한다. 반대로 변명과 남 탓이 습관이 되면 그동안 쌓아온 신뢰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2위기 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심 갖는 사람의 태도이다. 누구 자식이 뭘 하는지,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부부 사이는 어떤지 지나치게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관심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간섭으로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좋아해도, 지나치게 캐묻는 사람은 피하게 된다. 결국 남의 삶에 관심이 많을수록 정작 자신의 삶은 점점 빈약해지기 쉽다.

3위가 작은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다. 몇 천 원, 몇 만 원에도 지나치게 계산하고 손해 보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돈을 아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돈보다 사람을 먼저 잃기 시작할 때다. 작은 이익 때문에 관계가 멀어지고, 주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돈이 아니라 외로움이 된다.

그러니까 작은 돈에 집착하는 태도, 남의 사생활을 캐묻는 습관, 그리고 책임을 피하며 남 탓하는 모습. 사람들은 의외로 이런 모습을 오래 기억한다. 나이가 들수록 품격은 재산이나 지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국 가장 멋있게 나이 드는 사람은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책임지는 사람이다.

5
연중 제13주간 목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9,1-8>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라 하시니>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애틋이
보라 하시니
봅니다
봄이 곧
보라 하시는 당신께
오롯한 찬양일지니

기꺼이
다가가라 하시니
다가갑니다
다가감이 곧
다가가라 하시는 당신께
오롯한 찬양일지니

따뜻이
품으라 하시니
품습니다
품음이 곧
품으라 하시는 당신께
오롯한 찬양일지니

굳건히
일으키라 하시니
일으킵니다
일으킴이 곧
일으키라 하시는 당신께
오롯한 찬양일지니

새롭게
살리라 하시니
살립니다
살림이 곧
살리라 하시는 당신께
오롯한 찬양일지니

6
주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2026/7/2/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오 복음 9장 1-8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와 벌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난 기억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부분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때였더군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거짓말을 한다거나,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데 장난치면서 뛰어다니는 등 정말 말을 안 듣는 아이였습니다. 매번 혼나면서도 말이지요. 그러다 한번은 친구와 장난치면서 뛰어놀다 크게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손 짚을 새도 없이 가슴이 바닥에 그대로 떨어진 것이지요. 순간 너무 아프고 숨이 막혀 눈물이 났습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지만, 그날 전 다친 것 이상으로 아주 호되게 혼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혼을 냈는데도 말을 안 듣더니 그거 봐라.” 하지만 전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위로는커녕 혼만 내는 그 어른들이 미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모든 말씀은 더 크게 다치는 것을 방지하려 하셨던 사랑의 경고였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이를 생각하는 어른의 마음일 것입니다. 미워서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엄하게 대하는 그 마음.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서 사랑과 자비를 찾고 있는지, 아니면 죄와 벌을 찾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는 막막한 ‘영적 중풍’ 상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처럼, 침상에 누운 채 타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우리 영혼을 덮쳐올 때가 있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무력감과 죄책감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가장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치유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이들은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 개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이전에, 그를 메고 온 이들의 정성과 굳건한 신뢰를 먼저 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해야 하는 소중한 이유입니다. 내 믿음이 약해져 스스로 주님께 걸어 나갈 힘조차 없을 때, 곁에서 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구역 식구들의 기도와 가족들의 지향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가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서로의 침상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는 사랑의 동반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육신의 치유만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 일성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굳어버린 몸보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소외감’의 응어리를 먼저 꿰뚫어 보셨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중풍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여겨졌기에, 이 병자는 육체의 고통보다 ‘나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지독한 영적 고독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근원적인 아픔의 사슬을 먼저 끊어주십니다. “얘야”라는 다정한 부르심 속에는 이미 모든 용서와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회복될 때, 비로소 참된 치유가 시작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 역시 세상의 시선으로는 예언자가 되기에 턱없이 무력한 배경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는 전문적인 예언자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저 가축을 키우며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평범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 7,15) 하시며 그를 붙잡으시자, 그는 권력자 아마츠야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쓰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나는 약하고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손을 잡아 이끄실 때 우리는 아모스처럼 세상의 거센 풍파에 맞서 걸어 나갈 참된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나는 지금 미움, 과거의 상처 혹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 묶여 영적인 중풍 환자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누워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내 주변에서 영적으로 지쳐 신음하는 이웃의 침상을 함께 메어줄 마음의 여유를 품고 있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의심하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하고 명령하셨고 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러니 과거의 어두운 침상에 계속 누워 있지 말고, 그것을 훌훌 털고 일어나 네 삶의 자리로 당당히 걸어가거라.”
오늘 하루, 우리를 옥죄고 있는 죄책감과 무력감의 끈을 주님의 자비로운 말씀으로 풀어냅시다. 그리고 그 기쁨의 힘으로 내 곁에서 지쳐 누워 있는 형제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용기를 주시는 주님, 저희가 내면의 나약함과 죄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 있을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저희를 ‘얘야’ 하고 불러주시는 그 자비로운 음성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저희 마음의 굳어버린 자리를 치유해 주시어, 오늘 저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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