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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미끈유월이 가고 어정칠월이 왔다.

373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일)

1
벌써 7월이다. 옛 어른들은 '미끈유월(농사 일로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쉽게 지나간다)이 가고 어정칠월(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이 왔다'고 했다. 7월이 오면 늘 생각나는 시가 있다. 한 해의 반환점이다. 우린 하루에 몇 번씩 갈림길에 놓인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고, 그 순간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믿어야 한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이다. 미래는 오늘 내 선택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그래 7월이 왔어도, 난 어제처럼 살리라. 7월부터는 인문 일지에서 가장 먼저 시를 읽을 생각이다.

7월/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선 반환점에 
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미끈유월이 가고 어정칠월이 왔다. 회두리에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나 농부다. 이제 땅의 소출이 경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잊으면 헛사는 것이다. '떵떵'거리며 산다는 말도 기실 '땅'에서 왔다. 그런데 수십 만 평의 땅보다 한 뼘 남짓의 그 마음 농사가 더 중요하다.

2
어제 못한 영성 이야기를 오늘 조금 더 한다. <<화엄경>>을 통해 보살(=군자, 선비)이 되는 길을 공부한 적이 있있다. 이 보살의 길은 자신의 영성 지능을 높이는 길이 아닐까? 우연히 SNS에서 만난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을 보았다. 좀 내 방식으로 정리해 본다.

무슨 일을 인간의 힘 만으로는 할 수 없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몰라, 괜찮아!"하면서, 에고(욕심의 세계)를 떠나 '참나'의 세계(양심의 세계)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때 이 '참나'가 우리의 현상계인 에고를 잘 경영해 준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참나'의 세계에서 만나는 목소리가 곧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성령의 목소리를 잘 듣고 깨어나, 일상에서 욕심을 양심으로 잘 다스리는 사람이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보다 거룩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거룩"이라는 말이 좋다. 거룩은 한자로는 '성'이라고 한다.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 우주에서 내가 태어난 이상  우주에게 한 가지라도 이롭게 해주고 떠난다. 일본어로 신신을 '가미가미'하다가 '거룩'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란 한자어 그대로 성령을 잘 듣고(천명을 잘 듣고), 삶 속에서 그것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 -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이 빛나도록(=하느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하는 사람이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이 빛나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와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인격 신이 아니라, 이 우주의 작동 원리로서의 신으로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원리(불교 식으로는 '6바라밀', 유교식으로 '인의예지신', 그리스도교 식으로는 '사랑과 용서')가 실천 되는 원리가 작동하게 하는 진리라는 말이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하느님의 관점(=참 나의 세계)에서 세상과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는다. 예를 들면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 만을 보지 않고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 한다. 그래서 겉만 보고 쉽게 상처를 받고 흥분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게 된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들은 불의와 타협하면서 하루 하루의 삶을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세상(현상계)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 - 영성 지능이 높은 사람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무겁고 힘든 것으로 여기고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을 하지 않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책임진다.

3
올해 도서전이 내세운 주제는 '인간선언 호모 두두리(Homo duduri)'이다. '호모 두두리'는 AI가 즉각 제시하는 답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는 인간을 뜻한다. 여러 작들의 말은 "AI가 발전해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였다. 정보라는 "1950년대 이전 소련 시절 등의 작품을 주로 번역하는데, 그 시대 맥락을 AI가 알고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맥락을 완전히 전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AI가 그 정도까지 발전한다면 아주 큰 노력을 들여야 조금 성과가 나오는 분야에서 인간이 적정한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라며 "번역을 떠나 AI에 문해력을 외주를 주면 스스로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지 않을지 걱정 된다"고 우려했다.

각 단어가 갖는 뉘앙스 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문학에서 AI 번역으로의 전환은 당장 어려울 것이라고 작가들은 내다봤다. 그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민과 선택에 대한 존중이 있을 때만 그 영역이 지켜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백수린은 "번역자의 선택에 따라 작품의 결과 해석이 달라지는데, 그 세밀한 선택을 계속하는 것에 독자와 출판 시장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며 "만약 문학에서도 줄거리만 파악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AI 번역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혜는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굉장히 균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는 것인데, AI는 매끄럽고 노련함을 목표로 학습하기에 당장은 대체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다만 AI에 대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번역가 대신 AI를 이용해 쉽게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들은 AI의 대답을 거부하고 미지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백수린은 "AI는 확률적으로 가능한 가장 안전한 답변만 한다는 게 인간과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 답게 살아야 하는가, 소설가이자 번역가로서 어떻게 계속 두드리고 존재하지 않는 답을 찾아야 하는가 고민한다"고 말했다. 이주혜는 "작년 펴낸 소설 제목이기도 한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를 모토로 삼고, 겁이 많아 늘 그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저를 떠밀고 있다"며 "낯선 방향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때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는 것처럼, 계속 두드려 봐야 다른 일이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4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계속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일이 생긴다. "건너가기"에 방범을 찍는다. 최진석 교수의 다음 말이 내 공책에 적혀 있다. "진짜 인간은 한 곳에 멈춰 머무르지 않고, 아무 소득도 없이 보이는데도 애써 어디론 가 떠나 건너간다. 건너갈 그 곳은 익숙한 문법으로는 아직 이해되지 않아서 무섭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무모한 도전과 모험이 등장한다. 대답하는 습관을 벗고, 질문하기 시작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닿지 않는 별을 잡으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진짜 인간이다. 진짜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다." 이러한 건너 가기를 잘 돕는 것이 책 읽기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는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했다. 연암 박지원은 책 읽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병사들인 글자와 문자의 대오행군으로 돌진하는 장수가 되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는 "책 읽고 건너 가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읽기는 '마법의 양탄자' 타는 일이라는 거다. '다음'을 향해 넘어가는 일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을 하게 하는 힘을  상상력 또는 창의력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힘은 책을 읽는 데서 나온다고 본다.

최 교수는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말하기도 했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그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기 때문 같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일을 그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말했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이라 말하고 싶다. 그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5
연중 제13주간 수요일로 말슴은 <마태오 8,28-34> "마귀들과 돼지 떼" 이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길을 걷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마태 8,28)
길을 걷다
새로 길을
내고자
길을 걷다
닫힌 길을
열고자
길을 걷다
막힌 길을
뚫고자
길을 걷다
끊긴 길을
잇고자
길을 걷다
다시 길을
내고자
길을 걷다

6
나의 주님은 누구신가요?
2026/7/1/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8장 28-34절: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미사 전 30분. 고해성사를 위해 고해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습니다.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한 분 두 분 들어오셔서 부족했던 것들을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분은 미사에 빠졌거나 기도를 소홀히 했다고, 또 어떤 분은 누군가를 미워했거나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간혹, 고해실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어서 무엇을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앞의 분들은 죄인인 듯 기운이 없지만, 뒤의 분들은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시는 듯 심드렁합니다. 살아가는 모습은 대체로 비슷한 만큼, 각자가 마주하는 잘못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다름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작은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나의 주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스스로가 행하지 못했던 사랑을 돌아보고 아파합니다. 반면에 ‘나’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가 기준이기에 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은 한없이 작아지기만 합니다. 우리는 ‘나’의 주님을 믿고 있을까요, 아니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을까요? 주님과 나는 과연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07월 01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짜 평화의 안주함을 깨뜨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생명'과 '공정'의 길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렀던 이스라엘을 향한 아모스 예언자의 준엄한 꾸짖음과, 한 인간의 구원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아까워했던 가다라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비추어 보게 합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화려한 축제를 열고 거창한 제물을 바치며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 이면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와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위선적인 예배를 향해 진노하시며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신앙의 참된 가치는 성전 안의 예식이 아니라, 성전 문을 나선 우리의 일상에서 정의와 사랑이 실천될 때 비로소 증명됩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없으며, 세상을 속이는 허무한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두 사람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목격한 가다라인들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마귀 들렸던 이웃이 온전해진 기쁨보다, 돼지 이천 마리라는 막대한 재산이 사라진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마태 8,34) 간청합니다. 그들에게는 고통받던 이웃의 구원보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안정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역시 '탐욕'이라는 또 다른 마귀에 굳게 붙들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 속 돼지 떼와 제1독서의 위선적인 제물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이나 이웃의 생명보다 '내가 쥐고 있는 이익과 형식'을 더 사랑하는 인간의 부끄러운 집착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한 영혼이 살아나는 것에 기뻐하느냐, 아니면 네 지갑이 채워지는 것에 더 안심하느냐?"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내 생각', 내 재산', '내 안위'라는 이기심의 돼지 떼를 기꺼이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을 때, 우리 안의 굳어버린 마음이 풀리고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가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주일 미사에는 빠지지 않으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일상에서는 이웃에게 인색하고 불공정하게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나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 '제 삶에서 조금 떠나 계셔 주십시오'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을 방해하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악과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러 오시는 분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의를 선택하고, 나의 시간을 쪼개어 소외된 이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속 이기심의 돼지 떼를 과감히 주님 발앞에 내려놓읍시다. 우리가 집착을 버린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영적 풍요를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입술로만 당신을 찬양하고 삶으로는 이웃을 외면하는 위선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세상의 재물과 안락함이라는 우상에 눈이 멀어, 곁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저희 마음을 정화해 주시어, 오늘 저희가 머무는 모든 곳에 당신의 공정과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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