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육도, 대자연에도 때가 있다.

371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15일)

1
인문학의 시작은 다음 같은 질문부터 이다. ‘고유한 생각, 대체 불가한 나’ 어떻게 만들까?'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공부를 하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쉽게 얻는 답은 쉽게 사라진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육도, 대자연에도 때가 있다. ‘Everything has its time.’ 굳이 그 유명한 성경의 전도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어떤 ‘때’가 되어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경험한다. 너무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 너무 빨리 좋은 결과를 원하는 마음은 깊이 있는 사유를 망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모든 것에는 공들이는 마음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비록 느리고, 오래 걸리고, 매우 곤란한 과정일지라도 말이다. 이 ‘때’라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부모도 그 ‘때’를 기다려 줄 아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책과 사람의 만남도 어느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고, '때'가 되면 만나고 읽고 비로소 그 내용을 이해하고, 무르익는 독서가, 대화가 가능해진다.

이 시대는 AI 시대이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바로 찾으면 바로 알려주는 시대, 나만의 고유한 사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이다. 인터넷 강의는 2배속, 3배속으로 들을 수 있다. 빠른 학습이 진짜 학습이 되는 것처럼 착각 되는 시대이다. 이제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빠른 학습과 AI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학습은 나를 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오직 ‘나만의 고유한 생각,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서의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벼운 내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가치는 ‘때’가 되어야 드러나며, 나의 존재적 무거움은 결코 ‘가볍지 않은’ 생명으로 드러난다. 오로지 ‘내’가 익어가는 날들을 성찰하고 인내해야 가능하다. 그 '때'를 위해서는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의 깊이는 깊어야 한다. 깊이 있는 공부는 배우는 자에게 지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며, 공부하는 사람이 그 ‘때’가 될 때까지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만 가능하다. 

2
AI에 질문을 던지면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 시대, 아이들은 점점 스스로 생각하는 노력을 불필요하게 느끼고 있다. 검색하고 판단하고 논거를 갖춰 주장하는 능력, 즉 토론 력은 그래서 지금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토론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다른 생각과 부딪히고 귀 기울이며 더 나은 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먼저 AI에게 묻지 말고, 내 생각을 흰 종이 위에 정리를 한 다음, AI와 그 생각의 뒷받침 할 백데이터, 즉 관련 자료를 찾아가며 내 논리를 강화한다. 그래야 내 생각이 나오는 거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AI 시대에 더 절실해진 것이 토론 력이다. 자료를 읽어보라고 하면 대충 훑고는 “다 읽었다”고 답한다. 정보를 찾아야 하는 과제는 AI에 물어본 후 몇 분 만에 끝낸다. 조금 더 생각해보라고 하면 돌아오는 말은 “수행평가에도 안 들어가는데 왜 그래야 해요?” 이다. 이게 요즘 교실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이고, 요즘 아이들의 사고방식이라 한다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 첫째는 과부하 상태이다. “아이들이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천천히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빠르게 판단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바로 가지치기 한다.” 
▪ 둘째는 결과 중심의 교육 문화 이다. 시험 점수나 정답과 오답을 찾는 데만 익숙해진 아이들은 과정을 소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AI 시대는 이런 문제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2025년 미국의 랜드연구소가 미국 청소년 12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67%가 “AI를 많이 쓸수록 비판적 사고 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에 동의했다. 쉽게 답을 찾고 사고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시대, 토론 력이 더욱 절실해진 이유다. 토론은 주어진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 즉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토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거부하지 않고 합일점을 찾는 연습을 해본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유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토론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토론은 익숙하지 않은, 부담스러운 활동인 경우가 많다. 반대 의견을 냈다가 친구에게 공격 받았던 쓴 경험도 적지 않다. 건강한 토론과 말싸움은 차이가 있다. 말싸움이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내세우는 것이라면, 토론은 대안이 필요하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끝이 아니라 그 안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가는 것까지 가야 토론이 완성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활용해 볼 방식은 ‘배심원 토론'이다. 찬반으로만 나누면 토론 중 공격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보완 책으로 찬성도 반대도 선택하지 않는 배심원 역할의 학생을 따로 둔다. 찬반 양쪽이 의견을 주고받은 뒤, 배심원들이 허점이나 대안을 제시하며 토론을 이끌어간다. 이런 토론을 경험한 아이들은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느껴 토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토론에서는 말솜씨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다. 그 태도 중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태도가 경청이다. 정답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과, 발표가 성적에 반영된다는 생각에 친구의 발표를 듣기보다 자신이 말할 내용을 고민하느라 바쁜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듣지 않으면 상대의 의견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자기 주장도 논리적으로 할 수 없다. 토론은 결국 꼬리 물기이다. 두 번째는 감정 조절이다. 이 역시 토론의 중요한 기술이다. 자신의 주장이 반박 당하면 공격 당했다고 느끼기 쉽고, 어른들끼리 목소리를 높이는 대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구나' 라고 학습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쿠션어’를 사용해보기를 권한다. 상대의 주장을 듣고 나서, "얘기한 의견은 이런 지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 이런 부분도 생각해볼 만하다”라는 식으로 상대 의견을 존중하며 부드럽게 표현해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경어 사용도 토론 중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막는 데 효과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다음은 이 때 필요한 것들이다. 
▪ 아이들에게 적합한 토론 주제를 고르는 기준이 중요하다. 
▪ 나이 대에 맞고 일상생활과 연결된 주제를 권한다. 
▪ 찬반 토론은 초등 고학년 이후에 적합하며, 찬성과 반대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정해진 답이 없는 주제를 선택하는 편이 좋다. 찬반이 균형을 이루는 주제일 때 다양한 견해를 접하며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
3
최근 혼자 역주행으로 보고 있는 드라마, '모자무싸(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쓸모의 시대에 존재의 값에 대해 묻고 있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값어치와 쓸모가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런데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면, 자기 자신을 돈의 가치와 도구적인 쓸모로 평가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쓸모없다는 건 무서운 말이야.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선고 같거든." 우리가 느끼는 무가치함은 단순한 자신감 부족이 아니다. 무가치함은 존재감과 연결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즉, 자기 존재가 관계와 사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 같은 고통이다.

칼 로저스는 사람이 실제로 무가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조건부로 배워 왔기 때문에 무너진다고 본다. 사람의 가치는 쓸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은 쓸모를 증명하기 전에 이미 존중 받아야 할 존재다. 그러나 환경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면 존재 자체로 존중 받는 경험은 약해진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값어치를 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결함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람 안에는 성장하고 회복하려는 힘이 있지만, 쓸모와 인정이 조건부로 주어질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조건부로 바라보게 된다. “잘해야 가치 있다”, “성과를 내야 인정받는다”, “쓸모 있어야 곁에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이 오래 반복되면, 실패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최종 판결처럼 느껴진다. 드라마에서 황동만(구교환 분)에게 20년 넘게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시간은 "나는 아직 가치 있는 사람인가"를 매일 다시 묻게 하는 고통스러운 불안의 시간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황동만의 형(박해준 분)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데뷔야? 성공이야? 뭐야?”라고 묻자, 황동만은 “불안하지 않은 거. 그냥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난"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가진 것으로 한 사람을 정의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주 무너진다. 우리는 무엇을 갖추었는 지로 서로를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갖지 못한 것들이 자기 존재를 갉아먹는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더 나아가 감사할 줄 알아야 불안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 이는 자기 가치의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고 타인의 평가에 놓였을 때 생기는 고통이다. 이미 데뷔해 성공한 감독인 박경세(오정세 분)도 이상하리만치 황동만을 치를 떨며 싫어한다. 이에 박경세의 아내 고혜진(강말금 분)은 "황동만하고 다른 인간이고 싶으면 다른 인간이라는 걸 좀 보여 줘. 똑같은 인간이니까 길길이 날뛰는 거 아니야"라고 박경세를 질타한다.

황동만에게는 8인회와 황동만을 조건 없이 만나 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친구 이준환(심희섭 분)이 곁에 오래 있었다. 황동만은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8인회는 20년간 함께한 황동만의 행동과 태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절교 한다. 황동만은 20년간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무가치함의 고통이 쌓이면서 자신이 의지하는 관계마저 깨뜨린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은 모든 행동을 받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되, 그 상처가 타인을 계속 찌르는 방식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무가치함의 감정이 깊은 사람은 가면을 쓰게 된다. 괜찮은 척하고, 센 척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그러나 그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자기 마음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회복은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불안과 수치심을 조금 덜 숨기고 만나는 과정에 가깝다. 회복은 혼자 마음을 고쳐먹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경험을 말해도 완전히 버림받지 않는 관계 안에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관계가 끝없이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타인을 찌르는 말과 행동으로 반복될 때 관계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무가치함의 감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때로 그를 아직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사는 게 중요하다. 

"무가치함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같이 사는 거지. 비 오는 날 젖은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찝찝해도 멈출 수는 없으니까." 드라마에서 변은아(고윤정 분)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현실적인 통찰처럼 들린다. 무가치함은 한 번의 성공이나 한 사람의 지지로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 감정에 삶 전체를 맡길 수도 없다. 젖은 신발을 신고도 걸어야 하듯이, 사람은 무가치함의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도 자기 삶을 선택해야 한다. 실존적 회복은 감정이 사라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감정을 안고도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황동만에게 필요한 것은 무가치함을 완전히 이기는 일이 아니라, 무가치함에 삶 전체를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친구 이준환과 변은아의 지지는 그가 다시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지를 받더라도 자기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은 결국 자기 몫이다. 무한경쟁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치와 쓸모를 증명하라고 한다. 그러나 실존적 삶은 가치와 쓸모의 증명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어떤 관계를 지키며 살 것인가? 그리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날에도 어떻게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 그럼 막 가슴이 뛸 텐데. 어떻게든 해 주고 싶어서. 감독님 글 보면서 알았어요. 아, 이 감독님은 사랑하는 게 없구나." 황동만이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의 주인공에게 파워가 생기는지 물었을 때, 변은아가 답한 말이다. 이 대사는 무가치함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가치함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단번에 사라지는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무가치함의 감정에 삶 전체를 빼앗기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회의 수많은 약자든, 내가 마음을 주고 어떻게 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다시 움직인다. 변은아가 "사랑이 떠나고 나면 까맣게 잊고 있어서 사라진 줄 알았던 게 그대로 있는 게 보여요. 어디로 안 갔구나, 이 무지막지한 무기력"이라고 말한 것처럼, 무가치함의 감정과 무기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사랑은 그 감정이 있어도 다시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결국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자신이 쓸모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곁에 머물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날에도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무가치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젖은 신발을 신고도 다시 걸어갈 수 있다.

4
앞에서 했던 토론 력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간다. 가정에서도 일상의 질문이 토론의 출발점이다.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토론 력을 키울 수 있다. 주제가 거창할 필요도 없다. “이번 주말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같은 질문부터 시작해도 충분하다. 외식 메뉴,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 등 토론 주제로 삼을 것이 주변에 넘친다. 스스로 결정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기 주도성도 함께 향상된다. 크게 세 가지 방식의 토론 활동을 제안한다. 
▪ 첫째는 생활 토론이다. 삶과 직결된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실제로 결정권을 갖고 싶어 하는 주제일수록 더 좋다. 왜냐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기 때문이다. 
▪ 둘째는 책을 토대로 하는 독서 토론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괜찮다. 짧은 글이라도 읽은 것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게 하고, 생활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문제를 질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셋째는 찬반 토론이다. 시험은 꼭 필요한가,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어 수가 인간관계의 척도인가처럼 흥미를 느끼면서 다양한 견해를 접할 수 있는 주제면 좋다.

토론 력의 두 가지 기본기는 문해력과 정보 분별력이다. 
▪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며 읽는 것이다. 한 줄 한 줄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없도록 읽어야 한다. 짧은 글이라도 읽은 것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게 하는 것이 먼저이다. 
▪ 정보 분별력도 중요하다. 요즈음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의 진위를 의심해본 경험 자체가 드물다. 정보를 찾을 때 출처를 확인하고, 반대 입장에서 검토하고, AI를 활용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토론 환경으로는 ‘내 의견을 말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내 얘기를 경청해서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또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 경험이 쌓여야 토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토론을 할 때 이끌려고 하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이상적인 답을 미리 정해두거나 말을 중간에 자르는 행동은 상대에게 ‘내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신호로 읽힌다.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다뤄진다는 것을 보여줄 때 비로소 안심하고 자기 생각을 꺼낼 수 있다.

자기 표현이 약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토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데, 내성적인 아이가 토론에 유리한 면이 있다. 내성적인 아이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전 많은 생각을 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잘 정리한다. 토론을 잘하는 아이들이 갖춰야 할 경청과 자기 점검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자신감이다.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평소 보호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이가 의견을 이야기했을 때 맞장구 쳐주고 바로 반영해주는 상황을 자주 만들면 좋다. 내성적이고 분석적인 강점에 자신감이라는 시너지가 더해질 때, 아이는 토론을 진정으로 즐기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토론의 마무리도 시작만큼 중요하다. 토론은 구체적인 칭찬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주장을 두괄식으로 설명해줘서 좋았다", "말을 또박또박했다", "이야기를 귀 기울여 잘 들었다"는 식으로 아주 작은 모습이라도 찾아서 얘기해주는 거다. 그래야 토론에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후에는 각자 주력했던 점, 새로 알게 된 점 등을 편하게 이야기 나누면 된다. 대단한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 아이가 생각을 확장하고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조금씩 키워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토론은 승패를 가르는 기술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조금씩 쌓일 때, 우리는 자기 언어로 사고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로 <마태오 5,38-42> "폭력을 포기하여라"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늘 오직 오롯이>
늘 착함
오직 착함
오롯이 착함
늘 고움
오직 고움
오롯이 고움
늘 온유
오직 온유
오롯이 온유
늘 겸손
오직 겸손
오롯이 겸손
늘 사랑
오직 사랑
오롯이 사랑
늘 평화
오직 평화
오롯이 평화
늘 품음
오직 품음
오롯이 품음
늘 베풂
오직 베풂
오롯이 베풂
늘 섬김
오직 섬김
오롯이 섬김
늘 살림
오직 살림
오롯이 살림

6
지금 내가 ‘되갚고 싶은’ 그 마음을 사랑의 복수로 바꿀 용기가 있나요?
2026/6/15/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5장 38-42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사랑의 복수
‘복수’에 관해 강론할 때면 떠오르는 후배가 있습니다. 함께 실습하던 후배였는데, 어느 날 그 후배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형, 나는 형 때문에 지옥을 체험했어.” 무척 가까웠던 후배였기에 이런저런 도움말을 건넨다는 것이 그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나 봅니다. 후배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이제 난 형한테 복수할 거야. 예수님의 방식대로….” 그날부터 후배는 제가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말없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말로만 도움을 건넸던 저와는 달리,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복수(?)였던 셈입니다. 얼마나 큰 감동이었던지, 이후로 그 후배의 모습을 제 수도생활의 모범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맞서지 마라”라는 것은 불의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의 방식으로 맞받아치지 않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끊어내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주고, 천 걸음을 가자 하면 이천 걸음을 가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에서 멈추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조금 더’를 향해 나아갑니다. 보복은 또 다른 상처를 낳지만, 사랑의 복수는 관계를 새롭게 빚어냅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되갚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방식대로 끊어낼 것인지 말이지요.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살레시오회)/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정의와 보복이라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다루며, 우리 신앙이 지향해야 할 더 높은 차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가 탐욕이 부른 비극적인 불의를 고발한다면, 복음은 그 불의의 사슬을 끊어내는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아합 임금은 이웃 나봇의 포도밭을 탐냈으나, 나봇은 조상의 상속지를 팔 수 없다는 신앙적 원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러자 왕비 이제벨은 거짓 증언과 조작된 재판이라는 비열한 수단으로 무고한 나봇을 살해하고 밭을 빼앗고 맙니다. 이 사건은 권력이 신앙과 양심을 짓밟을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나의 것을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마저 얼마나 쉽게 도구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도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는 아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는 않은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이라면 누구나 아합과 이제벨을 향한 강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느낄 것입니다. 구약의 ‘동태복수법’(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사실 무분별한 복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만 되돌려주라는 폭력의 제한적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인 선포를 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뺨을 치면 다른 쪽도 돌려대고, 겉옷을 가지려 하면 속옷까지 내주라는 말씀은 무기력한 굴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폭력의 논리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똑같이 되갚아 주는 순간 나는 악인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고 폭력의 사슬은 영원히 이어지지만, 그 고통을 내 몸으로 받아내며 멈출 때 비로소 악의 연쇄는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십자가 위에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으면서도 군대를 불러 보복하지 않으시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눈에 바보처럼 당하셨기에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세상은 "당하고만 살지 마라", "받은 만큼 갚아줘라"라고 속삭이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이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은 아합의 멸망을 불렀지만,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은 온 인류의 부활이라는 위대한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내가 오늘 조금 손해 보고, 먼저 참고, 비난을 감수하는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서는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의 마음이나 권리를 나봇의 포도밭처럼 함부로 빼앗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눈에는 눈'의 논리로 대응합니까, 아니면 기도를 통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 노력합니까? 폭력을 멈추는 진정한 힘은 더 큰 폭력이 아니라 더 큰 사랑에서 나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 나를 불쾌하게 하거나 부당하게 대할 때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속으로 "주님, 저 사람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해 봅시다. 그것이 바로 등경 위에 빛을 밝히는 삶이며, 탐욕의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주님, 저희가 나봇처럼 올곧은 양심을 지키게 하시고, 아합처럼 탐욕에 눈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상처 입었을 때 보복의 유혹을 이겨내고, 당신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