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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행복은 외롭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근심 걱정이 거의 없는 삶이다.

370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2일)

1
오늘 아침 사진은 무환자나무이다. 우리 동네 수운교(水雲敎) 본부의 마당에서 찍은 거다. 수운교는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를 교조로 하여, 사람을 섬기고 영세의 행복을 누리며 덕을 천하에 펼쳐 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교리로 알려져 있다. 그 곳에 가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쓰여진 회향나무를 만난다. '사인여천'이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강조한 인본주의 사상이다.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던 시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며 모든 인간을 본질적으로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그는 창시자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니 신분이나 성별 등에 따라 차별하는 바 없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처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삶이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구체적으로 '양천주(養天主)', '대인접물(待人接物)' 등의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곧 하늘이다. 하늘이 결코 나와 따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시고 있고(侍天主),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인내천)이라는 것이 수운 최제우의 중심 사상이다. 그의 제자 최시형은 ‘인간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단순히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러한 인식을 실천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모시고 있는 하느님을 각자가 길러 나가는 '양천주(養天主)'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양천주를 통해 실천적으로 하느님을 자각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접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것이 바로 '대인접물' 사상이다. 양천주가 '사인여천'의 근거가 되는 이념이라면, '대인접물' 사상은 '사인여천'의 실천적 적용을 위한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되는데 각각 대인(待人)과 접물(接物)이다. 내 이웃과 내 옆의 물건을 어떻게 대할까 의 문제이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주장이자. 사람이 집에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내려오셨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라 본다. 거기에다, ‘사람이 곧 한울이다’(人乃天)를 기치로 내건 동학혁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도교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원래 이름은 경상(慶翔)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바꾼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수제자이다. '시형'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이유는 “대저 도(道)는 때를 쓰고 활용하는 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다”며 용시용활(用時用活) 철학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우묵눌’(愚默訥: 어리석은 듯, 묵묵히, 어눌하게)의 자세로 삶을 살았다 한다. 

내가 곧 하늘이다. 하늘이 결코 나와 따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시고 있고(侍天主),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인내천)이이라는 것이 수운 최제우의 중심 사상이다. '사인여천',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자.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하늘 냄새"가 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하늘 냄새/박희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근심(환자)이 없는 나무'라는 무환자(無患子) 나무는 불교에서 강력한 귀신을 굴복시키는 법력이 있다고 여겨지며, 특히 무환자나무로 만든 막대기는 사악함을 제거하고 귀신을 죽일 수 있어 '무환(무환)'이라고 불리던 것이 이름이 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용도로 염주알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열매의 씨앗이 둥글고 단단하여 염주 만들기에 좋은 까닭도 있다. 그리고 집 안에 이 나무를 심으면 자식에게 우환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여 심기도 했다.

2
행복은 외롭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근심 걱정이 거의 없는 삶이다. 이런 조건을 이루려면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늘 기억할 일이다. 근면함, 검소함 그리고 정직함, 3 '함'이다. 그러나 첫 번째 '함'인 근면함을 무조건 찬성하지는 않는다. 이 주장은 다음 챕터에서 말한다. 내가 생각 하는 근면은 다음 세 가지 중의 하나 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나도 이 세 가지를 일상에서 자주 실천하려고 애쓴다.
§ 다정함: 친절하고 배려한다. 반대가 무관심과 짜증 그리고 화를 자주 내는 거다.
§ 근면함: 책임과 의무에도 반드시 성실해야 한다.
§ 믿음: 배신하지 않는다. 반대가 낯선 존재로 과거까지 의심하는 거다. 과거가 지나간 시간이라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과거는 확정된 시간이 아니다. 현재는 혼란스럽고 불확정적이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에 따라 미래 역시 전혀 예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근면(勤勉, 부지런함)'이라는 말이 오늘 아침의 화두이다. '근면'을 '부지런히 일하며 힘 씀'이라고 사전은 말한다. 반대 말이 '게으름', '나태'이다. '근면'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근면 성실(誠實)하다'라 말한다. '부지런히 힘써 일하며 정성스럽고 참 되다'는 거다.  스캇 펙은, 자신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게으름을 "24시간 중 몇 시간을 열심히 일하는 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진짜 게으름은 중력이 짓누르는 관성 때문에 깨어 있음에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있음"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윤정구 교수는 근면함을 증거하는 "인간으로 마땅히 가야 할 길"의 여정은 "안락한 자신만의 동굴에 갇혀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동굴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 실린 ‘동굴의 비유'에서 나온다.  이 비유는 고백(告白)과 회심(悔心)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원래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동굴 안에 위치한 벽에 투영된 그림자만 보도록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여 있는 수인(囚人)과 같다. 그들 중 한 혁신가가 ‘결연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속박하는 사슬을 끊는다.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들 허상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동굴 맨'이었다. 이 '동굴 맨'은 밖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굴 밖을 나가보지 못하고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서 동굴 벽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보고 자신과 세상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스캇 펙이 말하는 '근면함'이란 플라톤이 상정한 '동굴 맨'의 상태를 벗어나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게으른 삶이란 동굴 밖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밖을 외면하면서 동굴 안에서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사는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근면 성실함을 얻을 수 있을까?

근면 성실에는 책임도 뒤 따른다. 다음은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다. "위험한 사상이란 없다. 사유하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왜냐하면 현대의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은 비판적 사유와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악마가 저지르는 게 아니다. 악이 저질러졌으니 그것을 행한 자에게 악마의 낙인이 찍힐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친위대 대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고 유대인 학살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른 측면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매우 성실하고 근면한 공직자였다. 서류 정리는 늘 깔끔했고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가 처리한 서류를 통해 약 4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됐지만 그에게 그것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일 뿐이었다. 동기도 신념도 악의도 없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 이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히만에서 보이는 악의 참모습이었다.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다. 거대한 악의 뿌리에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멍청함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사유하라. 위험은 무사유에서 나온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살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판단도 인식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삶은 잘못된 사고보다 위험하다는 게 아렌트의 주장이다. '악의 평범성'은 국가나 종교, 진영, 조직 등의 명령이나 가치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현실화한다. 그 싹은 우리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자랄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근면성은 범죄가 아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명백한 유죄임을 강조했다. 세상의 악은 인간이 악해서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런 정치와 사회의 구조 악에 저항하지 않은 결과다.

여기서 '저항'에 방점을 찍는다. 비판적 저항으로써 인문학이 나아갈 길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확장을 위하여 약자들 과의 연대와 사회적 책임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을 잘 따져야 한다. 저항은 누구의 저항이며, 무엇을 위한 저항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에 대한 진압 방식인가? 아니면 권력의 중심부 밖에서 자유와 평등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변혁을 모색하는 방식인가? 그래서 인문학에서 '저항'을 말할 때는 '비판적 저항'이라고 말한다. 

다른 생물처럼, 인간도 자기 완전체로 현상유지를 통해 생존한다. 그러한 현상유지에 적절한 변화가 없다면, 진부한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유지와 변화 사이에서 최선의 전략으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인간은 익숙함을 편함이라고 착각하고 그 편함 안에서 즐거워 한다. 소수의 인간만이 그 편함이 진부함이라고 인식하여 대담한 혁신을 감행한다. 인간이란 누 구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완제품(完製品)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할 시제품(試製品)이다. 싫던 좋던 자신이 손으로 만들 때, 그 시제품은 완제품이 된다.

3
다산 정약용의 부인 홍혜완은 유배중인 남편에게 혼인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빛 바랜 다홍치마가 "글 쓰기에 훌륭하다"면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병들어 약해진 마음에, 언제 유배에서 풀려날 지 모르는 남편을 가다리는 부인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한껏 담은 시이다. 이 시를 쓴 1806년은 다산과 부인의 결혼 3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그런 아내에게 다산은 시 한편을 지어 미안하고 애틋한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가기 싫어 망설이는 듯 하구나. 주저하고 망설인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끝내 이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다산이 부인이 보낸 다홍치마를 5쪽으로 잘라 두 아들에게 편지 첩 4쪽을 만들어 보낸 것이 '하피첩'이다. 빛 바랜 다홍치마에 쓴 편지라는 말이다. 남은 치마폭으로는 외동딸의 행복한 혼인생활을 기원하는 미조도를 그려 보낸다. 다산은 부인과의 사이에 6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4남 2녀를 잃는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다홍치마는 빛이 바래 담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는 외로운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다산이 두 아들(학연, 학유)에게 보낸 '하피첩'의 하피는 곧 홍군(紅裙, 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다. 사실 홍군, 즉 다홍치마는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처녀와 미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생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 치마'라는 속담도 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쪽을 택한다는 말이다. 사자성어로는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한다. 홍은 밝은 빨강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왕이면 처녀가 좋다'는 성희롱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하피는 원래 궁중의 빈들이 입는 옷이었지만 중국 당 송 시대부터 신부가 입은 혼례 복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홍군'보다는 '하피'라 표현했을 것이다. 하피는 붉은 노을 빛 치마라는 말이다. 치마폭들을 70여장으로 자르고 다듬었다. B5보다 조금 작은 크기이다. 재단한 치마폭 마다에는 종이를 붙여 빳빳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야 할 치마를 두고 고작 생각해낸다는 것이 "세월이 흘러 담황색으로 바랜 다홍치마를 보니 글을 써서 서책으로 남기기에 꼭 알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치마에 쓴 글을 보고, [두 아들이]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다산은 그동안 아내의 치마를 잘라 써내려 갔던 편지 26편을 두 아들(학유, 학연)에게 보냈다. 그리고 시집가는 딸에게 고이 간직하고 있던 빛 바랜 다홍치마 한 폭에 화조도를 그려주었다. 하얀 매화 꽃 가지에 새 두 마리가 다정하게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부부가 평생 한 곳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이다. 프랑스 소설가 쌩-떽쥐베리의 "사랑한다는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미라, 한 곳을 함께 바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을 보면, 폐족(廢族, 망한 가문)이라는 말이 눈에 띤다. "폐족은 벼슬하는 데 거리낌이 있을 뿐이다. 폐족으로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식견이 트인 선비가 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좋은 점이 있다. 과거시험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데다, 가난함과 곤궁함을 통해 오히려 심지를 단련할 수도 있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밖에 없다." "폐족으로서 너희 스스로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면 스스로 비참해 진다." "폐족이 배우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리고 소위 '메기론'도 언급한다. "재물을 저장하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못하다. 단단히 잡으려 할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메기와 같은 것이다." "부지런함(근면)과 검소함(검소),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평생 써도 닳지 안을 것이다."  검소함을 이야기 하려다가 여기까지 왔다.

말이 나왔으니 하나 더 보탠다. 다산이 두 아들을 위해 '하피첩'에 남긴 성어가 있다. "경직의방(敬直義方)"이다. 공경하는 마음을 다잡고, 의리로 자신의 행동을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역>> <곤괘>의 '문언전'에 나와있는 "공경함으로 마음을 고르게 하고(敬以直內, 경이직내), 의로움으로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義以外方, 의이의방)"을 줄인 것이다. 경(敬)은 신하가 임금님 앞에서 있을 때처럼 집중하고 몰입하는 자세이다. 마음을 하나로 먹고 자신의 일을 하는 자세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의(義)는 정의로,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마음이다. 외적인 태도, 말과 행동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자신의 불편을 감내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4
사람들을 근면, 성실 그리고 노동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굶주림(배고픔)이라는 맹견이나 메기를 활용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메기 효과’를 수시로 들어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청어나 정어리를 한 배 가득 잡아 항구까지 돌아오면 그 사이에 물고기들이 곧잘 죽어버려 골치를 앓았다. 이에 어느 어부가 커다란 메기 한 마리를 청어나 정어리가 있는 수조에 넣었더니, 물고기들이 메기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생생했다. 그리고 ‘개와 염소의 비유’로 설명했다, 페르난데스 섬에 염소들만 살면 나약하기만 하고 새끼만 과잉 생산할 것이기에 사나운 개를 풀어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염소들이 사나운 개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자기도 모르게 강한 존재가 될 뿐 아니라 개체 수 조절도 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영학에서는 이런 공포심만으로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공포심 외에 성취욕이나 자아실현감을 적극 자극하는 것이 더 나은 동기부여 기법이라 가르친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회적 동물은 ‘관계'의 동물이기에 ‘인정(認定) 욕구'가 매우 강하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발적 폭력(살인 포함)의 배후엔 종종 모욕감이나 멸시당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 역시 인정욕구가 짓밟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이것도 인정 욕구이다.

반면, 부모에게 칭얼거리는 아이나 조직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에 대해 부모나 리더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 그러셨군요"라며 그 마음을 알아주고 경청한다면 의외로 분노가 쉽게 가라앉는 걸 볼 수 있다. 나아가, 기업들이 조직 구성원들을 대할 때, 작은 성취라도 적극 인정해주고 칭찬한다면 그 구성원은 더욱 분발할 뿐 아니라 전체 조직 분위기조차 ‘고(高)성과’ 지향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를 ‘인정 효과'라 한다.

‘당근과 채찍'이란 말처럼, 메기 효과가 채찍에 해당한다면, 인정 효과는 당근과 같다. 경영을 뜻하는 매니지먼트(man-age-ment)의 뿌리가 기마술(manège, maneggiare)이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마부나 기수가 말을 손(man)으로 다룰(ager) 때는 당근만도, 또 채찍만도 아닌, ‘당근과 채찍'의 절묘한 결합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기업 조직에서 사람을 다루는 것도, 마치 마부가 말을 다루듯 ‘당근과 채찍'을 잘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기업 조직의 목표인 더 많은 이윤(잉여가치)을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메기 효과이건 인정 효과이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경우, 결국은 자본의 몸집만 크게 불리게 된다는 점이다. 마부나 기수가 말을 잘 다스리기 위해선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결합해 써야 하는 것이다. 설사 결과적으로, 당근을 받는 구성원이 20% 이하, 그 외 80% 이상은 늘 채찍을 맞더라도, 일단 모두에게는 ‘당근과 채찍’ 논리가 내면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소'나 ‘청어’, 또는 ‘말’ 취급을 당한다. 거꾸로 말하면, 맹견이나 메기가 잡아먹을 듯 설치거나 마부가 말을 다루듯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 통제하는 그런 사회, 그런 조직, 그런 관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거다. 그 결과는? 살아 있는 노동을 자본에 더 많이 갖다 바치는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다. 오늘 아침에 하려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잘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윤 정부는 예산편성 때, 부자나 자본을 위해 세금을 대폭 깎아 재산을 지켜주는 대신, ‘돈 안 되는’ 민생, 연구 그리고 복지 예산은 감축하는 기조를 보였다. 부자나 자본은 ‘검찰 공화국'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 좋아하지만 빈민, 노인, 노동대중은 경제적 궁핍화에 신음했다. 따라서 ‘굶주림의 공포'가 지금도 빈민과 노동대중을 자본주의의 틀에 더 단단히 결박한다. 이런 식으로, 소득 불평등이나 사회경제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실패이거나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이 해소되기는 커녕, 설사 일시적으로 줄더라도 오히려 장기적으로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 그리고 국회가 통과시킨 ‘노란봉투법(하청 노조도 원청업체와 교섭할 권리 보장, 또, 기업이 노동자나 노조를 상대로 천문학적 손배 소송을 함부로 못하게 함)'의 거부는,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무서운’ 개나 메기가 필요하다는 듯이, 노동자들이 굶주림의 공포에 떨도록 만들어야, 마침내 노동자 스스로 최대 ‘주52시간’ 한계선을 허물자고 요구할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학생인권조례 탓에 교권이 침해 됐다’는 논리가 보수언론을 등에 업고, 보수 색채가 짙은 서울시의회나 충남도의회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였다. 학생들에게는 ‘사나운’ 개나 메기 같은 존재가 필요할 뿐, 인권이나 존중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차분히 보건대, 교사의 죽음을 부른 ‘갑질 학부모’ 사건은 결코 학생인권과 교권 간 대립이 낳은 게 아니다. 이는 한편으로, 돈과 권력(사다리꼴 서열화) 앞에서 사람과 생명을 경시하는 물신주의의 산물이며, 다른 편으로는, 대학입시와 노동시장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중독시스템(경제성장 중독체제)의 산물이다.

다음은 대안이다. 국가나 자본이 학생이나 국민, 노동대중을 ‘사나운’ 개나 메기로 협박하며 다스리려 한다면, 그러면서도 화려한 자본축적 이면에 ‘일자리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구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잉여인간 법칙'이 우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생명이 모두 존중되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사람과 생명을 무시, 경시, 멸시하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과감하게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지 모른다. 길지 않은 인생, 옹골차게 행복한 삶을 위하여!

5
연중 제9주간 화요일로, 말씀은 <마르코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이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나의 것은
나에게
나는
하느님께
너의 것은
너에게
너는
하느님께
우리의 것은
우리에게
우리는
하느님께

6
하느님께 속한 우리는 어떤 삶으로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나요?
2026/6/2/연중 제9주간 화요일⠀
마르코 복음 12장 13-17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하느님께 속한 이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치밀한 덫을 놓았습니다. 바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올가미를 씌우려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즉시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로마에 반기를 든 인물로 고발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면, 동족들 앞에서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방인 황제를 섬기는 배신자로 몰아세웠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하고 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사회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근원적인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려던 이들이 그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는 점입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경탄과 찬미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새겨진 그 거룩한 모상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온전히 회복되고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참된 기쁨을 누릴 곳은 오직 그분 곁이기 때문입니다.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6월 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오늘은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로마 성 밖 깊은 숲 속에서 순교한 그들의 피는 훗날 그 장소를 거룩한 숲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전례는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영적 소속감과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깊이 일깨워 줍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머무를 사람들이 아니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을 기다리는 나그네들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다그치며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유혹하지만, 사도는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2베드 3,12)라고 권고합니다. 그날을 앞당기는 방법은 거창한 업적이 아닙니다. 주님 보시기에 "티 없고 흠 없는 사람"(2베드 3,14)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기다림의 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세금 문제'라는 교묘한 덫을 놓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시며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이 말씀은 단순히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나누는 이분법이 아닙니다. 동전에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듯, 우리 인간의 영혼에는 하느님의 모습, 곧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그분의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는 이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법을 지켰으나, 하느님의 법과 충돌하는 순간 주저 없이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들에게 순교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가장 고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봅시다. 나는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내 영혼의 진짜 주인인 하느님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나는 오늘 나의 시간과 마음 중 얼마만큼을 하느님께 기쁘게 되돌려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지갑 속의 돈보다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인장을 더 소중히 여겨 봅시다. 세상의 의무에는 충실하되,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만은 오직 주님만이 머무시는 자리가 되게 합시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결코 하느님의 자리를 잊지 않게 하소서. 저희 영혼에 새겨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 저희의 삶을 온전히 당신께 돌려드리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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