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3일)
1
"조금 모자란 삶이 오히려 더 평온 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늘 더 가지려 하고, 더 채우려고만 애를 쓴다. 그러나 삶이 힘들어지는 순간은 부족해 서가 아니라 넘치기 시작할 때가 많다. 그래서 ‘모자람의 미학’은 단순한 생활 태도가 아니라, 매우 철학적인 사유이다. 사유의 반대가 본능이다. 사유 없이 살면, 본능의 노예가 된다. 동서양의 현인들은 넘침보다 부족함을 더 깊은 완성으로 보았다.
나는 넘침보다 부족한 사람, 완벽함보다 틈을 보이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틈이 있어야 인간적이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는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 부른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 부른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보다 어딘 가에 부족한 듯이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느낀다. 제주도의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돌담을 살펴보면 돌과 돌의 사이를 메우지 않았는데,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설 수가 있는 빈틈이 있어야 한다. 그 틈이 넘침이 아닌 부족함이다.
실제로 일상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리적 틈새가 아닌 제 3의 공간인 틈새가 존재할 때에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내 마음에 빈틈을 내고 나 자신의 빈틈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빈틈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주도의 돌담처럼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모자람도 미덕이 된다. 빈틈이 있어야 햇살도 파고든다. 빈틈없는 사람은 박식하고 논리 정연해도 정이 가질 않는다.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틈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창구이다.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유이다.
2
노자도 “가득 찬 것은 반드시 기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삶의 구조를 꿰뚫는 통찰이다. 물이 잔에 가득 차면 더 이상 담을 수 없고, 결국 흘러 넘치듯이, 욕망도 일정한 선을 넘으면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힘이 된다. 아무런 단점은 없고, 장점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완성은 자연의 본질이 아니다. 미완성이 오히려 우주의 본질에 가깝다. 왜냐하면 완성되었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완성은 죽음이고 미완성은 생명이다. 그래 노자는 채움(盈)은 죽음이고, 비움(沖)은 생명이라 말했다. 비움 속에 새로운 채움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미 다 채운 것 속에 동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기교(技)가 있는 기술자는 보기에 재주가 없어(拙) 보이기도 하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자신이 잘났다고 요란하다.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오히려 더 시끄럽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하면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다 보면 불안해진다.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한다. 권력과 돈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조금 모자란 상태는 이상하게도 여유를 남긴다. 더 채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긴장 시키기보다 오히려 숨 쉴 틈을 만들어 준다.
내가 좋아하는 노자 <<도덕경>> 제45장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을 나는 조건문으로 읽는다.
§ "대성약결(大成若缺)"이면 "기용불폐(其用不弊)"이다. 즉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여도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읽는다.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잘난 척 하지 말고, 좀 모자란 듯이 행동하여야 그 쓰임이 계속 된다'로 읽는다. 완성된 거라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 "대영약충(大盈若沖)"이면, "기용불궁(其用不窮)"이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여도 그 쓰임이 궁진함, 끝이 없다.' 이 번역은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냥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자꾸 채우려고, 빈 틈을 메우려고 하기보다는 그 틈을 오히려 가득 찬 것으로 생각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면 다음 세 문장을 금방 이해가 된다.
§ 대직약굴(大直若窟)는 구부러진 것이 오히려 크게 곧은 것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 대교약졸(大巧若拙)는 서툰 것이 오히려 크게 솜씨 좋은 것으로 생각하자 것으로 이해한다.
§ 대변약눌(大辯若訥)은 더듬더듬 거리는 말이 크게 말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직(大直), 대교(大巧), 대변(大辯)은 5가지의 '고졸(古拙)의 멋'의 세계, 즉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의 세계를 포용해야 한다. '고졸(古拙)'이라는 말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고풍이 돌고 뭔가 서툰 듯한 것, 그러면서도 내면에서 풍기는 어떤 멋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도자기가 기계에서 찍혀 나온 듯 흠잡을 데가 없이 반듯한 듯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가진 그릇이 멋있고 비쌀 것 같은데 그것은 상식적이고 천박한 미의식에 의한 판단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도자기의 진가를 감식할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듯 반듯반듯하고 반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뭔가 균형도 완전히 잡히지 않은 것 같고, 어딘가 거칠고 투박한 것 같으면서도 구수하고, 은근하고, 정답고 살아 숨쉬는 듯한 것, 금방 눈길을 끌 정도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마음이 끌리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에 손이 갈 것이다. 거기에 이른바 '고졸(古拙)'의 미가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아름다움이라 하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기억난다. 이 말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질박하고 따뜻한 조선 시대의 찻잔들이 고졸미(古拙美)의 대표이다.
3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욕망과 권태 사이의 진자 운동’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삶이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추일 뿐이라는 거다. 그는 인간의 만족은 지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으로 괴롭고,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로 괴롭기 때문에 모든 만족감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필연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쫓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채워지면 곧 지루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욕망을 끝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것을 적당한 수준에 머물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만족은 소망을 사라지게 하고, 그리하여 기쁨을 사라지게 한다. 그렇기에 만족이나 행복의 실현은 고통의 완화, 욕구 충족 이상의 무언 가가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그러면 그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족감이란 이제는 충족되어 사라져버린 과거의 고통과 결핍을 떠올릴 때 간접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중요한 것은 조금 모자란 삶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점이다.
§ 덜 가지겠다는 여유,
§ 덜 채우겠다는 절제,
§ 그리고 지금 가진 것 안에서 머무를 줄 아는 태도이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균형이며, 가난이 아니라 성숙이다. 아침의 맑은 공기처럼,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 숨이 쉬어지듯이, 삶도 약간의 여백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모자람은 여유를 만들고 그 여유는 행복을 만든다. 따라서 조금 모자람은 미학이기 이전에 생존 전략이고, 부족함을 유지하는 능력은 개인의 품격이자 지혜가 된다. 이 시대에서는 더 많이 갖는 사람이 아니라, 덜 가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강함으로 인정받고 있다.
성철 스님은 사는 게 편안 하려면 다음 5 가지를 줄이라고 했다. 줄일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거다.
§ 손에 일을 줄인다. 할 일을 무작정 줄이기 보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거다. 덜어낼수록 삶의 힘이 모인다.
§ 몸에는 소유를 줄인다. 많이 가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진다. 꼭 필요한 것만 남겨 존다. 비움이 곧 자유가 된다.
§ 입에는 말을 줄인다. 말이 많아질수록 실수도 늘어난다. 꼭 필요한 말만 담백하게 한다. 침묵은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
§ 대화는 시비를 줄인다. 이기려는 말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수록 관계도 삶도 훨씬 편해진다. (5) 위에는 밥을 줄인다. 과식은 몸을 무겁게 하고, 마음까지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적당함이 건강과 평온을 지켜준다.
4
산다는 것은 깨달음과 괴로움 사이에 있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으로 해방되면 깨달음이고, 그 속에 괴로워 하면 '생로병사'의 틀 안에서 힘들어 하는 거다. '무아'와 '연기'가 진리이므로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거나 이미 연기적인 완결성에 놓여 있다. 삶의 괴로움을 당하면서 사는 것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을 연기적 관점에서 비교해 본다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깨달어 있으며 이미 괴로움과 무관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의 족쇄를 스스로 애써(실제로는 운명적으로) 매달고 사는 것이다.
다음은 '무아'와 연기'에 대해 내 인문 일지에 적어 두었던 것이다.
'무아'와 '연기'의 실상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그것으로 되어질 수만 있을 뿐이다.
진리는 오직 알뿐이어서 할 일이 없다.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자연, 천하, 도, 하늘은 태평하다. 아무 것도 어질러진 것이 없다.
진리는 해야 할 일은 없으며 할 일이 일어날 뿐이다.
우리 일상의 사건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아(無我)
나는 없다.
I'm nothing.
깨달음은 무아를 체득하는 것에 기반한다.
무아와 연기는 동전처럼 동일한 차원의 일이며 기능적으로 동어 반복이다.
무아이므로 연기이고 연기이므로 무아이다.
세계의 모든 것이 연기적 현상이므로 연기와 무관하게 독존하는 것은 없다.
석가모니는 존재, 즉 '있다'는 '있다가 없다가', '생겼다 없어졌다'(生滅, 생멸)하는 '공(空)'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공'은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다.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 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인드라망'이라는 것이다.
'인드라망'은 불교의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로써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하여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한다. 신력(神力)이 특히 뛰어나 부처님 전생 때부터 그 수행의 장에 출현하여 수행을 외호(外護)하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무구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
그물은 한없이 넓고 그물의 이음새마다 구슬이 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 주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되어져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연결되어져 있으며 서로 비추고 비추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또 이것은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5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 21,20-25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 엮은이의 맺음말)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대여, 길을 걸으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그대여,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라도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과 함께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보듬어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에게 걸림 없이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인 듯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가림 없이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이 걷도록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다독여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과 함께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라도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을 걸으라
6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앞날을 두고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시선을 다시 당신께로 돌려 주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도 자주 다른 이의 길과 나의 길을 비교하며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을 고유한 사랑으로 부르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다른 이의 길은 그와 하느님 사이의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묵묵히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비교에서 오는 피로와 염려를 주님께 맡겨 드리고,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평화로이 응답하는 복된 토요일 보내시기를 빕니다. 늘 하느님 품 안에서 평안하십시오.
7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가장 나다운 몫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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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23/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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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21장 20-25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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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나 자신으로
요한 복음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뒤따르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여줍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 주위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과 동행했던 그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돌아가실 때는 십자가 아래에 머물렀으며, 마지막에는 가장 먼저 무덤에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몫을 잘 알았기에 첫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습니다. 다른 이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떠나갔을 때조차 십자가 아래까지 나아갔을 만큼 누구보다 그분 곁을 원했던 그였지만 무덤에 다다랐을 때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뒤로 물러났으며, 오늘도 앞지르거나 나란히 걷지 않고 뒤따라 걸었지요. 이렇듯 오롯한 ‘나 자신’으로 주님을 따를 줄 아는 것은 내게 가장 좋은 몫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에서나 봉사활동에서도 다른 이의 몫에 비해 내 역할이 좋아 보이지 않거나 예수님께서 내 기대와 다른 요구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몫으로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을 묵묵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5월 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드디어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이 각각 어떻게 마무리를 짓는지 목격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기엔 세상도 부족하다는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두 열린 결말은 이제 복음의 역사를 이어갈 주인공이 바로 우리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가택 연금 중이었지만, 성경은 놀라운 표현을 씁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 바오로의 몸은 비록 묶여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로웠으며 오히려 그 제약 속에서도 찾아오는 모든 이를 환대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역시 질병, 경제적 어려움 혹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인생의 쇠사슬에 묶일 때가 있지만, 그 상황조차 하느님의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처한 그 좁은 자리에서도 주님을 찬미하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길이 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곁에 있는 동료 제자인 요한의 운명을 궁금해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우리는 자꾸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왜 나만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지?'라고 불평하곤 하지만, 주님은 각자에게 맞는 고유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은 오래 살아 주님의 사랑을 기록하는 사명을, 베드로는 죽음으로써 주님을 증언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길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건네시는 "너는 나를 따라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는 2000년 전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고 있기에 그 기록은 결코 끝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이 마침표를 찍지 않고 끝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바오로 이후의 29장을 써 내려갈 사람은 바로 성령을 받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로써 부활 제7주간의 여정이 끝납니다. 내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그 안에서도 바오로처럼 담대하게 주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요한 복음의 마지막 페이지 뒤에 이어질 사랑의 기록은 오늘 여러분이 행하는 작은 선행과 용서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사슬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은총을 묵상하며, 내일 오실 성령님을 맞이할 뜨거운 마음의 빈자리를 마련합시다.
“주님, 저희가 어떤 제약 속에서도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는 담대함을 갖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며 흔들리지 않고 오직 당신께서 제게 주신 길을 묵묵히 따르게 하시며, 저희의 삶이 당신 사랑의 끝나지 않는 기록이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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