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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들은 더 이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소비하지 않는다.

366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6일)

1
살면서 느끼는 불편함 자체가 통증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다. 나 자신의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을 깨달을 때나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실감할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이 불면으로 이어지며 일상을 해쳐도 왜 그것이 통증임을 깨닫지 못했을까? 몸의 통증은 해소하려 늘 애쓰면서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묵묵히 생로병사의 길을 걸었던 선인들이 얼마나 수더분했는지 점점 감탄하게 된다. 인류 대재앙이라 할 만한 노화의 절대 고독 속에서도 대부분의 선인들은 고통을 밖으로 배설하지 않고 묵묵히 견뎠다. 어느새 후루룩 져버린 봄 꽃 못지않게 아름다운 연초록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꽃은 저마다의 내면에서 언제든 만개할 수 있다고. 고목에 핀 꽃은 더욱 아름답다고. 

보는 행위는 서로 다른 층위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눈에 그냥 보이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보려는 의지가 개입된 지각 활동도 있다. 어떤 경우 든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시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시각 정보에 갇히지 않고 그 정보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3 가지를 제안한다.
(1)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길 모퉁이 핀 꽃들을 만난다. 그것들은 자기의 꽃 시절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자기 연민이나 비애 따위는 없었다. 뿌리 내릴 약간의 흙과 물기를 만나 생명의 진수를 드러내는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다.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다. 그럴 때 무언 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감탄을 촉발한 것은 ‘자세히 봄'이다. 할 일에 몰두하느라 빠르게 걷는 이들은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2) 빛이 없으면 볼 수도 없다. 내면의 빛이 어두워서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살 때 기쁨과 감사는 가뭇없이 스러진다. 그것은 일종의 속박 상태이기 때문이다. 금방 사라질 감정 말고, 평생 계속될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시적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르다.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나 여기 살아 있다", "나 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다. 잘 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자신이 할 나름이다.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마티아스 뇔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애써 나를 포장하면서 내 삶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감정 소모하느라 내 가치를 잃어버리지 말자. 자기 중심을 잘 잡으면 인생은 훨씬 더 편안해질 수 있다.
(3) 가끔 인생의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죽음, 죄책감, 고통, 우연 등 우리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일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누구나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 당혹감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지만 때로는 새로운 삶의 문턱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고통을 통해 눈이 밝아진 이들이다. 그들은 타자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눈물을 본다. 눈이 맑고 밝은 이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들은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딱한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2
소비 구조 역시 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소비하지 않는다. 특정 빵집, 대형 매장, 야구장처럼 '목적지'만 찾는다. 상권이 '면'에서 '점'으로 쪼개지면서 주변 골목은 자연스럽게 소외된다. 단순한 유동 인구 감소가 아니라 소비 방식 자체의 변화다. 문제는 정책 대응이다. 지금까지 의 지원은 창업 자금이나 대출 등 '버티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버티는 것 자체가 손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빚으로 시간을 버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결국 폐업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제는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창업 숫자를 늘리는 정책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상권 분석과 마케팅, 운영 전략 등 실질적인 역량을 키우는 교육과 함께 공실을 방치하지 않고 지역의 문화·체류 공간으로 전환하는 시도도 병행돼야 한다. 골목상권의 불빛이 꺼진다는 것은 단순히 가게 몇 곳이 문을 닫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창업이 아니라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환경이다. '버티는 경제'에서 '살아남는 경제'로의 전환이 늦어질수록 꺼진 불빛은 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3
지방이 소멸되어 간다. 로컬 콘텐츠를 개발하며, 우선 우리 끼리 재미있게 즐기면 외부이나 외국인들이 와서 체험하고, 이것이 곧 지방 경제, 특히 골목 경제의 경쟁력이 커지지 않을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자연과학, 나라의 부강함이 이 문화의 힘에서 나온다. 행복, 정의, 자유, 사랑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의 높이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김구에 의하면, 문화적이 되면 남을 모방하지 않는 힘이 발휘된다고 한다. 즉 독립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을 하여야 한다. 이 판단은 철학적 시선에서 나온다. 그 시선은 남들이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꿈'이다. 그러니까 꿈이 없으면 종속적인 사람을 살게 된다.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어느 쪽의 쇠사슬이 더 빛나는지./어느 쪽의 쇠사슬이 더 무거운지.//그리고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Amiri Baraka, 미국 극작가)

이런 꿈을 가지려면, 시대의식을 포착하고, 포착된 시대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자각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폐쇄적인 시선을 벗어나 시대를 들여다 보고, 거기서 문제를 발견하려고 덥 빈다. 어떻게?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런 호기심이 발동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독립된 주체, "단독자"(들뢰즈)라고 한다.

단독자는 대답하는 일보다 질문부터 시작한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신의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이다. 반면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한다. 대답과 질문은 다른 차원이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다시 말하면, 대답은 기능의 차원이지만, 질문은 인격적인 문제이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도식이 가능하다. 질문-독립적 주체-궁금증과 호기심-상상력과 창의력-시대에 대한 책임성-관념적 포착-장르-선도력(리더십)-선진국. 선진국에서는 "너 참 독특하다 Your are so unique."라고 칭찬한다. 이러한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근거로 자기 삶을 꾸리면 자기 주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지 않는 윤리적인 삶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더 좋은 우리의 삶의 터전을 위해 집단지성에 기여해야 한다. 집단 지성을 높이는 방법은 우리가 사회 발전 방향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 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뒤에서 비평만 하는 것은 멈출 일이다.

4
진정한 복수는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망치지 못하도록 나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동양의 지혜는 강가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했다. 이 문장은 복수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인내의 선물임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거다. 이는 단순히 상대를 증오하며 저주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며 세상의 이치가 작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복수 이야기에 열광하는 건 나쁜 사람을 단죄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원초적인지 보여준다. <<이야기의 탄생>>에서 윌 스토는 부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의 80퍼센트가 ‘처신’에 관한 내용이고, 성경과 코란은 일종의 통제이론으로 우리가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이때 복수는 잘못된 ‘처신’이 만든 사회적 ‘처단’이다.

문제는 복수의 특성이다. 복수란 칼집 없는 칼과 같아서 내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복수는 없다. 누군 가를 증오할 때 평범한 일상은 사라진다. 하지만 용서가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가의 문제는 삶이 망가진 사람들에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내 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감옥에서 자신은 ‘주님’께 이미 용서 받았다고 고백하는 살인자를 마주한 후, 다시 지옥에 빠진 영화 <밀양>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용서란 이토록 어려워서 섣불리 강요하거나 시도해선 안 된다.

언젠가 유족의 복수에 대한 질문에 프로 파일러 표창원은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가장이 죽으면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너진다. 먹고사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복수는 사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라는 말을, 자살을 시도했던 ‘동은’ 곁에서 “물이 차니 지금 말고, 우리 봄에 죽자”라고 말한 할머니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봄에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지옥 같은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은 변할 수 있다. 이때의 복수는 내가 쥔 칼에 ‘칼 집’을 만들어 나를 지키는 것이다. 시간은 힘이 세다.

직접적인 복수는 대개 파멸을 동반한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휘두른 칼날은 결국 낭 자신에게도 깊은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에 감정에 매몰되어 복수를 계획하는 동안 정작 소중한 나의 현재는 증오의 불길 속에서 타버린다.

반면 강가에 앉아 기다린다는 것은 나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태도이다. 악행을 일삼는 자는 결국 자신의 과오나 오만함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얻는 것이다. 또한 이 기다림의 시간은 자기 수양의 과정이 된다. 적이 무너지는 모습을 모기 위해 강가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분노를 다스리고 마음의 평온을 찾는 법을 배운다. 시간이 흐른 뒤 강물에 떠내려 오는 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통쾌함 보다는 삶의 덧없음과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강물은 서두르지 않지만 결국 모든 것을 바다로 실어 나른다. 인간의 악행 또한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러니 굳이 손에 피를 묻히며 복수의 굴레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가며 강가에서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질 때, 시간은 가장 완벽하고 결점 없는 복수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5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하늘에서 오시는 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하느님 계시는 만큼
나 있고
나 있는 만큼
하느님 계시니
하느님 계시는 만큼
나 있어
나 있는 만큼
하느님 계시기를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하느님 하시는 만큼
나 하고
나 하는 만큼
하느님 하시니
하느님 하시는 만큼
나 하여
나 하는 만큼
하느님 하시기를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하느님 이루시는 만큼
나 이루고
나 이루는 만큼
하느님 이루시니
하느님 이루시는 만큼
나 이루어
나 이루는 만큼
하느님 이루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6
나는 땅에 속한 생각으로만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위로부터 오는 생명에 열려 있나요?
2026/4/16/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복음 3장 31-36절: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 바라보기
오늘 복음은 ‘땅에서 난 이’와 ‘하늘에서 오시는 이’를 나누어 말합니다. 영성 생활의 시작은 자신의 한계와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세상의 논리, 업적, 결과들 만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땅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관심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기를 바라십니다. 그 바라봄은 미움 대신 용서, 두려움 대신 신뢰, 자기중심적 사고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과 함께할 때 우리는 땅의 것에 집착하여 묶이지 않고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흰 꽃을 피우고, 꽃창포는 더러운 도랑물을 빨아들이면서도 예쁜 꽃을 피웁니다. 우리의 신앙은 관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위를 향한 지향입니다. 이 방향성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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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6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우리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나는 세상의 소리를 따르는 가, 아니면 하늘의 소리를 따르는 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마땅히 머물러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다시 의회에 끌려가 대사제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힘과 공포를 이용해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사도 5,28)며 입을 막으려 하지만,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돈, 명예, 체면과 같은 세상의 가치가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정의를 가로막는 순간이 오곤 합니다. 그때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나온 자'를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약육강식이나 무한 경쟁 같은 땅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하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땅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비참한 실패이고 양보는 어리석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하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고귀한 일입니다.

요한 복음은 또한 선언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맺으며 그분의 숨결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신비 속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우리는 혹시 사람들의 눈치나 평판이 두려워 하느님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보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게 무엇을 바라실까?'라는 질문이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은 크고 자극적이지만, 하늘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오늘 하루,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우리 마음의 채널을 하느님께 고정해 보십시오. 비록 세상이 우리를 비난할지라도,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의 마음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부활의 평화가 가득 차오를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게 하소서. 오직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늘의 지혜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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