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1일)
1
권력은 중독성이 있다. 타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권력의 쾌락은 마약 만큼이나 강렬하다. 주변의 인간과 사물이 자신을 신으로 받든다는 환상은 극도의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역으로 권력을 상실했을 때 밀려오는 금단 현상은 죽음 만큼이나 쓰리다. 권력은 자기중심을 확대하는 마법이다. 군사정권시대에 권좌에 있던 자들의 무소불위(無所不爲, 못하는 일이 없음) 행태가 그것이다. 백성을 폭압하고 경제 이권을 갈취하며 온갖 향락을 추구했다. 민주화를 쟁취했음에도 현재 지방에서는 정계, 관가, 기업, 언론, 학계의 이권 및 권력 동맹이 대형 행사, 토건 사업, 특화 전략을 내세우며 혈세를 갉아먹고 있다. 오죽하면 분노하는 시민들이 지방자치 무용론을 외치겠는가?
선진국들은 부패방지를 위해 촘촘한 법과 제도를 두고 있다. 몇가지 공통점은 법에 따른 권력행사, 재정 투명성, 시민의 권력 감시, 권력기관 간 견제에 의한 독점방지 등이다. 정치의 미학은 몸으로 익힌 절제와 균형과 중용에 있다. 정치인들은 시민 평가보다 자신의 내면을 주시해야 한다. 양심이야 말로 자기를 다스리는 참된 권력자다. 권력은 양날의 칼이다. 휘두른 칼은 반드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따라서 권력은 사욕을 넘어선 공공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독권(獨權) 끝에 홀로 한탄하는 독한(獨恨)을 면할 수 있다. 원광대 평화연구소 원익선 교무의 글에서 배운 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도학(道學)'이라는 말이 400번 넘게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학'은 인도(人道)를 탐구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자와 맹자에서 출발한 주자의 성리학을 말한다. 이는 성품은 하늘의 이치이며 지극히 선하다는 원리에 기반, 도덕 완성을 위한 학문과 정치 이념이다. 무(武)에 의한 건국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조선은 성인(聖人)이 되는 성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황이 어린 임금을 계도 하기 위해 만든 <<성학십도>>가 대표적이다. 조선은 당쟁으로 많은 폐해도 있었지만, 중국 역사에 없는 500년을 이어왔다. 멸망의 원인보다도 어떻게 장구한 역사를 쌓아왔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이 '도학'은 권력자나 정치인만의 학문이나 이념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공부하면 좋은 수양을 할 수 있다.
나는 "자기 구원의 가이드 맵"이란 부제가 붙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한형조 독해)를 늘 책상 위해 두고 있다. "자기 구원"이라는 말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원을 한문 성(聖)으로 보았다. 성인은 남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성(聖)'자를 파자(破字)하면, 귀가 입보다 앞에 두기를 가장 잘 하는 왕(王)이다. 그 뜻은 성스러울 성자이다. 성학(聖學)에서 '학'자는 '도정(道程)이라 풀었다. 도정은 '어떤 장소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배운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면 얻는 구원이란 "자각과 분투"(한형조)로, 사유와 수련으로 정복하는 "자유의 고원"이다.
다시 "도학" 이야기로 돌아 온다. 다양한 시각이 있지만, 조선이 500년을 이끌어 온 동력은 도덕 왕국 구현을 위해 인간 자신을 성찰 하는 교육에 있었다고 본다. 비록 계급 사회였지만 왕과 관리로부터 양반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로는 성현을 이루고 밖으로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인문 정신이 아닐까? 당파 간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도학"은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하나의 이념을 지향하는 단일 사회였지만 정치력을 정치가의 마음에서 찾았다는 점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된 불교의 수행도 이 점과 상통 했다. 오늘날 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에겐 "도학"의 되새김질이 필요하다.
"도학"의 집대성자 조광조는 임금에게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사특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발현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극진한 선과 아름다움에 이르게 할 수 있다”(<<정암집>>)고 했다. 여기서 "사무사(邪無思)"란 말이 소환되었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에 잘못됨이나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시 300편을 모은 <<시경>>을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주옥 같은 시 모음집"이라 했던 말이다. 퇴계 이황은 "사무사"의 '무'자를 없게 하다'는 사역형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무사"를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한다'로 읽은 거다. 율곡 이이는 이 "사무사"와 "무불경-마음과 몸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을 벽에 걸어 두었다 한다. 생각이 바르려면 마음이 바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어쨌든 정치의 도는 객관적 논리가 아니라 안팎이 일치하는 나의 행동에 있다. 선거 출발선에 선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해관계를 넘어설 염치가 없고, 정치적 반대 견해를 수용할 아량이 없다면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표를 던질 시민과 그들 마음을 대행하는 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정치는 하늘처럼 자신을 비우고 모든 것을 환대 하는 공인이자 고독한 수행자의 길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여러 번 한 말이지만, 오늘 아침 또 한 번 되새긴다. 그리고 선거에 나오는 사람은 <<장자>> <인간세>의 다음 부분을 정독 할 필요가 있다.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안회의 갸륵한 마음을 알면서도 공자는 안회의 요청을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근심 걱정이 있으면 남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경(시각장애인)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인의(仁義)를 배우고 그것으로 정치 판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 수양을 했으면 사람을 다스리라고 했지만 섣부른 수기(修己)만으로는 치인(治人)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오히려 '치인'이 아니라, 재인(災人), 즉 남에게 재앙을 안겨 주는 일이 되고, 결국 자기를 해칠 위험까지 있다고 했다.
▪ 이상만 높고 정치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경험을 못한 햇 병아리가 세상사에 닳고 닳은 정치 지도자들, 사람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러 온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다 가는 오히려 그들에게 설득 당하고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인격을 잘 닦았지만 백성을 위한다는 이상 만으로 백성들 편에 서서 임금에게 간하다가 죽은 역사적 인물 두 명을 실례로 들려주면서 심지어 죽음을 당할 수 있으니 아예 갈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네가 위나라로 가려는 것이 진정으로 그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네 명예와 실리를 위한 것인 지를 살펴본 후에 가고 말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명예와 실리 추구는 성인들도 물리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상과 포부 만은 좋을지 모르나, 그 것 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니 위나라에 가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라고 한다.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동기(動機)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아무리 대의명분을 내세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지를 냉철이 살펴보고, 속으로 조금이라도 '꿀리는' 것이 있으면, 이런 일이 본인에게 나 남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요즈음 선거에 나오면서 국가와 지역을 위해 나를 바쳤다 느니 하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3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치 문법이 바뀌고 있다. 변방,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던 이재명 대통령, 정청래 대표, 추미애 의원, 정원오 구청장을 보아야 한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한 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주류였고 서사(narrative)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팬덤이 형성돼 있다는 거다. 당원 주권 시대이고, SNS나 유튜브를 통해 많은 정보들을 쉽게 접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철학도 '변방에 서라'이다. 이것을 배운 것은 고 신영복 교수의 책에서 이다. 중앙은 퇴행하게 마련이며, 변방에 있던 세력이 다시 중심부를 장악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토인비는 말했다. 신영복 교수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변방인, 주변인을 강조했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 창조,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변방에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가려고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방에 있다면 오히려 기회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라는 말이 요즈음의 화두이다. 트랜드를 연구하는 김난도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내러티브 자본’도 결국 내일을 빙자한 거품을 걷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에 집중하겠다는 욕구로 읽힌다"고 기자가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요. 예전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이었지만 이젠 서사의 진정성을 파고들어 가죠. 가령 영화 ‘ET’에 M&M 초콜릿이 나왔다면 이제 소비자는 궁금해해요. 그 회사는 우주개발에 투자했나? CEO가 양성평등을 말하면 이사회에 여성 임원은 몇 명인가? 상품의 스토리나 CEO의 말보다 그 회사가 가진 제품과 경영의 진정성을 캐내죠. 그 진정성이 내러티브로 확인되면, 소비자는 제품을 사고 주식을 사요. 내러티브는 단순 스토리와는 달라요. 세계관의 문제이고 진정성의 문제죠. 개인도 기업도 결국 자기 정체성의 내러티브가 중요한 자본이 되고 있어요.”
이젠 시민들이 다 안다. 누가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입 닫고 뒷짐 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서슬이 시퍼렜던 시절에는 입 닫고 있다가 누군가의 피 흘린 희생에 의해 이뤄낸 결과물에 은근슬쩍 숟가락 올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엄혹한 시절에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잠)하며 싸웠던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이미 개개인의 정치 이력을 모두 파묘하고 있다. 이젠 희생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서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시민 유권자를 무서워 하는 정치인이 성공하는 시대이다.
4
오늘은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언젠가 만났던 윤정구 교수의 글을 다시 소환해 읽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리더가 시대를 읽는 문해력이 있다면 리더는 시대적 상황이자 날줄인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플랫폼, 기후 및 탄소 중립, 양극화 해결이라는 과제에 생존을 넘어선 번영이 가능한 씨줄을 제시해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조직하여 직조해 낼 것이다.
윤정구 교수가 제시하는 리더의 가장 필수적인 역량은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할 수 있는 ‘문해력’과 ‘협업력’이다. 문해력은 씨줄과 날줄을 통해 미래를 새롭게 구성해서 뉴-노멀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다. 협업력은 미래의 약속으로 존재하는 뉴-노멀을 구성원의 주체적 협업을 통해 노멀로 실현할 수 있는 운동장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문해력으로 제시된 뉴-노멀 세상을 협업의 운동장을 통해 단단한 현실상태인 노멀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그가 말하는 '진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의 자질이다. 그건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해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대를 읽는 문해력을 말한다. '시대 문해력'이란 "자신의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를 구성하는 분명한 정체성과 신념의 씨줄을 시대적 상황이라는 날줄에 엮어서 새로운 미래를 직조해 생생하게 큐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윤정구) 여기서 큐레이션이란 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 미술 작품이나 예술 작품의 수집과 보존, 전시하는 일을 지칭하였으나 요즈음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배포하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윤 교수에 의하면, "문해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들의 주장이 씨알이 먹히는 소리인지에 의해 결정 된다"고 한다. 문해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미래는 산적한 현안의 돌파구를 제시하는 씨알이 먹히는 내러티브가 된다. 리더의 이야기가 씨알이 먹힌다는 것은 리더가 자신의 내러티브를 통해 큐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네러티브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지지자들의 팬덤을 형성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리더의 주장이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날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상태에서 자신의 씨줄만 고집하거나 강요할 때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내러티브도 없고 있어도 실제 상황이라는 날줄과 격차가 있어서 제대로 큐레이션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윤 교수에 의하면, "시대를 읽는 문해력이 리더십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차세대 플랫폼이 날줄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디지털 플랫폼이 날줄로 제시된 세상에서 요구되는 씨줄은 진리(眞理: Truth)를 초월한 진실(眞實: Veracity)이다. 문해력이 있는 리더가 되기 의한 첫째 조건이 진실과 진리의 차이를 구별해 이해하는 것이다. 스토리 텔링이 아니라, 네러티브가 문제가 되면, 진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리(眞理:Truth)는 어떤 주장이나 명제의 옳고 그름에 관한 객관적 잣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옳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릇된 것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 그 주장이나 명제는 진리이다. 보편적 자연 과학적 진리에 의해 판단되는 영역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이 수집한 사실에 근거해서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논증하면 이 진리는 기각된다. 반대로 사실에 근거해서 진리가 반복적으로 논증(replication)되면 주장은 진리의 지위를 유지한다.
문제는 이런 자연 과학적 논리에 익숙해져, 우리가 진리와 진실을 혼동할 때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만을 이야기하면 다 진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본 사실은 이미 자신의 정신모형(프레임)이라는 안경에 의해 오염된 사실일 수 있다. 안타깝지만 일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느낀 사실에 기반한 진리에 대한 주장은 모두 확증편향을 위한 데이터이가 많다. 디지털 플랫폼이 날줄로 제시되는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은 가짜뉴스의 숙주로 전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확증편향의 동굴 속에서 본 것들을 마치 사실인 양 호도해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기타 SNS를 통해서 말이다. 문제는 문해력이 떨어지는 대중은 또 거기에 속는다는 거다.
생각을 좀 꼼꼼하게 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보편적으로 옳은 것을 발현하는 진리(眞理)와는 달리 디지털 세상에 구현하는 것은 진실(眞實:Veracity)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 사실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나 약속이 시대와 공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의미가 있다면 이 의미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관련한다. 의미는 목적에서 나오고, 목적은 미래에 거하기 때문에 진실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실현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실현되는 시간이 요구된다. 위대한 진실은 현재를 통해 과거의 약속이 정산되는 형태지만, 대부분의 진실은 미래에 실현할 약속이다. 미래에 어떤 더 나은 사회나 더 나은 상태를 만들 것이라는 뉴노멀 세상을 약속했는데 리더가 협업을 통해 실제로 이 약속을 노멀로 실현했다면 리더는 진리가 아닌 진실을 실현한 역사적 산증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종합하면, 리더의 문해력이란 리더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국가나 사회의 정체성과 미래의 목적을 씨줄로 삼아서 시대적 상황의 날줄에 성공적으로 엮어내 뉴-노멀의 세상을 직조해내는 능력이 시대를 읽는 능력이다. 문해력이 있어서 씨알이 먹히는 주장을 하는 리더는 팬덤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해력이 떨어져서 과거의 범주에 고착된 토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확증편향을 먹고 사는 진영논리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먹히는 자기편끼리 확증편향을 증폭시켜 다른 확증편향의 진영과 힘 싸움을 벌인다. SNS 알고리즘이 노리는 것은 이런 확증편향을 이용한 중독이다. 유튜브로 돈을 버는 일부 극우 세력들이 이들이다.
21세기 리더십은 확증편향으로 무장된 진영논리와 뉴-노멀을 통한 새로운 팬덤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진영논리에 빠진 사람들이 힘으로 제시한 리더십이 '스토롱맨의 리더십'이다. 트럼프, 푸틴, 시진핑과 같은 스토롱맨들이 리더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국가들이 진영논리의 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보가 문해력을 잃고 진영논리에 빠지면 이들은 포퓰리즘을 동원한다.
진영이 아닌 뉴-노멀 기반의 팬덤을 이끄는 기제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선 미래에 대한 목적을 위한 신념, 정체성, 정서 등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리더가 시대 문해력이 있다면, 그 리더가 시대적 상황이자 날줄인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플랫폼, 기후 및 탄소 중립, 양극화 해결이라는 과제에 생존을 넘어선 번영이 가능한 씨줄을 제시해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직조해 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지방 선거에서 그런 리더를 뽑아야 한다. 만약 리더의 주장이 씨알이 먹히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이런 시대적 현안이라는 날줄에 성공적으로 직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문해력을 통한 뉴-노멀이 성공적으로 제시되면 결국 이 뉴-노멀이 약속한 세상을 협업을 통해 현실로 완성해 노멀로 만드는 것이 리더의 책무이다. 리더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어 뉴-노멀을 노멀로 만들 수 있는 운동장을 설계해주는 사람이다. 이 협업의 운동장을 통해 진리를 넘어선 진실이 실현되면 이 리더는 진성 리더로 역사적 유산을 남긴 리더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진정한 리더에게는 디지털 기반의 새로운 유형의 팬덤이 형성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 나온다. 오얏(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게 하므로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하면, '복숭아 나무와 오얏(자두)나무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아래 저절로 발자국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일 년 내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말없이 조용하게 정진해 왔던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개가 내리나 서리가 내리나, 그 나무에겐 열매를 훌륭하게 맺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되니, 마침내 탐스런 복숭아와 자두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게 되었다. 한문 '혜(蹊)'를 찾아 보면, 의미가 여럿이다. '좁은 길', '지름길', '발자국' 등이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발자국을 남긴 좁은 길이 지름길이다. 지름길은 멀리 돌지 않고 가깝게 질러 통하는 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5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로 말씀은 <마르코 16,9-15>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이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분께서 오시고 또 오시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믿고 싶으나
믿지 않아
믿지 못하는
벗에게
믿음께서
오시고
또 오시네
믿는 것을 너머
믿음이 되어
믿게 하라고
희망하고 싶으나
희망하지 않아
희망하지 못하는
벗에게
희망께서
오시고
또 오시네
희망하는 것을 너머
희망이 되어
희망하게 하라고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못하는
벗에게
사랑께서
오시고
또 오시네
사랑하는 것을 너머
사랑이 되어
사랑하게 하라고
6
하느님을 믿지만 신뢰하지 못하고, 사명을 알지만 발걸음이 무겁고, 부활을 고백하지만 삶이 여전히 닫혀 있지는 않나요?
2026/4/11/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코 복음 16장 9-15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닫힘에서 열림으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도, 두 제자의 체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면 믿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았고, 기적을 보았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머뭇거리며 쉽게 믿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삶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였음에도 불안해 하고, 의심하고, 다시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기 일쑤인 우리들의 모습 말이지요. 믿음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믿음에 따른 선택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 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믿지 못했던 그들, 당신의 고통 앞에 도망쳤던 그들, 의심 많은 그들을 다시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 역시, 완벽해서 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너를 보낸다.”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11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와 더불어 제1독서에서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세상 권력 앞에서도 얼마나 당당하게 주님을 증언했는지를 전합니다. 이 두 장면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우리 삶의 '변화'와 '증언'입니다.
제1독서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들이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변화의 비결은 단 하나, 바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사도 4,13 참조). 이처럼 신앙은 지식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해도 주님과 머무는 시간이 없다면 그 말에는 힘이 실리지 않지만, 소박한 신자라도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난 생생한 체험이 있다면 그 한마디는 세상을 뒤흔드는 힘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스승과 3년이나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조차 믿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꾸짖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부족한 이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주님은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당신께 온전히 매달리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의심과 나약함은 주님께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오직 완고한 마음만이 그분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협박하는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19). 진정한 부활의 증인은 누군가 시켜서 의무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 경이로워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소문을 내듯, 부활하신 주님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셨는지 체험한 사람은 그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부활 팔일 축제는 오늘로 마무리되지만, 부활 시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무덤 주변을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조용히 침묵하며 신앙을 드러내지 말라고 압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삶으로 당당히 대답합시다. 거창한 설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얼굴에 깃든 평화와 손끝에서 나오는 친절이 바로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입과 손이 되어 세상에 사랑을 전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완고한 마음을 녹여 주시고, 저희가 보고 들은 당신의 자비를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1) | 2026.04.27 |
|---|---|
| 세상에서 가장 아껴야 할 사람은 나 자신 (1) | 2026.04.27 |
|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고 감당하는 일이다. (1) | 2026.04.26 |
| 자연은 말이 없다. (0) | 2026.04.26 |
| '쓸모 없음의 쓸모' 이야기 (0) | 2026.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