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명은 신비이다. 그러니까 살아있으면 된다.

364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3일)

1
"사람 목소리에는, AI 답변에서는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문장을 만났다. 코로나가 불을 붙이고, AI가 부채질 하면서, 요즈음 사람 간의 대화가 줄고 있다.사람보다 챗봇을 좋아한다. 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보며 혼자 저자와 대화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답을 얻는 것과 좋은 답을 얻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대화 내용 '너머의 느낌'이 있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데 오만함이 있다." "그는 말하면서 늘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어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읽어내는 맥락에서 나오는 '감'이다. 이를 사람들은 '소프트 정보'라고 한다. 반면 AI를 통해 얻는 정보는 아무래도 밋밋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에게 듣는 느낌이다. 예상 밖의 영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성취적 목표'가 아닌 '정서적 목표'의 만남을 일부러 가져야 한다. 여가적 활동을 할 때 정서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성취의 동기보다 정서적인 관계 속에서 내적인 가쁨을 찾는 거다. 실제적으로 촉이 좋은 리더가 되려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주말이면 본인의 비즈니스 밖의 예술가를 만나는 것도 좋다.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효율과는 거리가 먼 만남일지라도.

조직을 이끄는 것도, 누군 가 에게 큰 동기부여를 주는 것도 아직은 사람의 몫이다. MZ 세대에서 아날로그가 다시 유행이라고 한다. 손편지를 쓰고, 오프라인의 일상에서 더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효율을 쫓다 효과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을.

2
명상은 '비우는 휴식'이 아니라, 뇌를 '최적의 지점', 아니 '최적 임계 상태'로 유도하거나 데려가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창의적이 되거나, 적어도 정보 처리나 학습 능력이 유연해 진다.

흔히 우리는 명상을  잡념을 떨쳐내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종의 마음을 비우는 행위라는 인식이다. 여러 연구의 결과들을 보면, 실제로는 명상 중에 뇌 신호의 복잡 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뇌가 생성하는 신호의 종류가 풍부해 진다는 거다. 이는 뇌가 이전 상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극이나 정보에 더 유연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연구진들에 따르면, 이런 변화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면 뇌의 신경 가소성(Neroplasticity), 즉 신경 연결 구조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명상은 크게 두 가지이다.
▪ 마음을 안정시키고 평온에 도달하기 위해 호흡과 같은 특정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샤마타 명상이다. 이것은 마치 손전등처럼 좁은 곳에서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깊은 몰입에 도움이 되는 더 집중되고 안정된 뇌 상태를 만들어 낸다.
▪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 감각과 감정, 생각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열어 놓고 관찰하는 위빠사나 명상이다. 이것은 주변 전체를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이는 '뇌의 임계성(brain criticality)'에 더 가깝게 이끌어준다. '임계성'이란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물리학 용어이다. 이 '최적의 지점(sweet spot)'에서 뇌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저장, 처리하고, 맞닥뜨린 과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엔트로피와 신트로피의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닐까? 흩어짐의 미학인 엔트로피와  반대로 모임의 기적을 이루는 신트로피라는 우주의 기적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를 살았던 감각도, 어린 시절의 냄새도, 어떤 얼굴의 온기도 지금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 계산되고 새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타인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정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이다. 

세계는 대체로 흩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뜨거운 차는 식고, 또렷한 소리는 잦아들고, 형태는 마모 된다. 물리학은 이것을 '엔트로피(entropy, 가능한 상태의 수, 즉 '무질서'의 척도)의 증가'라고 부른다. 가능성이 적은 상태에서 많은 상태로 이동하는 것, 즉 모여 있던 것이 퍼지는 것. 시간은 그 흐름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우주에는 자연스러운 방향이 있다. 남아 있음이 아니라, 풀어짐 또는 흩어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이 시작된다. 생명은 흩어진 것들을 모은다. 예컨대, 식물은 빛과 공기와 물을 모아 한 장의 잎을 만들고, 인간의 뇌는 전기 신호의 파편들로 생각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수많은 감각과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하나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세계는 퍼지는데 경험은 또렷해 진다. 이걸 우리는 '신트로피(syntropy, 흩어짐, 아니 무질서에 맞서, 질서와 의미를 향해 모여들게 하는 경향성)'라 부른다.

어제 한 모임에서도 경험했다. 우리는 의식도,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분명히 보았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문장은 정리되었고, 생각은 방향을 얻었다. 처음에는 흩어진 질문이었지만, 말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이해로 수렴되었다. 이것은 '흩어지는 '물질의 사건이 아니라 '조직화 되는' 배열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배열, 아니 배치는 예술의 힘에서 더 많이 나온다. 예술은 서로 연결되지 않을 듯한 것들을 연결하는 힘을 준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로 상관 없어 보이는 수많은 정보들을 의미 있는 단위로 배열하는 기술을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e)'라고 불렀다. '테크네'는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정보들을 일관된 전략으로 묶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전략이란 최적화된 정보의 전략이다.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위한 전략과 기술이다. 인간은 이 전략과 기술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나 작품을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 심연에 존재하는 그 위대함을 자극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테크네가 예술적인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의 깊은 관찰을 통해 탄생한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예술가처럼 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을 나는 '위대한 개인'이라 부른다. 문학작품이나 예술 작품들은 이 위대한 개인들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래 그런 작품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감동 받는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자기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 (...) 내 보기에는 도덕적 경험의 중심이요, 도덕을 향한 의지의 중심이다." 미셸 푸코는 고대 그리스식 삶의 기술을 이렇게 요약했다. 쉽게 말하면, 어느 날 문뜩 끌을 손에 쥐고서 어지러운 카오스를 다듬어 균형 잡힌 형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비참한 상황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타일을 바꿀 수 있다는 거다. 그게 요즈음 내가 고민하는 '라이프 디자인'이 아닐까?

3
다시 신트로피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고정된 실체 라기 보다, 끊임없이 정리되는 과정에 가깝다. 생각이 흩어질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생각이 모여질 때 평온해 진다. 아무것도 새로 생기지 않았는데 경험의 질서가 달라진다. 외부 세계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구조가 재배열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삶은 무질서에 맞서는 투쟁 이라기보다, 무질서 속에서 잠시 나타나는 정렬에 가깝다. 우리가 숨을 가만히 바라볼 때, 복잡하던 마음이 맑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를 해결해서 가 아니라, 흩어져 있던 주의가 한 점에 모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정보를 더 얻을 때가 아니라, 배열이 맞춰질 때 생긴다. 이게 글쓰기가 주는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 순간 사라진다. 한 문장을 읊조리는 순간의 우리는, 다음 문장을 쓰는 순간의 우리와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끊기지 않는 질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자아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고정된 존재 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조직되는 패턴 말이다. 우주는 점점 고르게 퍼지려 하지만, 생명은 그 안에서 잠시 형태를 만든다. 따뜻한 말 한마디, 깊은 호흡 한 번, 이해의 순간 이 하나는 거대한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가 허락한 가장 섬세한 현상이다. 흩어짐 속에서 잠깐 나타나는 모임, 무질서 위에 그려지는 작은 질서 말이다.

우리는 사라지며 말하고, 우리는 사라지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영원을 붙잡는 데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매 순간 흩어지는 세계 속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자신을 정리해 세우는 일에 있지 않을까? 그게 나에게는 아침마다 쓰는 <인문 일지>이다. 불안하고, 걱정되면 다시 일상을 배치하며 질서를 잡는 거다.

4
생명은 신비이다. 그러니까 살아있으면 된다. 생명은 에너지를 쓰는 존재가 아니다. 에너지를 사용해 형태를 계속 만들어내는 존재다. 우주의 큰 흐름이 해체라면, 생명은 작은 영역에서 끊임없이 조립을 반복한다. 흩어짐 속에서 모임을 만들고, 무작위 속에서 패턴을 만들고, 사건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신트로피' 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흐트러진다. 정리해 둔 책상은 다시 어질러지고, 반짝이던 금속은 빛을 잃고, 형태를 갖추었던 것들은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무너진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애써 배우지 않아도 안다. 세상은 가만두면 정돈되지 않는다. 물리학은 이것을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에너지는 퍼지고, 구조는 해체되며, 닫힌 세계에서 질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주의 방향성은 분명히 흩어짐 쪽이다.

그런데 그 우주 안에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다. 생명이다. 세포는 스스로를 유지한다. 상처를 복구하고, 흩어진 분자를 모아 막을 만들고, 끊임없이 자신의 형태를 다시 세운다. 식물은 흙과 빛과 물이라는 무작위의 조건 속에서 잎맥의 질서를 만들고, 뇌는 전기 신호의 소음 속에서 기억과 의미라는 안정된 패턴을 만들어 낸다.

엔트로피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며 구조를 풀어놓는 경향이라면, 신트로피는 아직 오지 않은 질서를 향해 현재가 정렬되는 경향이다. 아직 형성되지 않은 형태가 마치 앞에서 끌어당기듯(목적인) 지금의 배열을 조직하는 힘. 생명은 바로 그 방향성을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해하려 한다. 정리하려 한다. 관계를 회복하려 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삶을 더 낫게 만들려 하고, 설명되지 않는 일은 잘 견디지 못한다. 생존과는 전혀 무관한 행동이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아마 인간은 사건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예측되지 않는 관계, 해석되지 않는 감정,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고통. 마음이 무너질 때를 떠올려 보면 뭔가 공통점이 있다. 문제가 많아서 가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하나의 구조로 이해되지 않을 때다. 질서가 붕괴되었다고 느낄 때다.  그때 우리는 이유를 만든다. 의미를 붙인다. 서사를 만든다. 그것은 자기 위로가 아니다. 생명의 작동 방식에 가깝다. 생명은 무작위성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계를 하나의 패턴으로 묶어 내부의 안정성을 유지한다. 뇌가 현실을 이해하려는 이유도, 마음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유도 같은 곳을 향한다.

질서를 향하는 경향, 신트로피 관점에서 보면,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생산된 해석을 잠시 멈추는 일이다. 생각을 더 만들어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더 깊은 질서가 드러나도록 소음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호흡을 바라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흡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반복적인 리듬이며, 생명체가 가진 최초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주의가 그 리듬에 머무르면 흩어졌던 신경계의 변동이 서서히 하나의 패턴으로 모인다.

 

5
오늘은 주님 수난 성 금요일로 말씀은 <요한 18,1-19,4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이다. 

<비록 나 홀로라도 마시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음모가
살길일지라도
믿음께서 주시는
믿음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체념이
살길일지라도
희망께서 주시는
희망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증오가
살길일지라도
사랑께서 주시는
사랑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탐욕이
살길일지라도
베풂께서 주시는
베풂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광기가
살길일지라도
온유께서 주시는
온유를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거짓이
살길일지라도
진리께서 주시는
진리를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굴종이
살길일지라도
자유께서 주시는
자유를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불의가
살길일지라도
정의가 주시는
정의를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저주가
살길일지라도
축복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폭력이
살길일지라도
평화께서 주시는
평화를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억압이
살길일지라도
섬김께서 주시는
섬김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죽임이
살길일지라도
살림께서 주시는
살림을 마시렵니다
비록 나 홀로라도

6
내가 지향하는 성공은 무엇입니까?
2026/4/3/주님 수난 성금요일
요한 복음 18장 1절―19장 42절: “다 이루어졌다.”

진정한 성공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라.”(이사 52,13) 만일 내가 이런 예언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오늘날 사회에서의 성공과 높은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까지 함께 읽는다면 어떨까요?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 52,14) 이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예수님 수난의 의미를 밝혀주는 예언적 시로 이해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미사 때마다 성찬례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 사랑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그려지는 달콤하고 감정적인 사랑은 사랑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지금 너무 힘겹고 고통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일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참된 성공의 표징인 것처럼 말입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오늘은 일 년 중 유일하게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날,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화려한 제대포도 치워지고, 감실은 비어 있으며, 성전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돕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화려한 말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마지막 숨소리와 그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이’, ‘병고에 익숙한 이’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매를 맞으셨고, 우리 대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강하고 화려한 것을 숭배하지만, 하느님은 가장 비참하고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은 바로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이며, 그분의 상처는 우리를 낫게 하는 유일한 약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 고통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새겨봅시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비극이 아니라 장엄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끌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시는 분이며,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를 선언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 말씀은 인생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가,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지극한 사랑을 통해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마침표입니다. 죄가 이긴 것 같고 죽음이 승리한 것 같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랑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오늘 전례 중에 우리는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합니다. 사제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의 구원이 달렸네”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저주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위에 못 박히심으로써, 이제 십자가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에 입을 맞추거나 절을 하며 우리 각자의 십자가도 그분 곁에 놓아둡니다. 내 삶의 고통, 질병, 이별, 실패의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와 합쳐질 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나를 부활로 인도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골고타 언덕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 곁을 지키던 이들의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주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침묵과 단식 속에 머뭅시다. 주님이 오늘 죽으심은 우리가 내일 살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우리 영혼을 씻어주고 있음을 믿읍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화답송).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