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31일)
1
봄은 보라고 봄이라는 말이 있다. 눈이 부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시인은 "'냉정 하라"고 한다.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고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금기 사항이라 한다. 그런데, 금기는 깨라고 있는 거로 나는 알고 있다. 금기(禁忌)의 사전적 정의는 '일상생활이나 종교 의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행을 제한하는 관습을 가리키는 종교 용어'이다. 그러나 금기의 일반적 해석은 그것을 '신적 질서'의 발현으로 본다. 그 금기를 깨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의 발현이고, 동시에 신적 질서가 얼마나 엄중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금기는 동시에 유혹이다. 욕망은 금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금기가 욕망을 부른다. 욕망이란 금지된 것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신은 안다. 유혹에 넘어가 금기를 깰 것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신은 자신의 영토에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오만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용기이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이지만, 그 한계 속에 장엄하게 침몰하는 모습 그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래 삶은 '비틀기'이다.
산다는 것은 '비틀기'라는 게 내 철학이다. 우리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어떤 존재에나 '동사적인 삶'으로 힘을 일으키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일어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彈性, elasticity, 외부 힘에 의해 변형된 물체가 그 힘이 사라졌을 때 원래의 모양과 크기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바로 힘이다. 그래서 봄을 영어로 Spring(용수철)이라 하는가 보다. 동물들이 먹이감을 발견하면, 즉시 몸을 비틀어 자신의 절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탄성을 준비하는 것처럼, 봄들도 균형을 깨고 있다.
그리고 그 탄성이 적중(的中, 목표에 어김없이 들어맞음)이라는 최종적인 완성을 보장할 것이다.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이다. 여기서 자신을 비틀어 꼬이게 하는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그래 시는 불균형이도 동작이고 힘이 된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생존이다. 인간 활동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을 우리는 '분류'로부터 시작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기도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을 축적한다. 이를 우리는 '지적 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이다. 인간의 성숙도 지적인 능력의 개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이 지적인 활동 능력을 우리는 '지능(知能)'이라 한다.
그런데, 지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다. 은유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이다.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소통 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은유를 통해 세계를 넓혀 나가는 자 가 '위대한 개인'이다. 시인 네루다는 이를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메타포", 은유는 '비틀기'이다. 은유는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둘이 꼬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꼬여가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세계는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여 있다"고 노자가 말하는 것을 이젠 잘 이해하겠다. 음과 양으로. 전혀 관계 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또 확장해 나갈 때, 우린 힘을 얻고, 힘찬 모습이 된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도 한다. 그래 봄에 "금기 사항"이 있는 거다.
봄의 금기 사항/신달자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2
어제에 이어, 트레버 캐시(Trevor Kashey)의 배고픔에 대한 접근 방식 이야기를 이어간다. 실제로 식사량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깨달음이자 첫 번째 단계였다. 이 단계가 지나면, 더 깊이 파고들어 추적한다. 즉 수면, 스트레스, 활동 수준과 같은 생활 방식 요인들을 분석한다.
캐시는 체중 증가와 감소는 주로 그 사람이 얼마나 먹느냐 에 따라 결정되지만, 음식 섭취량 그 자체는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5시간만 잔 사람은 8시간 잔 날보다 평균 550칼로리를 더 섭취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한 끼 식사량에 해당한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피실험자들의 40%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훨씬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이 먹어치운 것은 밀싹 주수 따위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은 간식으로 포도보다도 M&M's 초콜릿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생존을 위한 진화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캐시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이유로 먹는다.
- 진짜 배고픔(Real hunger): 신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음식을 요구할 때 작동한다. 이 허기는 생리적인 욕구 채워준다. 마치 자동차가 연료 탱크가 비었을 때 기름을 넣는 것과 같다.
- 가짜 배고픔(Reward hunger): 보상 허기로, 심리적이거나 환경적인 신호에 의해 발동한다. 실제 배가 고픈 것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지만, 종종 진짜 허기 없이도 발생한다. 예를 들어 단순히 시계가 특정 시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음식이 스트레스를 완화해주기 때문에, 축하할 일이 있어서, 또는 그냥 음식이 눈 앞에 있어서 먹는다. 생리적 필요가 아니라, 심리적 요구를 채우는 행동이다.
3
진짜 배고픔의 신체적 작동을 알게 되었다. 좀 복잡하지만, 알아 두면, 가짜 배고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진짜 배고픔은 뇌와 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직한 대화라고 했다. 그 작동 원리를 정리해 본다.
- 우리의 위장에는 '기계적 수용체(Mchanoreceptors)'가 늘어서 있다. 이는 뇌와 소통하여 포만감을 신호로 전달한다.
- 이 수용체가 위 속에 음식이 부족하다고 감지하면, 위는 그렐린(Ghrelin)이라는 배고픔 유발 호르몬을 분비한다.
- 이와 동시에, 그렐린의 반대 역할을 하면서 배가 찼다는 신호를 보내는 랩틴(Leptin) 호르몬은 감소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불편함으로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배에서 허기가 느껴지면서 짜증이 나기도 하고, 정신이 멍해지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한다. 또한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투쟁도피반응((Fight-or-flight, 스트레스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빠른 방어 행동 또는 문제 해결 능력을 보이기 위한 흥분된 생리적 상태)을 촉진하고 머릿속을 온통 먹어야겠다 는 생각으로 채워버린다.
- 그리고 음식을 먹고 나면 뇌가 도파민을 분비하면서, 이 행동에 대한 보상을 한다. 이리하여 우리 뇌 속에는 음식과 도파민 사이를 잇는 회로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복잡한 대화가 그다지 정직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게 문제이다. 공복 화학 물질인 그랠린은 위가 찼을 때도 분비되는 습성이 있다. 특히 맛있는 고칼로리 음식이 옆에 있으면 더 그렇다. 이것은 진짜 배고픔이 결여된 가짜 배고픔으로, 실제로는 먹을 필요가 없는데도 먹고 싶어 하는 충동이다. 바로 이런 배고픔 때문에, 저녁을 잔뜩 먹고 나서 배가 빵빵해졌는데도 디저트를 보는 순간 갑자기 배 속에 여유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짜 배고픔은 포만감을 느낀 뒤에도 왜 먹도록 강제할까?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고 나면 우리의 몸은 잉여 칼로리를 지방으로 바꾸어 체내에 쌓아 둘 수 있다. 그 이유는 만에 하나 먹을 것 없이 지내야 할 때가 온다면, 지금처럼 식료품 창고와 식당들이 주변에 널려 있기 전에 종종 그랬듯이, 우리의 몸에 쌓여 있는 지방을 태워서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그 자체가 식료품 창고였고, 그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먹어야만 창고를 채울 수 있었다. 이런 행동은 대부분의 포유동물에게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직관적 식사(Intuitive Eating)'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이다. '직관적 시기'란 다이어트의 강박과 외부의 규칙에서 벗어나, 몸이 보내는 배고픔과 포만감 신호에 귀를 기울여 먹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먹는 식사법이다. 음식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감정적 허기(가짜 배고픔)를 구분하여, 신체적, 심리적 건강과 자연스러운 체중 유지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한다. 우리의 본능적인 직관은 살이 찌는 방식으로 먹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래를 대비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따라서 본능을 극복하려면 직관을 거스르고, 의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감정이나 느낌에 의존하기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음식 섭취를 추적하자는 거다.
기회만 되면 회색곰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먹는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뷔페에서 하는 행동도 그렇다. 우리의 뇌는 칼로리가 많은 음식을 먹을 때 더 많은 도파민을 분비하도록 진화해왔다. 호두파이를 먹을 때의 즐거움과 생 브로콜리를 씹을 때를 비교해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인간이 달거나 지방이 많거나 짠 음식을 찾는 이유이다. 이런 특징들은 그 음식이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우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4
진짜 배고픔이 없는 상태에서 가짜 배고픔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건강에 막대한 기여를 해왔다. 예전에는 냉장고, 냉동고, 아이스 박스 같은 것들이 없었다. 다음 끼니를 구할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한 경우가 많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먹을 거리가 지금만큼 풍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딱히 '컴포트 푸드(comfort food), 즉 도파민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음식이거나 맛있는 고칼로리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조상들이 결코 누리지 못했던 맛있는 고칼로리 음식들 속에 살고 있다. 연구실의 실험과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더 맛있고 더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백 차례의 검증을 거쳐서 쏟아져 나오는, 규격화되고, 바로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들이다. 아이스크림첨 탄수화물과 지방을 혼합한 것, 구운 것, 치즈버거, 칩, 피자 등 그야말로 다채롭다. 탄수화물과 지방이 결합된 음식은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은 이에 강한 욕구를 느낀다. 나도 삼겹살을 구워 먹은 후, 그 기름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이제 그 음식의 문제점을 알았다. 먹기에 좋은 음식은 몸에는 좋지 않은 것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우리가 가짜 배고픔에 취약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은 과거 식량이 부족하고 불확실한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성이라,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섭취해 에너지를 몸에 지방으로 저장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사방에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 과거 적응 방식이 위험한 약점이 되었다."
음식이 유발하는 도파민의 급증은 우리가 스트레스, 슬픔, 심지어 지루함까지 해소하기 위해 음식을 찾는 이유를 설명한다. '컴포트 푸드'와 '스트레스 섭식(stress eating)'은 미국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 되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진짜 배고픔에 따른 식사는 20%밖에 되지 않는다. 음식은 스트레스를 다루는 가장 값싸고 손쉬운 방법이다. 게다가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진짜 배고픔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음시을 섭취할 때 포만감을 넘어서 정신이 멍하고 둔해지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폭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으라고 배웠다. 그런데 배고픔이 기만일 때가 있다 대부분은 그저 심리적 욕구이다. 사실 배가 고파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다. 실제로 우리는 배가 고프지 않은데, 배가 고플 때가 있다. 그냥 그런 거다. 이걸 알면 불편해도 괜찮다고 머릿속으로 다음을 생각하면 좋다. 그럼 유혹을 끊을 수 있다. "나는 안전하고, 음식이 잇고, 먹을 때가 되면 먹을 거다." 그리고 많이 움직인다.
건강한 몸무게를 항상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나은 유전자를 가졌거나 신진대사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방법 같은 능력으로 칼로리를 더 태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게 아니라, 산책 같은 걸로 푸는 경향이 강할 뿐이다. 더 건강하게 먹고 더 많이 움직인다. 만약 사소한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사탕을 집어 먹는다면, 당연히 체중이 늘어난다. 우리는 흔히 금요일 저녁에 많이 먹는다. 음식으로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면서 한 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해결책은 가짜 배고픔이라는 불편함을 다른 형태의 불편함으로 방향을 돌려 보는 거다. 예를 들어 가벼운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거다. 걷는 것도 좋다. 걸으면 스트레스도 잘 풀리고 건강에도 좋다. 칼로리를 더하는 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거다.
5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로 말씀은 <요한 13,21ㄴ-33.36-38>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이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다시 하나 되리니>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믿기에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믿음이 흔들려 더 갈 수 없는
내가 믿는 벗이여
난 괜찮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처음부터
지금 너머 영원한
그대를 향한 나의 믿음에
나를 향한 그대의 믿음이
언젠가 다시 오롯이
하나 되리니
희망하기에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희망이 사라져 더 갈 수 없는
내가 희망하는 벗이여
난 괜찮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처음부터
지금 너머 영원한
그대를 향한 나의 희망에
나를 향한 그대의 희망이
언젠가 다시 오롯이
하나 되리니
사랑하기에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사랑이 식어 더 갈 수 없는
내가 사랑하는 벗이여
난 괜찮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처음부터
지금 너머 영원한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에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이
언젠가 다시 오롯이
하나 되리니
6
나의 삶에서 십자가는 길인가요, 아니면 장식품인가요?
2026/3/31/성주간 화요일
요한 복음 13장 21ㄴ-33.36-38절: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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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아니라 길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장소라기보다 길입니다. 그 길은 슬픔과 고통, 시련을 통과하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문턱도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길을 아직 모릅니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베드로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통 속의 경험을 통해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환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깨지는 경험이며, 공짜로 얻는 은총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은총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정한 뒤에야, 자신의 어두움을 보고 그 바닥에서 더 내려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루카 22,54-62 참조). 바로 그 눈물의 자리에서 그는 변화의 문을 통과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힘은 완벽함이나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깨진 자아를 통과한 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안전한 거리에 두고 장식품으로만 바라보는 예술적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보고 음미하는 예술품이 아니라, 피와 땀 속에서도 매일 끌어안고 가야 할 길입니다. 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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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31일 성주간 화요일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어제보다 더 어둡고 무겁습니다. 최후의 만찬 식탁, 가장 친밀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하시어"(요한 13,21)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빛과 어둠, 충성과 배신이 한데 뒤섞인 긴박한 현장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식탁에서 예수님께 빵을 받은 유다는 밖으로 나갑니다. 성경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단순히 해가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등지고 자기만의 욕망과 계획을 따라 나선 유다의 영혼 상태가 ‘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시선을 피하고 내 고집과 이기심을 선택할 때, 우리 인생이 아무리 밝은 대낮 같아도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 되고 맙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의 빛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나만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있게 외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그의 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함을 몰랐습니다. 인간의 결심은 환경과 두려움 앞에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심으로써 나중에 그가 다시 일어설 회개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이 매번 깨질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 다시 그분을 찾는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고백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사 49,4).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완벽한 실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그 실패를 통해 이스라엘이 돌아오고,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구원의 빛이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무기력한 순간들도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 누군가를 살리는 빛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시련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것, 그것이 성주간을 지내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는 밤에 떠났고,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처럼 주님을 내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내 의지만 믿고 큰소리치다가 작은 유혹 앞에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이것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다시 돌아왔는가’에 있습니다. 밤은 깊어 가지만, 주님은 여전히 식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닭이 울기 전,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자비에 매달리면 어떨까요?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다가올 부활의 새벽은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주님, 제 안의 어둠을 보게 하시고, 그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빛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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