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28일)
1
인문학적 힘은, 인공 지능이 제공하는 요약 정보에 익숙해질수록, 그 이면에 숨겨진 맥락을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힘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숨겨진 맥락을 파악한다. 이해력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AI 시대의 가장 교묘한 착시는 유창함의 착시다. 문장이 매끄럽다고 이해한 것은 아니다. 요약을 잘한다고 자기 것이 된 것도 아니다. 정말 이해했다면,
▪ 자기 말로 다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낯선 상황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 반대의 사례가 나왔을 때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 몇 번이고 “왜”를 물어도 무너지지 않는 설명,
▪ 전제가 바뀌면 결론도 함께 조정되는 사고, 그것이 진짜 이해다.
이 점에서 우리 학교의 태도는 아쉽다. 적지 않은 교실에서 AI를 학습의 새 환경으로 설계하기보다 먼저 표절과 부정행위의 언어로 다뤘다. 물론 공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도구를 금지한다고 이해력이 저절로 자라지는 않는다. AI의 시대에는 금지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질문과 검증, 설명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독서이다. 독서는 단순히 단편적인 지식을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저자와 치열하게 대화하며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지적 모험을 하는 행위이다. 인공 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정답'을 복제해 낼 때, 인간은 독사를 통해 행간을 읽으며 고민하고 논리의 빈틈을 자신의 관점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이러한 능동적인 사색의 과정이야 말로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지적 기초 체력"을 길러주는 핵심이다. 이러한 기초 체력이 부족하여, 인공 지능에만 의존하면 그 체력을 점점 더 약해진다.
정답의 복제보다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 중요하다. 이때 독서는 선택이 아닌 '호흡'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빠른 검색으로 얻은 결과물은 결코 사유의 깊이를 대신할 수 없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은 요약된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읽고 사유 하며 축적해 온 시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중요해지는 것은 ‘가치력(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이다. '가치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보다, 무엇을 위해 그것을 하느 냐를 묻는 힘이다. AI는 수단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목적을 세워주지는 않는다. 선택지를 늘려주지만, 선택의 이유는 주지 않는다. 결국 목적 함수를 설정하는 존재는 우리다.
▪ 어떤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볼 것인가?
▪ 무엇을 더 좋은 삶이라 부를 것인가?
▪ 무엇을 위해 효율을 포기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인간의 수준이 드러나기도 한다. 좋은 아이디어보다 더 희소한 것은 그것을 자기 선택으로 만드는 용기다. 가치력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욕망의 수준과 용기의 문제다.
2
학교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 학령 인구 감소와 급격한 기술 변화 속에서, 학교는 지식 전달의 창구를 넘어 스스로 생각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식의 유효기간이 짧아질수록,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깊은 독서이다. 특히 전공의 경계를 넘는 독서는 서로 다른 학문을 잇는 공통 언어를 형성하고, 이질적인 지식을 연결해 혁신적인 해법을 찾는 동력이 된다. 특히 현대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은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 성격을 띤다. 예를 들면, 인공 지능 윤리를 논할 때, 공학자에게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할 때도 과학적 분석은 역사, 사회적 맥락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학문 간의 벽 허물기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바로 깊은 독서이다. 과잉 정보로 벽이 무너진 현대 사회에 중요한 '촉매제'이다.
<글항아리> 대표인 강성민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을 읽을 때 마음이 가장 평화롭다. 예전에는 뭔가를 알아내려고, 유식 해지려고 무엇에 쫓기듯이 책을 읽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만나도 완독의 기쁨을 누리려 건너뛰기도 많이 했다. 그런데 점점 스타일이 바뀌는 것 같다. 책 안에 있을 때가 즐거우니 굳이 빨리 읽으려 하지 않는다. 혼자 읽지 않고 같이 읽는 일의 즐거움도 알게 됐다. 독서 후 담론은 독서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촉매제다."
책을 읽는 사람의 서재는 실험실 못지않은 창조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축적된 질문과 성찰은 논문이나 기술을 넘어, 시민의 삶을 바꾸는 비전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중심에는 사람이 반드시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에서 출발한 독서로 다져 진 인문학적 소양이 사회에 미칠 영향과 책임을 돌아보게 하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지식 시회 전체로 흐르는 짓기의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 길은
▪ 학교 현장에서 읽고 성찰하고 쓰는 기초 학문의 토대를 만드는 거다.
▪ 학생들이 고전 텍스트를 매개로 시대와 대화하고 공동체의 난제를 해결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문화가 형성되게 하는 거다.
▪ 이를 위해 독서 기반의 융합 교육 모델을 만들고, 지역 도서관이나 동네 서점 인프라를 혁신하며, 양질의 콘텐츠를 확충하는 등 '지적 기초 자산'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 그리고 그 성과를 대중의 언어로 번역해 사회적 자산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성과가 단행본과 교양서로 발간되어 일반 시민의 지적 갈증을 채워줄 출판 생태계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 청소년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고전을 재 해석한 강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지적 문턱이 낮아지고 교양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인공 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 지능이 모든 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책 속에서 자신만의 질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지식 수입국을 넘어 지신 생산국으로 도약할 수 잇다. 그 힘은 결국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인문적 힘에서 나온다. 책을 깊게 많이 읽어야 한다.
3
"AI 시대의 교육은 '지덕체'가 아닌' 체덕지' 이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최근 'AI 인문학'을 고민하면서, 이런 문장을 만나면 눈이 가진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원장인 조현경의 말이다.
한때 AI는 '정답을 맞히는 기계' 였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생성형 AI는 전혀 다르다. 존재하지 않던 이미지를 그려내고, 쓰인 적인 없는 문장을 빚어내며, 아직 정의되지 않은 문제에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는다. '정답을 찾는 기계'에서 '가능성을 생성하는 존재'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대한 변화이다.
프롬프트를 잘 던지면, 근사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과 결과물의 진위를 가려내는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힘과 텍스트를 꿰뚫는 통찰이 과연 '기능적 숙련'으로 길러 질 수 있을까?
프롬프트(Prompt)는 AI 모델(ChatGPT, Gemini 등)이나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하는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뜻하며, 결과물의 품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역할 부여, 상황 설명 구체적인 목적 제시를 통해 AI에게 원하는 바를 명확히 요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더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학습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겪는 경험의 총체에 기반한다. 여기서 경험이란 읽고 쓰는 것을 포함해, 세계와 상호 작용하는 모든 활동을 뜻한다. 반면 거대언어모델(LLM)이 학습하는 데이터는 이 경험의 총체와 거리가 멀다. 표정과 목소리의 질감, 찰나의 시공간이 주는 감각, 신체 내부의 주관적 느낌 같은 '몸의 경험'은 기계 학습 데이터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AI는 수만장의 사진으로 만년설 덮인 알프스를 정의한다. 그러나 인간은 소설 속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자신의 감각을 총원원해 저마다 알프스를 '생성'해 낸다.
멀티모달 모델과 피지컬 AI가 이 간극을 좁혀가고 있지만, 신체를 통과하는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2023년 스웨덴 정부가 6살 미만 아동에 대한 디지털 교육 의무를 폐지하고 종이책과 손 글씨 교육으로 돌아간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신체를 경유하는 경험 없이는 사고의 근육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기술 일체를 거부하자는 말은 아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자동화가 가져오는 '과정의 소거'이다.
응용언어학자 김성우의 논의를 빌리면, 읽기는 타자의 세계가 나를 뒤흔드는 사건이며, 쓰기는 그 충격에서 맞서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외부의 텍스트, 타인의 사유, 세상의 자극이 내 몸과 정신과 부딪혀올 때, 이를 밀어내거나 받아들이며 길러지는 저항이 힘, 그것이 사고의 근육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AI의 생성과 인간의 생성을 구분한다.
인간은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저항이 팽팽하게 맞서는 긴장과 순환 속에서 어제와 다른 존재로 생성된다. 반면 생성형 AI는 이 과정을 단숨에 건너뛴다. 프롬프트로 결과를 얻는 행위는 사고의 근육을 키울 기회를 스스로 줄이는 일과 가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AI로 대량의 텍스트를 생성(generation)하고 있지만 정작 인간은 스스로가 변화해가는 '생성(becoming)'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에 근대 교육의 해묵은 문법이었던 '지덕체'의 순서를 '체덕지'로 뒤집어보면 어떨까? 몸을 움직여 감각을 깽고,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것 '체'가 먼저라는 거다. 그 위에서 관계를 맺으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며(덕), 비로소 사고를 깊이 다듬는 '지'가 뒤따라야 한다는 거다.
아직도 이 전환을 가로막는 가장 견고한 벽이 입시이다. 입시는 모든 교육을 결과로 환원한다.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교실 현장에서 결과물과 함께 프롬프트를 제출하는 방식까지 논의되고 있지만,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경쟁일 뿐이다. 입시라는 견고한 현실을 단번에 허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틈새에서 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효율성이 가치를 압도하고 생산성이 과정을 지우는 시대일수록, 되씹고 숙고하는 인간의 '느린 학습'은 더욱 소중하다.
4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왜 써야 하는가를 고민해 본다. 송혜교 <홈스쿨링생활백서> 대표이며 작가의 글을 읽었다. 2025년 6월, 챗지피티(ChatGPT) 서버에 오류가 생겨 몇 시간 동안 접속 장애가 이어졌다. 그날 SNS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라는 불편의 글이 쏟아졌다. 한편,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한 많은 학부생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부정행위를 벌이다 대거 발각되기도 했다. 여러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며, 사람들이 AI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AI가 우리의 일상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학생들은 ‘공부'라는 행위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AI는 과제의 방향을 잡아주고, 개념을 설명해 주며, 에세이를 술술 써주는 뛰어난 비서다. 지난해 9월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의 91.7%가 과제나 프로젝트에 생성형 AI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지난해 10월 <진학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고등학생 응답자 중 96.5%가 수행평가에 AI를 활용한다고 답했다.
AI 네이티브 세대의 출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깊이 있는 사고나 논리적인 글쓰기를 전부 AI의 몫으로 넘겨버린다면, 학업 수행이나 소통 능력이 오히려 퇴화할 거라는 지적이다. 혹자는 이를 자연스러운 인류의 발전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몇 시간에 걸쳐 써야 할 글을 AI는 단 몇 초 만에 써내고, 몇 백 페이지 분량의 논문도 순식간에 300자로 요약해 준다. AI의 발전으로 인간이 직접 통·번역하는 일이 줄어들었듯, 이제는 인간이 직접 읽고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다는 관점이다.
OpenAI의 CEO 샘 올트먼은 자신과 같은 AI 업계의 리더조차도 이 기술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역량이 있다. 바로 AI 리터러시다. AI는 종종 사실과 다른 정보를 그럴듯하게 제시하며, 사용자의 기대에 맞춘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이에 유네스코는 AI 보고서를 통해 비판적 사고와 판단 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럽연합(EU)이 제정한 AI 법을 살펴보면, 사람이 AI의 출력에 과하게 의존하게 되는 ‘자동화 편향성’(Automation Bias)의 위험이 명시되어 있다. AI 리터러시란 AI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책임감 있게 활용하는 능력이다. 읽고, 의심하며, 비교하고, 재해석하는 것. 이는 결국 비판적 글쓰기와 맞닿아 있다. 역설적이게도, 초인공지능 시대의 돌파구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글쓰기에 있는 셈이다.
많은 사람이 글쓰기의 목적은 글을 완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자신을 증명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글쓰기의 수많은 용도 중 하나 일 뿐이다. 글쓰기의 가치는 생각을 정리하고, 근거를 찾고, 자신만의 논리를 쌓아 나가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AI는 도구일 뿐, 영원히 글쓰기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미국의 작가 조앤 디디온은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 <Why I Write>를 통해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쓴다." 50년이 지났지만, 그 의미는 전혀 퇴색 되지 않았다. AI가 모든 문장을 대신 써 주는 이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글을 쓰며 생각하는 존재다.
5
오늘은 사순 제5주간 토요일로 말씀은 <요한 11,45-56>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다" 이다.
그때에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살림과 죽임>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1-53)
너
있어
나
있기에
너를
있게 하려고
없어지려는
나는
나 또한
있게 할 것이요
너
없이
나
없기에
너를
없앰으로써
있으려는
나는
나마저
없앨 것입니다
6
나 자신을 정돈하기 위해 실제로 가야 할 자리와 정결하게 할 것은 무엇인가요?
⠀
2026/3/28/사순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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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1장 45-56절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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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의 장소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의 정결을 준비합니다. 파스카는 하느님 앞에 다시 서기 위해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시간과 수고를 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정결은 마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삶의 자리를 옮기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자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선택이며,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 삶을 다시 배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순 시기도 이와 같은 움직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하느님 앞에 다시 서게 만드는 방향을 정돈하기 위해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불편과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묻는 시간인 것이죠. 이 시기가 그저 반복되는 절기가 아니라 나의 삶을 재배치하는 실제적인 여정이 되기 위해, 나는 어떤 떠남을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정돈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언제나 편안하지 않지만, 그 길 위에서만 우리의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참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 나를 하느님 앞에 다시 서게 만드는 방향을 정돈하기 위해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 어떤 불편과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묻는 시간이어야 한다.
7
2026년 3월 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제 내일이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의 고요한 참회는 끝나고, 이제 주님의 수난이라는 거대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폭풍의 도화선이 된 유다 지도자들의 모임의 결정적 순간을 보여줍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냉혹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민족 전체가 로마의 탄압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정치적 이익과 생존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을 놀라운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자기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한 마음으로 던진 돌조차,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디딤돌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우리 삶에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악재나 타인의 악의조차, 결국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는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간절한 꿈을 전합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에제 37,22). 죄는 본질적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나와 하느님을 갈라놓고, 이웃과 나를 갈라놓으며, 내 마음조차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랑의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요한 11,52)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미사와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유는,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회의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잠시 유다 광야 가까운 곳 에프라임으로 물러나 제자들과 머무십니다. 폭풍 전야의 고요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서 도망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마지막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성주간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도 에프라임으로 물러나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란과 비난, 분주한 계획들에서 잠시 손을 떼고 주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일부터 시작될 처절한 사랑의 길을 주님과 함께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효율과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시키십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그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흩어놓는 걱정은 무엇인가요? 여러분과 이웃 사이를 갈라놓는 미움은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의 흩어진 마음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당신의 품 안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 안으로 다시 모으고 싶어 하십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성주간, 그분의 '하나 되게 하시는 죽음' 속으로 우리 모두 함께 경건히 걸어 들어갑시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화답송).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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