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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연대의식이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새해의 시작인데, 새해 같지가 않다. 작년에는 새해라는 말 대신에, 다시 시작하는 기회로 생각하자면서,  '새로워진 해'로 말하고 싶다고 했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달라졌다. 더 슬픈 것은 우리 사회의 아픈 곳부터 곪아 터진다. 어제에 이어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 가족』를 통해 우리 사회 가족의 민 낯을 살펴보고, 인식의 전환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를 정리하고 공유한다.  

이 글을 쓰는 아침에도 이런 보도가 있다. "수원 아파트에서 세 모녀 숨진 채 발견". 43세의 엄마가 자살하면서 13세와 5세의 두 딸도 흉기에 찔려 숨졌다는 것이다. 원인을 가정불화로 추정하는 데, 좋다. 그러나 왜 아이들까지 살해하느냐는 문제이다. 마침 오늘 '동반 자살'이라 아픈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그리고 국회서는 이제야 '아동학대 무관용 처벌법'을 발의했다고 한다. 아동 학대 의심 가정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와 의심 신고 시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아동을 분리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정신의학과 정혜신 전문의는 "모든 관계에는 나도 있지만 너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관계의 정의는 변함없이 그렇다. 아이와의 관계도 예외일 수 없다. 한쪽으로 기운 관계는 말만 관계이지 실상은 폭력이다. 갑을, 남녀 관계 등에서  이 명제를 적용하는 사람은 이제 많아졌지만,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지난 3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이후, 전 국민이 아동학대 공분하고 있다. 이럴 떼일수록 전국민이 다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되 묻는 시간이 팔요 하다. 그런 측면에서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은 의미 있는 책이다. 『사람, 장소, 환대』 라는 책을 쓴 인류학자 김현경은 "출생기록이 철저히 지워져서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입양인들,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왔지만 경찰에 의해 다시 부모에게 돌려보내지는 아이들, 그리고 행복해 보이지만 마음 속은 상처투성이인 '정상 가족'의 자녀들, 이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말하였다.

오늘 아침은 우리 사회에서 곧잘 듣는 '일가족 동반자살'이란 말의 모순 이야기를 한다.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히 발생하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도 그렇고 이렇게 부르는 것 속에는 아이를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 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행이 배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지금도 한국의 언론은 '동반자살'이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관행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동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자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이런 규정을 학습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연대의식이다. 연대는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 중 하나이다. 자유, 평등, 박애. 이 박애가 연대 정신이다. 프랑스어로 la solidarité라고 한다. 우리는 그냥 연대,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른다. 그냥 참여 연대, 문화 연대 등을 생각하며 부정적인 시민 단체로 의식화 되어 있다. 연대(連帶)의 사전적 의미는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리고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이다. 이런 팬데믹 사건을 보면, 정말 우리는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았다. 내가 아무리 방역을 잘 하고, 위생에 철저해도, 한 쪽에서 뚫리면 모두가 다 위험한 것을 보지 않았는가?

프랑스에서는 이 연대정신을 서로 우리는 형제라는 '박애' 정신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박애'를 '형제애(la fraternité)'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5년 전에 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 오늘 올라왔다. "연대는 이런 거다." 남극의 황제 펭귄들의 허들링(Huddling: 알을 품은 황제 펭귄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체온으로 혹한의 겨울 추위를 견디는 방법)에서 배운다. 남극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한파와 시속 100㎞가량의 눈 폭풍이 몰아치기 일쑤다. 두 발로 알을 품은 황제펭귄들은 무리를 이뤄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으며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2~3시간 간격으로 이동하는 ‘허들링’으로 생존을 유지한다. 무리 안쪽은 바깥쪽보다 10도가량 높다. 그럼에도 ‘나만 살겠다.’고 안쪽을 고집하는 황제펭귄은 없다. 바깥쪽에서 눈 폭풍을 온몸으로 막아낸 황제펭귄들에게 안쪽 자리를 망설임 없이 내준다. 공생을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자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다. 황제펭귄들은 그렇게 두 달을 버티며 남극의 봄을 맞는다.

한 수도원에 찾아온 나그네가 원장 수도승에게 물었단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춥고 어둡답니까?” “아집과 교만을 불태우고 버려야만 세상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겠지요.” 나그네는 더 궁금해졌다. “나를 불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자서는 결코 불탈 수 없지요. 여럿이 함께여야죠. 짐을 풀고 우리랑 같이 지냅시다.” 나그네는 그날로 한식구가 되었단다. 그래 오늘 아침은 따뜻한 시 한 편을 공유한다. 사진도 지난 가을에 내가 애정 하는 교장 선생님의 갤러리에서 찍은 것이다. 그날 우린 야외에서 <새통사> 모임을 했다.

함께 혁명을 꿈꾸는 시인의 이야기 같지만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를 소개한 임의진은 이렇게 읽는다. “몸을 맞대고, 엉겨 붙어 짱짱하게 단합하면 장작불은 활기를 되찾아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리 갑이 설쳐대는 세상이라도 을이 작심하고 의기투합하면 모래시계를 뒤엎듯 크게 한번 판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들 불꽃이 되어….”

덤: 매년 초에는 비엔나 음악회가 끝나면,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한다. 그런데 올해는 소식이 없다. 2009년 공연을 유튜부 다시 듣고, '진짜' 2021 신축년을 출발하고 싶다. 공유한다.
https://youtu.be/zLiLLCMuiOg


장작불/백무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서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 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 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 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 붙지 않으면
쓸모 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도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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