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3일)
어제는 일본의 지진 장면과 야당 대표의 살해 테러 사건을 보면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마침 어제 오전에 김영민 교수의 좋은 칼럼,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을 읽으면서, 살아 남는 것이 기적이고, 잘 살고 있는 그 자체가 행복이란 생각을 했다. 칼럼 제목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기적입니다'였다.
우리는 사고와 재해와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생존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지난 연말에도 가자지구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 나갔다. 이 시각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간신히 모면한 생존자들이다. 국내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출생, 노인 빈곤, 자살에 있어 최악의 선두를 다투는 나라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살아남고 있었다. 근원 모를 전염병으로부터, 느닷없는 재해로부터, 예고 없는 불운으로부터, 돌발적인 사고로부터 살아남고 있었다. 다들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지진이 없는 곳에서, 테러를 당하지 않은 것에 위로를 해야 했던 거다. 정말 어제 혼자 생각한 것이, 요즈음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이 기적이고, 지금 살아 있음도 기적이라는 거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정리를 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1. 각종 사고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갈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일상을 버틸' 건강이 유지되어야 한다.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죽음으로 인해 신체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 바로 삶이라 했다. 몸을 홀대하면, 결국 내장과 사지의 기능이 저하되고, 삐걱거리고, 잘 돌아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 팔다리가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던가? 팔다리를 몸에 잘 붙이고 있으려면, 방심하지 않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혈기 넘치는 사람들은 이 안간힘을 잘 모르겠지. 그러나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그들에게도 신체의 위기가 올 것이다. 실로 삶이란, 신체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다.
정신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 삶이기도 하다. 정신이 분열되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도 안간힘을 써야 한다. 자칫 감정에 압도되어 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이성에 집착한 나머지 감정을 무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갇혀 마음의 탄력을 잃어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균형 감각을 헌신짝처럼 갖다버려 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코올과 타성에 젖어 총기를 잃어가는가? 뇌 잃고 두개골 고치려 들면 이미 늦는 법일 수 있다. 저렇게 되지는 말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기억력인들 멀쩡할까? 자칫 실제의 기억은 사라지고, 가공의 일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로 삶이란, 정신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다.
2. 고생스럽지만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고 여가를 확보해야 한다.
사고와 재해와 전쟁으로부터 살아남고, 일상을 버틸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이제는 자본과 과로가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밥을 벌어먹어야 한다. 누군가 인생을 대신 살아주어도 문제다. 그러면 심신의 기능이 퇴화하기 시작할 테니까.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노동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진행된다. 어쨌거나 현재 이곳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 통제하거나 끝내 길들이는 데 실패하고 남은 것이 삶이다. 일터에 나가 스스로를 시스템에 길들이고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게 삶이다. 그 작고 여리고 몰캉몰캉한, 그러나 과로에 너덜너덜해진 삶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3. 기득권 세력이나 권력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권력인들 당신을 가만히 두겠는가. 이 세상은 기운이 뻗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지배하는 법. 이 세상의 주인은 대개 외향적인 사람, 나대는 사람, 적극적인 사람, 사교적인 사람, 성취 지향형의 사람들이다. 그들 덕분에 이 세상이 돌아간다. 고맙다. 그러나 그중 과욕의 권력자들은 무의미한 행사에 당신을 동원하려 들 것이다. 쉬지 않고 새로운 의제를 제시할 것이다.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꼬드길 것이다. 설문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권력이 이루어낸 유무형의 성취를 인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열성적으로 박수치라고 요구할 것이다. 까다롭게 굴지 말고 따라오라고 요구할 것이다. 부당한 요구에는 저항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저항하는 와중에도 당신의 시간은 소진된다. 때로는 싸울 가치도 없는 상대에 저항하느라 낭비하는 게 삶이다.
4.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거피취차(去皮取此)'의 정신으로, 이념이니 관념 따위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김영민 교수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로 예를 들어 주었다. 이 소설에는 보통 인간의 삶에 무관심한 승려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세계대전에 끌려가지도 않았으며,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으며, 금각사(金閣寺)라는 절에 소속되어 있기에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지 못한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관심이 결여되어 있으니까. 학교 성적도,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가난도, 이성의 유혹도, 조국의 패전도 그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아름다움에 있다. 들꽃의 아름다움이나 저녁놀의 아름다움이나 미인의 아름다움이나 수공예의 아름다움이나 일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초월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다. 공감이니 평등이니 공정이니 동정심이니 우애니 하는 세간의 덕목으로부터 영향조차 받지 않는 궁극의 아름다움, 그러기에 무익한 아름다움, 무익해서 더 찬란한 아름다움. 거기에 관심이 있다.
문제는 초월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한, 그는 일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어느 순간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지, 먹고 싸고 입고 엎어져 자는 일상에서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일상의 삶이란, 결국 나아가고 쌓아 올리고 생산하고 욕심내고 획득하고 소비하고 부패하다가 결국 덧없어지는 모래성 같은 것이다. 그가 열망하는 아름다움은 그러한 잡다한 일상을 넘어서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그것이 바로 그가 상상하는 ‘금각사’다. 그러한 금각사 혹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구구절절한 일상의 삶을 정지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고 나서야 주인공은, 이제 살아야 겠다고 결심한다.
누구나 한때 찬란한 아름다움에 눈부셔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다들 각자의 금각사를 불태우고 마침내 범속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란 과연 실재했을까? 마치 상상의 금각사처럼, 그 아름다움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 잠든 밤에 조용히 내린 첫눈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들었기에 그 눈을 보지는 못하고, 다만 꿈에서 그 눈발을 본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은 실재하는 것인가? 깨어나면 눈은 이미 그쳤고,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더러워지기 시작한 눈을 쓸고 치우는 일만 남았다. 쓸고 치우는 일, 그것이 삶이다. 정작 젊었을 때 젊음을 의식하기 어렵듯이, 아름다웠던 순간에 아름다움을 의식하기는 어렵다. 결국 지나간 아름다움의 잔해를 꼼꼼히 치우는 게 생존자의 몫이다. 이제부터 일상에서 눈을 치워야 한다.
올 한 해도 경황없이 출근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잔병치레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면서 늙어갈 것이다.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과 맞서야 하는 생명체가 인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니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것인가. 올 한해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금각사가 아니라, 오욕칠정으로 뒤범벅이 된 삶이라는 피고름이다. 따라서 삶이란, 심신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일 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죽일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그 길을, 김영민 교수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될 때, 더 이상 행동하지 않아도 될 때, 마침내 오늘의 눈을 다 치웠을 때, 정신적 삶의 순간이 온다고 했다. 상상이라는 이름의 고요한 시간이 온다는 거다. 이 상상은 비(非)권력자의 것이다. 권력자들이 현실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성대한 행사를 개최할 때, 소소한 개인들은 마음속에서 상상의 건축물을 세우고 상상의 축제를 개최한다. 그렇게 상상된 삶이야말로 지성을 가진 생물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사는 것은 살아지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 것이야말로 창조하는 것이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세계는 권력자 것일지 몰라도, 삶만큼은 상상하며 읽고, 상상하며 쓰고, 상상하며 말하는 개인들의 것이다. 올 한해도 상처 입은 삶을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 볼 그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삶이 삶을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이 삶이다. 삶은 ‘상상하는 개인’들의 것이라 했다. 어쨌든 어제 일본의 지진과 야당 대표의 테러 사건을 보며 살아 남아 있는 것이 기적이지만, 동시에 살아 남도록 투쟁하여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란 생각을 했다.
언젠가 썼던 내 시를 공유한다. 그 길을 1월 1일 아침 금병산 노루봉에서 보았다. 그게 오늘 아침 사진이다. 어두움을 이기고 오른 노루봉에서 아침의 빛을 만났다. 일단 포기하지 말고, 올라야 한다. 순간 순간 힘이 부치고, 숨이 가파도 오르다 보니 '새로워 진' 해가 비추었다.
길/박수소리
道在邇 而求諸遠
도제이 이구제원 (맹자)
길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이것을 먼 곳에서 찾으려 한다.
먼 곳에서 길을 찾는 것보다,
일상적인 생활 주변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진리도 삶의 기쁨도 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去皮取此거피취차 (노자)
저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자.
노자도 저 높은 곳에 있는 이상을 추구하느라 애쓰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이곳의 일상에서 삶의 행복을 찾자고 한다.
일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두 가지이다.
두 가지 일이 일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우선 해야만 하는 일에 일단 달라붙어, 일의 앞 뒤를 우선 나름 익히고,
싫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다 보면, 일의 리듬이 생기고,
거기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해야만 하는 일이 하기 싫은 것은 우리의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게으름이다.
게으름의 속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게으름을 그대로 두면, 그냥 흐른다.
이 흐름을 막아야 일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일의 리듬 속에서.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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