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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운(運)'의 세계에서 '명(命)'의 세계로 건너 가기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상이 모두 단절되어,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든 것 때문인지 새벽에 일어났다. 그래서 만난 시가 이정하 시인이다. 그리고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 가기" 12월의 책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새벽에 다 읽었다. 조지 오웰은 필명이고, 진짜 이름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소설의 내용은 최교수가 12월의 책으로 선정 발표할 때의 글로 대신한다. 글이 아주 깔끔하다.

“농장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독재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늙은 수퇘지 한 마리가 인간의 야비함을 지적하며 혁명을 호소하자 동물들은 분노에 휩싸여 혁명을 일으키고 인간들을 축출한다. 동물들은 ‘동물주의’로 뭉쳐 평등한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 하지만, 돼지들이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 세운 규칙마저도 지키지 않는 특권층이 되어, 동물주의 사회는 결국 독재 사회로 전락한다. 독재로의 변질을 막기에는 다른 동물들이 너무 무지하였고, 지도자에게 너무 쉽게 현혹되었다. 인간의 독재를 뒤집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동물들의 혁명 정신은 돼지들의 선민의식과 일반 동물들의 무지가 얽혀 인간이 지배할 때보다도 더 심한 착취가 가해지는 독재로 회귀하였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정치가 사라지고, 철저하게 정치공학만 남아 있다. '그들 만의 리그'로 전락한 지 오래이 다. 출구가 안 보인다." 사실 우리의 삶은 정치적 행위로 표현되고, 정치를 벗어나는 사회적 행위는 없다. 정치가 기능주의에 빠져 있다면, 기업이나 교육을 포함해서 사회 전체가 기능주의 빠져 있을 것이다. 실재 우리 사회가 그렇다. 이러면 정해진 것을 넘어서서 아직 오지 않은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이 어렵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계층 이동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는 사회가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동하지 않는 사회는 굳어지고, 틀에 갇히고, 기능주의 빠지며, 꿈을 상실한다. 지옥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혁명(革命)이다. 즉 명(命)을 바꾸어야 한다. 내년의 나의 화두 '운(運)'의 세계에서 '명(命)'의 세계로 건너 가기이다. 우리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운'에 의해서 장악되게 되어 있다. 내가 특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이 부모의 DNA와 철학을 전수 받아서 삶을 시작하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이 뽑아준 제비 뽑기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그 결정은 '운'이고, 이 '운'을 넘어 '명'으로 전환시켜야 진짜 '위대한 개인'이 된다. '운'에서 '명'으로 건너가기를 해야 한다. 삶이란 '운'에 의해 결정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유인 사명과 목적(命)을 깨닫고 이 '명'을 삶의 원인으로 삼아서 자신이 자신 삶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으로 완결된다. 신이 뽑아준 제비 뽑기에 의해서 결정된 '운'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설정한 목적과 사명에 따라 주체적이고 고유한 삶을 만들어갈 때 비로소 '운'에서 벗어나 '명'이 결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명'은 동시에 시대 의식이고, 비전이고. 어젠다이고, 틀이고, 방향이다. 새로운 명으로 무장하여 벽을 넘지 못하면, 과거의 혁명 깃발은 모두 '완장(腕章)'으로 바뀌고, 결국 이전투구에 빠지게 된다.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완장을 차는 것처럼 말이다. 완장들은 자기들이 해왔던 말만 계속 해대며 핏대를 세운다. 새로운 시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만 늘어놓는다. 그런 차원에서 <동물농장>을 단숨에 다 읽었다. 소설의 길이가 길지 않다. 이 소설에 대한 리-라이팅은 다른 날 아침에 하겠다. 12월 30일 저녁 7시에 유튜브를 통해 <동물농장>에 대한 "라이브 북토크"가 있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하는", "저 맑은 종소리"같은 책을 읽고, 쓰기를 해야 한다. <동물농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아빠"라고 외치던 양이, 나중에는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아!"라고 외친다. 두 다리와 네 다리의 차이는 두 발로 서면서, 손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이 손으로 쾌락과 중독에 빠지느냐, 지성과 영성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두 다리도 나름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이다. 두 발로 선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두 발로 서게 되면서, 우리의 시선은 하늘, 두 다리는 땅에 안착하게 되었다. 두 발 서서 보는 하늘은 무한하고, 무상하다.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두 발이 딛고 있는 땅은 구체적이고 리얼하다. 이것이 생활의 원리이다. 이 사이에서 '균형 맞추기"가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땅에만 들러붙어 있으면 중력에 사로잡힐 것이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공중 부양되고 말 것이다. 중력의 구심력과 하늘의 원심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일상이 튼실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 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 이것이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다. 어제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를 다 읽었다. 다시 한 번, 사유하며 다시 읽을 생각이다. 많이 배웠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인 것도 고미숙에게서 배운 것이다. 세 개의 형용사를 다시 한 번 더 되 뇌인다. 고귀하게! 명료하게! 거룩하게! 그리고 오늘 아침 사진처럼, 국민은 깨어 연대하여야 한다. 까치처럼, 함께 뭉쳐야 한다. 뭉친 국민들의 숫자가 판 검사 수들보다 훨씬 더 많다.

한밤에서 새벽까지/이정하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이어지는 글은 한국 정치 현실을 이야기 하는 글이다. 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만 읽기 바란다. 나의 혼란한 상태를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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