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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힘들다고 피하는 건 삶을 사는 자세가 아니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2월 24일)

올해 성탄절을 맞아 가장 큰 바람은 모두가 주변에 외로운 이들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웃이나 잊고 지낸 친구, 친척들에게 전화나 문자메시지 등 연락을 취해보라. 외로움을 이겨낼 가장 큰 도움은 다른 인간이 줄 수 있다. 산타클로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풀었던 성 니콜라스 주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산타 클로스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검은 옷을 입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추운 겨울에도 콜라를 많이 팔기 위해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광고 모델이란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코카콜라의 상표 색깔이고,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징한단다.

기업의 이윤 추구에서 탄생한 산타클로스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프랑스어로는 뻬르 노엘(Pere-Noel)이라고 한다. Santa Claus(산타 클로스)는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인 성 니콜라스의 별칭이다. 그는 자선심이 지극히 많았던 사람으로 후에 미라의 대주교가 되어,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의 생전의 이런 자선행위에서 유래하여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중세 교회가 특권을 누리며 부와 권력, 사치에 빠져 있을 때 성인 프란체스코는 복음으로 돌아가 청빈과 겸손의 삶을 살면서 교회의 모습을 되돌리는 초석이 됐다. 산타클로스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3세기 터키의 니콜라스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돌 봐주는 삶으로 성자의 호칭을 받았다. 금년에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조금은 차분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다. 조용해지면 작은 소리도 잘 들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있어’ 찾을 수 없던 생일 주인공을, 그의 흐느낌 소리로 어쩌면 쉽게 찾을지 모른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인해 산타 클로스가 1월 2일 이후에 온다고 한다. '거리두기'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배철현 교수는 거리두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이다. 나는 이 말을 '물리적 거리 두기'로 바꾸었으면 한다. 두 번째는 '다른' 자신의 삶을 응시해 군더더기가 없는 삶으로 전환하는 '생활 속 거리 두기'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이 '수동적인' 거리두기는 개인의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을 통해서만 성공한다. 배철현 교수가 말하는 개인의 '생활 속 거리 두기'란 자신의 언행을 깊이 관찰하는 '자기 응시'가 필수다. 인간은 어제의 습관대로 오늘 행동하기 마련이다. '생활 속 거리 두기'란 그런 어제의 삶을 지속하고 연명하려던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보는 행위다. 그런 과거의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천천히 복기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언행을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심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아침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도 한다. 이브는 전야(前夜) 또 전일(前日)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흔히 영어 evening이 줄어 eve가 된 것으로 특별한 날의 전날 저녁을 뜻한다. 그냥 넓게 사용하여  하루 전날을 가리키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머물기 위하여 인간(예수, 그리스도)이 되어 오셨음을 축하 드리는 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마누엘(Emmanuel)"을 외친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일년 동안 제 글을 함께 해주시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이와 모든 것들에 다 시 또한 번 외친다. "임마누엘".'

세계가 생일을 축하하는 그 분의 이름이 몇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이다. 여호와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이다. 이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다. 이것은 천사가 미리 알려준 이름이고, 예언자 이사야가 알려준 이름이다. 그 뜻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과 바로 지금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 죄인들과 함께 계시며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어린 예수를 '구세주(메시아)'라 부른다. 당시 로마가 자신들의 지배를 통한 평화를 위해 '팍스 로마나'를 외칠 때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짬짜미로 돈만 버는 언론들과 법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소위 '법 쟁이'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기 예수는 이것들이 '엉터리 평화'임을 목숨 걸고 저항하셨기에 우리는 그를 구세주라 부른다. 그 아기 예수가 오늘 밤 다시 오신다. 우리가 이 아기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임마뉴엘'을 외치며 경배하고 축하드리는 것은 진짜 평화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렇게 낮게 오신 아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우리는 '황금률'이라 한다. 엄청난 rule(규율)인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이를 대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다른 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환대하라. 오늘 내일만이라도 그 사랑을 내 일상에 가득하게 하고 싶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는 평화, 나에게는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라는 메시지이다. 그동안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았다면, 오늘 나를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지라는 날이다. 올해는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다. '영(靈) 택트'.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말로도 우리는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생긴다. 빨리 코로나-19를 잡아,이전의 평화로운 일상이 회복될 거라는 희망을 본다, 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Spero!~~, Spera!~~ 나는 희망한다! 여러분들도 희망하세요!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다. 유대인은 로마제국의 식민으로 절망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19로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절망을 이기는 생존 장비인 희망이 필요했다. 그 희망의 이야기가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로 승화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하다. 그래 오늘 아침은 이해인 수녀님의 <성탄 편지>를 공유한다.

성탄 편지/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아침에 최종수 신부님의 강론을 읽었다. "한 사람에게서 십자가를 볼 수 있다면 감사드릴 일입니다. 기구한 팔자, 한 사람의 일생이 가시밭길처럼 험난한 여정이지만 그 여정을 자기 십자가라 여기고 묵묵히 지고 가는 신앙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그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삿대질 하고 등 돌리며 돌아설 때도 있었겠지만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장자는 바르게 사는 길로 "영녕(撄寧)"을 제시했다. '영녕', 참 어려운 말이다. 우선 텍스트를 공유한다. "삶을 죽이고 초월하는 자는 죽지 않고, 삶을 살려고 욕심내는 자는 잘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도(道)는 만물에 대하여 보내지 않음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음도 없으며, 또 파괴하지 않는 것도 없고 이룩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를 영녕(撄寧)이라 합니다. 영녕이란 어지럽게 변화가 있는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이 '영녕'을 강상구는 '얽혀 살기'로 풀었다. "영령이란, 얽혀 살다 보면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은 힘들다고 피하는 건 삶을 사는 자세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람 없다고 포기하는 것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보낸다는 의식도 없고 맞이한다는 의식도 없다. 뭔가 만들어낸다는 의지도 없고, 뭔가 부순다는 의지도 없다. 그저 세상에 얽혀 사는 것이다. 얽혀 살다 보면 어느새 뭔가가 이뤄져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영녕'이란, 세상에 얽혀 살되 세상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을 버리면서 자신을 되찾는 길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군자 역시 궁할 때가 다 있습니까?"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대답한다. "군자는 곤궁함을 견디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나쁜 짓을 한다." 이를 "군자곤궁, 소인궁사람의(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라 한다. 군자는 역경을 겪을수록 더 강해진다. 그러나 소인은 재물을 잃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혼비백산한다.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기 때문에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넘쳐난다는 말은 강물이 길을 따르지 못하고, 제 갈 길을 잃어버린 거다.

비슷한 이야기가 <<장자>> 외편 "산목(山木)"에도 나온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 안회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노래나 부르고 있는 스승이 속으로는 답답하지만 차마 뭐라 말은 못하고 걱정스레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공자가 먼저 안회를 다음과 같이 안심시키려고 말한다. "하늘이 주는 손해를 받지 않는 게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주는 이익을 받지 않는 게 어려운 일이다. (…) 세상 일이라는 게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는 법이다. (…) 만물의 변화가 끝이 없지만 어디서 바뀌는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 끝을 알며, 어떻게 그 처음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바른 자세를 지키며 기다릴 따름이다." 원문은 이렇다, 無受天損易(무수천손이) 無受人益難(무수인익난) (…) 무시이비졸야(無始易非卒也) (…) 正而待之而已耳(정이대지이이이)."

공자가 말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은 "처음도 모르고 끝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저 지금 이 순간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그게 장자가 말하는 영녕, 즉 '얽혀 살기'가 아닐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생각한다. 신들은 영원한 노동을 명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 그것은 처벌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끝없는 좌절에 절망한다면 치명적인 처벌이다. 그러나 끝없는 좌절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데에서, 끝없이 도전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무궁무진한 기회이다. 그러니까 순간의 최선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과거는 바꾸지 않는다. 손댈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 뿐이다. 바로 지금 뿐이다. 오늘도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를 딸과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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