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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熟, 成熟, 熟考에 대한 공학적 해석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熟, 成熟, 熟考에 대한 공학적 해석

우리 동네는 특별한 業을 가지신 분이 있다. 바로 인문운동가 박한표 유성 우리마을대학   학장님이시다. 스스로 '인문운동'이란 業을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매일 아침 <시 하나 사진 하나>를 통해서 業의 기본에 대한 실천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다양한 '틈'들을 메우는 많은 일들을 해주고 계신다. 참 고마우신 분이시다.  

인문운동가의 실천방법론을 말씀하시면서 숙고(熟考)라는 과정을 항상 강조해 주신다. 주옥같은 말씀과 심연에 대한 예술적 깨움을 만나는 즐거움을 주신다. 그런 말씀을 접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 특히 구체적인 방법론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熟考가 만들어 내는 인문운동가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깊은 속 뜻을, 추상을 구체화 하는, 공학적 관점에서 좀 풀고 싶어졌다.

금석학에 따르면, 考는 오래 산 사람의 깊은 생각이란 뜻이고, 熟이라는 글자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에 제물을 올리는 형상을 본을 딴 것이고 그 뜻으로 '익다', '무르익다' 등을 가진다고 풀어준다. 숙고라는 뜻에 한단계 더 깊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익히는 것', '익혀진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 걸음 더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불로 뭘 익힌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또는 어떤 대상들에 열을 가하여 물성의 변화를 초래하게 하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열을 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성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초점의 이동을 통해서, '익힌다'는 '어떤 작용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의 생성'이라는 그 뜻을 확장시킨다. 그런 확장의 방법론 상에서 제단 아래의 그냥 음식들이 제단 위에서는 제물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둔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물성의 변화, 동일한 물리적 현상에서도 다른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정신활동을 이루어내었다. 위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에게 그런 위대한 사건의 잉태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토대는 가소성을 가지는 뇌의 구조와 작동방식이다. 우리의 뇌는 끊임없는 변화를 담고 또 변화를 증폭시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생명진화의 예술적 결정판인 셈이다. 우린 아직 뇌를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하고 활용할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아직 그 한계의 끝을 아직 찾을 길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수 없을 것 같다.

뇌의 가소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熟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의 변혁을 추구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공학의 역할은 그런 熟의 변혁 구조에 대한 시각을 보태는 것이다. 아쉽게도 공학은 '이 구조'에 대한 실현행위를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이 행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을 모든 분야에 두루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런 공로는 사회학이 가로채어 간 것으로 읽혀진다.  공학은 수많은 경험을 쌓고 熟을 실현적 관점의 방법론으로 '숨김쌓기 (abstract hierarchy) 또는 계층 구조(layering architecture)라는 이름으로 정리해두고 있으나, 사회학은 熟을 계층간의 구조적 접속을 통한 창발의 생성구조(Nicklas Luhmann, 사회의 사회)로 풀어내준다.

이제 사회학과 공학의 통합적 관점에서, 熟과 熟考의 결과는 '새로운 가치를 담고있는 새로운 층'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成熟의 뜻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熟이 완성에의 도달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갈등의 존재 여부, 갈등으로 인한 불필요하게 높게 남아있는 에너지 준위의 존재 여부가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成熟의 단계를 세상의 시끄러움과는 떨어진 상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자신이 도달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 채, 아귀다툼의 현장에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팔장을 끼고 혀를 껄껄차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진정한 成熟의 단계란 세상이 낮은 에너지 준위를 갖게 하는 상태이지 개인이 느끼는 낮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가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삶들과의 교감을 즐기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멀리하며 조용하게 사는 것은 그저 자신의 도그마 속에 빠지는 것이지 成熟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