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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선행을 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한다.

35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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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되는 지난 12,3 내란 세력들의 재판을 보며, 한나 아렌트가 소환된다. 그녀에 의하면, 세 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한다는 거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을 보면서 놀란 것은 악행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치밀하게 준비해 근면하게 학살했다는 점에서)에 비하면, 그 일을 행한 자의 정신적 수준은 너무나 천박하다는 점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고 대답한다. 악행의 이유는 그렇게 짧거나 사실상 거의 없다.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악행의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높아야 만한다. 세 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악행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천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악행이다. 선을 행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거나 없다. 악은 그저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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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善行)을 일상화 하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일이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선행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가져오는 태도이자 결정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는 선행을 실천하기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행은 평범하다. 그것은 한 번의 미소로 시작한다. 이 생각은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책,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장혜경역)을 읽으면서 갖게 되었다. 여기서 얻은 개념이 '선의 평범성'이다. 행복이란 인생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종류도 참 다양하다. 행복은 금방 기분을 띄운다. 그런 행복은 빠른 행복이다. 빨리 오지만 그만큼 가는 속도도 빠르다. 그 곁에는 조용하고 나직하며 느린 행복이 존재한다. 느린 행복은 볼품없지만 대신 고장이 잘 안 난다. 문제는 느린 행복은 쉽게 '얻지' 못한다. 빠른 행복은 엄청나게 예민해서 빠르게 등락한다. 그러나 느린 행복은 윤리적 태도를 기초로 삼는다. 선행을 할 때마다, 행동과 도덕을 결합할 때마다 조금씩 빠른 행복에서 독립한다. 선행을 자주 할수록 느린 행복이 사라진다. 결핍감이 줄어든다. 불안감도 상실감도 줄어든다.

윤리와 느린 행복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오래전부터 깨우쳤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자들은 느린 행복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유데모니아) 이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전 국면을 자본이나 돈이 잠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 대부분의 직업은 소외된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소외는 삶의 본성과 괴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자신을 눌러야 하고, 맘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억지로 웃어야 하는 등, 이런 것을 우리는 소외라고 한다. 생존과 자립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그 통로에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청년에게도 좋고 노년층한테도 좋은 그런 활동을 찾아야 한다. 탈주하여 방향을 바꾸고, 배치를 다르게 하는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빛이 보인다. 그게 "우주의 원리"라 고미숙은 말하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길이 열리는 경우는 없다. 탈주하여 방향을 바꾸고, 배치를 다르게 하는 변화의 길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데모니아(eudaimonia)가 아닐까? 이 말은 좋은 삶(good life)으로 번역 될 수 있다. 이 말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는 개념으로, 단순히 삶에 대한 평가나 감정 상태보다 더 넓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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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에서 정의하는 행복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다양한 평가를 포함하는 건강한 정신 상태"라 말한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측정은 인지적 평가인 '삶에 대한 만족도', 정서적인 측면인 긍정적, 부정적 정서감, 마지막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 가치를 측정하는 유데모니아 항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이 말은 100% 다 맞는 말은 아니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최진석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에우다이모니아)도 행복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본질적인 행복과 차별되는 순간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소확행의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도니아(hedonia)'라 했다. 

행복 이야기만 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늘 시가 떠오른다.

행복한 일/노원호

누군가를
보듬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무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이 그렇고
작은 풀잎을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 준 나무가 그렇고
텃밭의 상추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가 그렇다.

남을 위해
내 마음을 조금 내어 준 나도
참으로 행복하다.

어머니는 늘
이런 행복이 제일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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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도니아는 쾌락이다.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고, 유데모니아는 명상 같은 데서 오는 행복이다. 유데모니아는 오랜 훈련과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르게 살 때만 가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의식이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위치하면 그것 때문에 더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 삶의 목적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소확행은 위에서 말한  유데모니아가 전제되어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서 여행을 즐기는 삶은 소확행이고, 열심히 일한 당신과 관련된 부분은 여행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데모니아이다. 열심히 일함을 통해 스스로 성장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여행만 다닌다는 것은 지루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소위 '불금'이 기다려지고 즐거운 이유는 주중에 유데모니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나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일 껍질을 벗기는 수고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과 같다. 자신의 수고 후에 얻은 소확행이 더 값지다. 마치 주요리를 먹지 않고, 디저트만 넘게 되는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재력과 체력 그리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유데모니아 없는 소확행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더라도 그 소확행은 결국 햇빛과 같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갈망해도 매일매일 해가 쨍쨍 뜨는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삶은 사막화되어 금방 황폐화된다. 그러니 삶의 목적을 자기 일과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성장체험인 유데모니아가 행복의 본질이다. 결혼의 경우도 두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성숙시키는 유데모니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유데모니아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혼생활은 그냥 지루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등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 명예, 권력을 획득하면 획득한 상태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몇 주 정도만 행복하다. 하지만 새로운 상태에 적응된 후에는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대치를 높이는 톱니바퀴적 성향 때문에 점점 더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해진다. 얻은 대가로 짧게 행복한 기간을 지내다 더 긴 기간 동안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톱니바퀴 효과"라 한다. 사막 효과란 말도 있다.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의 경우와 같다. 돈, 명에,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면 이것들도 매일 내리쬐는 햇볕이 되어 삶을 지속적으로 사막화 시킨다.

행복은 자신의 성장 체험과 직접 관련을 맺지만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성장체험을 한 경우에도 이어진다. 자신 때문에 세상이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상태를 구현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성장한 결과로 이런 상태가 만들어지고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이 더 활발해진다면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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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루카 복음>  16,9ㄴ-15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사이에서/상지종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감사히 품음으로써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헛되이 사로잡힘으로써
하느님을 잊습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아낌없이 나눠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악착같이 움켜쥡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서로를 살리는
선으로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악으로 썩어갑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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