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2일)
지난 9월부터 읽고 있는 책이 진도가 안 나간다. 폭풍 전야처럼, 하루 딱 빈 시간에, 그 책을 다시 잡았다.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이다. 혼돈과 질서의 경계 위에서, 진정한 '존재'로서 영웅적 행위를 갈망하고 삶이 부과하는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많은 통찰을 얻고 있다. 그 12가지 규칙들을 다시 한번 더 나열하고, 거기서 얻은 나의 생각을 적어본다.
(1) 어깨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똑바로 앉고, 서거나 걷는다. 태도의 문제이다.
(2)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 자신을 두 존재로 나누어 본다.
(3) 나 자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난다.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4)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자신하고 만 비교한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않는다. 원칙이 있어야 한다.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한다. 나 자신부터 잘한다.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택한다. 의미 있는 길은 희생이다.
(8)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나와 세상을 병들게 한다.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자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0) 의견 개진을 할 때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트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둔다.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준다.
지난 10월 26일에 이어 여덟 번째 규칙,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를 오늘 아침 마무리 한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개개인의 기만적이고 거짓된 삶은 전체주의적 사회의 전조"라 말했다.거짓말이 삶의 구조를 왜곡하다는 말이다. 거짓은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타락시킨다. 개인의 타락이 결국에는 사회의 타락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난 <인문 일기>에 말했다.
그리고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한 존재론적 시련이 배신과 기만 때문에 처절한 지옥으로 전락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부모 중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해 본다 불치병은 힘겹지만 그럭저럭 관리할 수 있는 시련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식들의 갈등이 섞이면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에 사로잡힌 자식들이 환자 머리맡에 악귀처럼 모여들어 서로에 대한 원망과 원한을 쏟아 낸다고 하면, 단순한 인생의 비극이 참혹한 지옥으로 변해 버린다.
기만과 거짓으로 팽배한 개인과 가족, 사회는 선천적 약점이나 자연 재앙이 아주 심각한 위기로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정직함은 삶과 관련된 고통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비극이다.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 비극은 존재하는 한 치러야 할 대가일지도 모른다. 한 노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치매에 걸렸는데 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된 상태였다. 남편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내의 병세가 악화될 때마다 자신을 그 상황에 맞춰갔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했다. 또 아내에게 닥친 비극을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극을 품위 있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 어머니를 보살피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상실감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 단단해 졌다.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면 인간의 회복력은 상상을 넘어선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격려가 큰 힘이 된다. 하지만 비극에 기만과 거짓이 더해지며 빚어지는 완전한 파국은 누구도 견딜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속이고, 조작하고, 획책하고, 기만하고, 왜곡하고, 축소하고, 호도하고, 배신하고, 얼버무리고, 부정하고, 생략하고, 변명하고, 과장하고, 모호하게 되 섞는 능력이 거의 무한에 가깝다. 왜 그럴까? 합리성에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절대적인 지위에 올려놓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합리성은 자체의 고유한 능력과 그 능력으로 만들어 낸 것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성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사랑한다. 그것을 드높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합리성이 내세운 이론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합리성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전체주의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해주지 못한다.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의지이다.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가능한 자아 실현을 위해 현재의 자아를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전체주의자는 개개인이 삶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전체주의적 확신이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가치 있는 미래를 설계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정할 수 있을까?
먼저 현재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모르는 것과 친해져야 한다.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남의 눈을 가린 띠끌을 나무라기 전에 자신의 눈을 가린 들보를 걷어 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안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나오니 사실 아는 것은 과거에 안 것이다. 과거에 알았다고 해서 지금도 아는 건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김연수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지금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어떤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표현하는 동사는 아마도 '산다(生)'가 아닐까? 산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미래에 어울리는 동사는 '모른다'뿐이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이 공식을 보면, 우리들 인생 문제의 대부분은 자꾸만 과거 속에서 살려고 하거나,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거나, 미래를 알려고 할 때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문제의 근원은 자신이 지금이나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주장이 흥미롭다. "미래에 대해서는 오직 모를 뿐이다. 현재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살 수는 있다. 과거는 다시 살 수 없는 대신에 알긴 안다. 하지만 이 안다는 건 지금이나 미래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여기서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잘 살려면,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아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 문제는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이 제곱으로 많아진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제자 안회의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을 대담하게 직시하고, 그것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다. 직시해야만 우리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 알고 있는 것, 의지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만큼 직시가 중요하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진실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니체는 말한 바 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알고 한다면 얼마든지 훨씬 더 좋은 것들을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난 시를 공유한다.
사탕과 사랑 사이/전순복
알록달록 치장을 유혹이라 말하겠어요
누군가 당신을 까서 그의 입속으로 녹아드는 희망 말이에요
민낯을 보이면 깨지거나 붙어버리는 사탕
제 나름의 껍데기로 치장하고 기다리죠
오랫동안 방치된 사탕은 엉뚱한 곳에 외로움을 풀어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밀봉된 사탕에게 그곳이 유일한 세상이니까요
사탕은
그를 감싼 포장이 열리기까지 그냥 수많은 사탕이지만
누군가에게 한 알로 스며드는 순간 비로소 제 매력을 풀어내죠
사탕이 사랑이 되는 순간 말이에요
사탕과 사랑을 부를 때 혀가 발랄해지는 것은
단맛을 예감한 가슴이 마중물이 되기 때문이죠
오랜 시간 기다리던 사탕은
와자작 깨무는 것보다 당신의 혀끝에서 서서히 녹기를 원해요
불멸의 사랑은 아니지만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원하죠
알록달록 사랑을 몇 개나 먹어보셨나요
혹시 굴리다 내뱉은 사탕은 없나요
함부로 뱉었던 사랑이 옷이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곤란했던 적은 없었나요
단맛을 사탕이라고 이름 지은 최초의 사람은
오미五味의 사랑을 겪어본 적 없는 단순한 사람이었을 거에요
사탕과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지만
당신을 사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지난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진순복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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