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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0월 26일)

여지(餘地)를 남기다. '여지'는 '어떤 일을 하거나 이룰,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날, 다소의 가능성'을 말한다. 어떤 것이든 다 쓰지 않고 다 가지려 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둔다면, 하늘도 나를 미워하지 않고,  귀신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끝까지 가득 채우고 다 쓰려 한다면, 안팎으로 변고와 우환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키가 커 보이려고 발꿈치를 들고 있으면, 오래 서있을 수 없고. 보폭을 크게 해 걸으면 오래갈 수가 없다." 이를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이라 한다. 멀리 보려는 욕심이 지나쳐 까치발로 서면 신체의 중심이 무너져 안정된 자세로 서 있을 수 없다. 빨리 가려는 욕심이 지나쳐 보폭을 지나치게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 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餘食贅行)",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도'의 모습은 부드럽고 조화롭고 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 것에 거스르는 것은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까치발로 서는 것은 서 있기에 불안정하고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 또한 급하고 조급함을 일으키니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는 자는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여 '도'의 모습을 거부하려는 자이다.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사람 또한 '도'를 따르지 않는 자이다.

실제로 까치발로 서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은 사람들 눈에 쉽게 띈다. 눈에 쉽게 띄지만 불안정하다. 사람이 보여주기 식의 일을 하여 다른 이의 관심을 끄는 일을 하려다 보면, 자기 의견에만 집중하고 바른 말을 하는 남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어쩌다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런 것은 결국 모두 남은 음식 찌꺼기처럼 처치 곤란한 것이고, 몸에 난 혹처럼 군더더기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도'(흘러감의 원리)를 터득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좀 더 높이 서겠다고 까치발로 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 하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기의 견해만을 내세우지 않거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우쭐대며 자만하다가 자신의 자리를 차버리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세상과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한다.

여지를 남기는 데서 여유가 나온다. 나는 '3 유'를 좋아한다. '자유, 사유 그리고 여유'. 스포츠에서도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게임을 하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 있는 집중'이다. 이 말은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목표를 보지 말고, 눈 앞에 해야 할 일만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런 거대 담론보다 눈 앞의 일에 우선 집중하라고, 팀 페리스는 자신의 책,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탁월함은 앞으로의 5분이다. 혁신이나 개선도 앞으로의 5분이며, 행복도 앞으로의 5분 안에 존재한다." 이 말은 계획을 싹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빅 픽처(큰 그림)나 담대한 계획을 세우되, 그 커다란 목표를 가능한 한 작은 조각으로 해체해 한 번에 하나씩 '충격의 순간(point of impact-테니스에서 공이 라켓과 접촉하는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눈 앞의 일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실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곧장 새로운 인생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용기가 생겨난다고 한다. 실수한 날이 지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은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겪는다. 아니 세상이 끝났다고 해도, 다른 길을 가면 된다. 신은 앞 문이 닫히면, 뒷문을 열어 놓는다. 살아 보니 그렇다.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그리고 상처 하나 없는, 한결같이 둥근 태양은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만, 커다란 상처를 갖고 있는, 일그러지기도 하는 달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묵묵히 위로해 주며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일까, 달에 마음을 비쳐 보는 사람은 많아도 태양에 마음을 비쳐 보는 사람은 없다. 달은 별들이 함께하려 하지만, 태양과 함께하려는 별은 없다. 달은 하염 없이 바라보게 하지만, 태양은 눈을 찡그리고 바라봐야 한다. 달은 자신의 흉터를 다 드러낼 만큼 솔직하지만, 다른 사람의 흉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달은 날카로워지기도 하지만, 누구를 찌르거나 베지 않고 포근히 품어준다. 달은 빛을 품고 있지만 눈부시지 않다. 태양은 사람의 옷을 벗게 할 수는 있지만, 달처럼 마음을 벗게 하지는 못한다. 달은 누구에게나 벗이 되고 스승이 된다.

빈틈없는 사람은 박식하고 논리 정연해도 정이 가질 않는다. 틈이나 흠 같은 허술함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틈 같은 여백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의 창구이다.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여백,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유이다.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 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누구나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날이 충만하고 순간순간 충실한 삶, 하루하루 들어가는 나이가 몰락의 과정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인 삶이야 말로 우리가 이룩하고 싶은 위대한 성취일 테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안타레스 펴냄)>>에서 아브람 알퍼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위대한 삶이 아니라 충분한 삶을 추구할 때, 우리 삶은 좋아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위대한 삶'이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려고 남들과 발버둥 치는 삶을 말하고, '충분한 삶'이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적당한 여유와 윤택에 만족하는 삶을 뜻한다. 위대함을 바라고 완벽함을 좇기보다 적절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비로소 행복에 이른다는 거다.

요즈음 나의 화두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충분한 삶'이 아닐까? 충분한 삶은 개인의 물질적 안온함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말하는 소속감, 즉 "지속적이고 긍정적이며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보편적 욕구"의 충족도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과 넉넉히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삶은 충분해진다.

나아가 '충분한 삶'은 좋은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불공정과 부정의로 뒤틀린 사회, 불평등을 양산하는 승자 독식 경제, 환경 파괴로 팬데믹과 기후 재앙이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에선 누구도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이룰 때 삶은 충분할 수 있다. 무한 풍요가 아니라 적절함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이 '충분한 삶'에 대한 아이디어는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의 글에서 얻은 것이다.

충분한 삶에 대한 나의 원칙은 '얻고자 한다면 먼저 버려라'이다. 수많은 결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철수하는 결단이다. 버리면 정말로 필요한 것에만 집중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라고 말하려면, 자신감과 비전 그리고 집념이 필요하다. 내가 늘 지침으로 가지고 있는 문장이다. "빈방에 빛이 들면(虛室生白, 허실생백), 좋은 징조가 깃든다(吉祥止止, 길상지지), 마음이 그칠 곳에 그치지 못하면(不止, 부지) 앉아서 달리는(坐馳, 좌치) 꼴이 된다."(<<장자>>, <인간세>) 빈방에 빛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멈춤도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 앉아서 달리는 꼴이 된다. 앉아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만 바쁘지 백날 가도 제자리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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