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0월 4일)
어제까지 추석 연휴라 차분하고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면서 어제는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에 나오는 <욥기>의 일부분을 읽다가, 장자를 소환했다. 장자는 "이상적인 인간(聖人, 성인)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사람이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이나 어떤 수단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는 궁극의 경지, 논리나 개념이나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는 절대 초월의 경지, 이른바 '없음(non-being)'의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 사물 자체는 존재하나 아직도 거기에 경계가 생기지 않은 경지, 분화하지 않아서 '하나'인 상태, 이른바 '있음 자체(有, Being-self)'인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 사물이 개체(個體)로 분화해서 각각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경지에서 살았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원숭이들처럼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밤낮 옳고 그름만 따져 '도'가 허물어지고 애착이 생겨나 아옹다옹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근원적인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진정으로 자유스럽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도대체 '절대 무(絶對 無)'의 상태에서 어떻게 사물이 생겨, 거기에 다시 구별이 생기고, 시비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했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은 원초의 정적(靜寂)에 음률을 더하는 것이어서 본래의 하나됨이 허물어져 기호(記號)와 경계(境界)가 생기고 대립과 분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원초의 정적, 원초의 하나됨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이룸이 허물어 짐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樸散則爲器, 박산측위기)"라'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본래 비(非)분화된 '도'가 분화될 때, 세상의 여러가지 구체적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원초의 세계가 분화의 세계로 바뀔 때, 거기에 대립하고 얽히는 세계, '소외'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不割)"고 하고, 또 "멈출 줄 안다(知止)"고 하였다. 멈출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세계는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 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도덕경>> 제28장과 제32장)
다시 장자로 돌아 온다. 그는 원초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사람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고,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시비를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것(庸)'에 안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를 "이우제용(而寓諸庸)"이라 표현했다.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긴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는 말이다. 여기서 '용'은 '보편적인 것' 즉 '불변의 자연'을 말한다. '우'는 '머무르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의 지혜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라'는 거다.
어제도, 섭리라는 말을 생각하며, 맨발 걷기를 하였다. 그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싸늘함이 느껴진다. 순응 해야지 어쩌겠는가? 춘하추동의 순환과 생로병사의 변화를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운명에 거역하면 질질 끌려가지만 순응하면 업혀간다는 말도 있다. 기왕 갈 바에는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서 가는 게 좋다. 순응과 받아들임이다. 그게 걷는 일이다. 그것도 맨발로.
내 일상의 종교/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좀 더 길지만, 원문을 읽으시려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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