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일기
(2021년 9월 17일)
장자는 큰 스승(大宗師)은 천지(天地)와 하나가 된 상태, 도(道)라는 '전체'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얻음과 잃음이 따로 없는 경지에서 산다. 여기서는 '산다'에 방점을 찍는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삶 그 자체로 '그냥' 사는 거다. "삶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을 외재적인 다른 무엇으로 보게 되면서 삶은 파괴된다. 삶이 대상화되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적 활동들이 목적으로 뒤바뀌어 버린다."(최진석)
큰 스승은 일찍 죽은 것이 잃음이 아니라, 늙어 죽는 것이 얻음도 아니며, 태어나는 것이 더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이 더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평안한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본받는 도(道),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도(道)야말로 가장 큰 스승이라고 장자는 주장한다. 이 번주 <<장자>>읽기는 도(道)란 무엇인가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 전에 <<대학>에 말하는 '도'에 대해 살펴본다.
<<대학>>에서 인간의 본래 정신(순수의식)은 항상 광명(光明)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물욕의 때만 벗겨내면 되는 것이다. 먼저 번잡한 생각들, 즉 잡념들을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여 하나만 생각하는 일념(몰입)으로 유도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생각 마저도 텅 비는 ‘무념(無念)’의 경지에 이르게 하면 된다. 거기에서 본래 정신이 완연히 드러나며, 광명한 ‘지혜’가 나온다. 그러니까 도(道)는 본래 밝은 정신을 후천적으로 다시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일 먼저 마음이 안정되어야 본성이 밝아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止-定-靜-安-慮-得 (지-정-정-안-려-득)” 패턴이다. 그러니까 멈추고-정한 다음-고요한 상태로 있으면-편안해진 상태에서-염려를 하면-답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두 가지의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1) 견문지(見聞知): 보고 들어 아는 인식 능력 (2) 본연지(本然知): 사물을 꿰뚫어 아는 직관력. '본연지'는 우주 간에 존재하는 ‘무형의 대원칙’을 직관할 수 있는 영감인 형이상학적 인식능력이다. 이는 ‘정신 수양’을 통해서 얻어진다. 예컨대, 참선법, 정려법, 묵상법 등이 있다. 견문지는 특별한 정신적 수련 없이도, ‘논리’에 맞게 추리하고, 판단한다면 그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다. '본연지'의 직관력을 배양하는 공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정신’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고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일념으로’ 거기에 생각을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3) 더 나아가 그러한 생각마저도 텅 비는 ‘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하면 된다. 그 때 거기서 ’지혜‘가 나온다.
<<중용>>에서는 “성즉명(誠則明)”이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광명 해진다.” “선천적으로 밝은 것을 다시 되 밝히는(明明)” 방법이다. 인간의 번잡하고 망상이 가득한 마음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은 '잡념-일념-무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본연의 항상 정성스럽고(誠), 항상 광명한(明) 본성을 되 밝힐 수 있다.
불가에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서 본래의 불성(佛性)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본래 광명한(本覺) ‘불성’을 가리는 일체의 어두움인 무명(無明, 불각 不覺)을 제거하여 선천적 광명함을 다시 되 밝히는 방법(시각 始覺)으로 ‘사마타’(지 止, 마음을 집중시킴)와 ‘위빠사나’(관 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앎)를 제시하며, '지관겸수(止觀兼修)‘를 강조한다.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선정해야 할 한 가지 주제로 좋은 것이 자신의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거나 기도문, 주문 혹은 화두 등 한 가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함을 통하여 잡념을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 고요한 마음이 지혜로 드러나야 한다. 물이 맑고 고요하면 산도 비치는 법과 같다. 그래야 명명(明明, 선천적으로 밝은 것을 다시 밝혀냄)이 된다. 지혜란 태양이 뜨면 만물을 훤히 비추는 것과 같다.
다음은 불가에서 말하는 정려법이다. 인간 자신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광명한 본정신(元神, 생각과 감정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을 후천적으로 다시 되 밝혀서 회복하는 것(明明), 즉 도의 실제적 공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식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이 본래의 광명함을 되찾아 하나의 티끌도 없이 광명해져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번잡한 것은 ‘광명함’이 없기 때문이다.”(송대 철학자 장횡거)
바람이 바뀌었다. 이젠 바람이 찰지다. 그만큼 9월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곧 추석 연휴로 긴 호흡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오늘 사진은 산책 길에 찍은 것이다. 나뭇잎들도 내 머리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바뀌었다/박노해
천둥번개가 한 번 치고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바람이 바뀌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늘어지고
새의 노래가 한 옥타브 높아지고
짙푸르던 나뭇잎도 엷어지고
바위 틈의 돌단풍이 붉어지고
다랑논의 벼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검붉게 익어오고
산국화가 꽃망울을 올리고
하늘 구름이 투명해지고
입추가 오는 아침 길에서
가늘어진 눈빛으로 먼 그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무더운 열기와 무거운 공기와
얼굴을 가리고 말들을 삼키고
마스크 씌워져 무감하고 무디어진
내 생의 날들이여
이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맑아지고 섬세해진 나의 감각으로
거짓과 진실을
강제와 자율을
예리하게 식별해 가야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바뀌었다
하늘이 높아졌다
그 다음 본성(本性)이 밝아지면,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니라)" "明德은 本이 되고, 新民을 末이 되며, 知止는 始가 되고, 能得은 終이 되니, 本과 始는 먼저 해야 할 것이고, 末과 終은 뒤에 해야 할 것인데, 이것을 알면 곧 道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워진다.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박재희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민생이 근본이고, 당쟁은 말단이다. 교육은 인성교육이 우선이고, 지식은 그 다음이다. 가정은 화합이 처음이고 부귀는 나중이다. 인생도 행복이 우선이고 출세는 나중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면, 도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밝은 정신의 광명을 후천적으로 다시 밝히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후, 본말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知)’라고 한다. 그러니까 ‘근본과 말단, 시작과 끝‘을 정확히 파악해 내는 것이 ’격물格物‘이며(物有本末, 事有始終),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知)이 ’치지(治知)‘임을 알 수 있다.
‘격물치지’는 8조목이지만, 도를 닦아서 ‘직관력(本然知)’을 키워 가면 우선적으로 ‘사물을 제대로 알게 된다(格物致知)’는 것이다. 정신공부에서는 무엇보다도 ‘아는 것’이 핵심이다. 몰라서 죄를 짓는다. 그러니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 無知’이다. 그럼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나?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혜란 무엇보다 “앞에 할 것(선)과 뒤에 할 것(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를 알아야, ’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면, 또 다른 ’나‘인 ’남‘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다 고유의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두 다 인간적 아픔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타고난 지혜와 능력’, 즉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이 있다. '양지'는 사단 四端(바를 단)의 도덕적 마음 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고, '양능'은 사단의 나머지 마음으로, 상대방을 측은해 하고(惻隱(가엾고 불쌍함)之心), 겸손하고(辭讓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다. 이게 하느님에게 받은 ‘良心양심’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함)의 마음’이다. 유가에서는 이를 도심(道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 자신을 주로 챙기는 일반적인 ‘의식’은 ‘인심(人心, 사람의 마음)’이라고 구분한다. 인심은 온갖 번뇌와 망상에 휩싸여 욕망에 끌려 다니기 쉽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도심(道心),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잘 따르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 인심은 ‘소아적(私)’이나, 도의 마음인 도심은 항상 공정하고 대아적(公)이다. 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바로 통한다. 그러니 늘 깨여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깨어 있음으로 타인의 아픔과 기쁨을 “마치 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한다. 이러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남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하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그 사람을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타인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와 공감하고 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먼저 내가 정확히 파악 가능한 나 자신을 속속들이 아라야 한다. 즉 내 마음을 우선 점검해야 한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양지(지혜)와 양능(남을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 본래의 광명한 마음이 후천적으로 물욕(物慾)에 어두워져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지(無知)하게 되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나는 항상 '무지'가 먼저인가, 아니면 '아집'이 먼저인가? 두 개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민했다.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면, 내 안의 본래의 광명한 마음을 모르는 것이 무지이고, 그러면 나만 생각하는 아집이라고 본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무지하니까 아집에 사로잡히고, 아집에 사로잡히니 무지한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남을 헤아리고(역지사지) 사랑하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길, 헤아릴 혈, 모서리 구), 즉 역지사지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지 無知’의 때를 벗겨내 ‘지혜’가 드러나도록 하고, 남과 공감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아집 我執’의 때를 씻어내 ‘사랑’이 드러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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