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6일)
난 고향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산다. 그래 추석 같은 명절 기분을 잘 모른다. TV화면에서 보는 긴 귀향 길에 오른 차들의 꼬리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대신 시간이 많아 평소 읽기 어려운 두꺼운 책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연휴기간에 내 영혼의 두께는 두터워지고, 정신의 근력이 붙는다. 이번 연휴 기간동안 잠시 멈추었던 <<주역>> 읽기를 할 생각이다.
<<주역>>이 제일 먼저 <중지건괘>를 내세운 것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살라'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러면서 말한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았고, 밤 너머에는 새벽이 기다린다. 모든 때는 우리들에게 저마다 다른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는 거다.
괘사가 "건(乾), 원형이정(元亨利貞)"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시간은 생장쇠멸(生長衰滅) 혹은 성주괴멸(成住壞滅)의 과정을 영원히 순환하도록 관장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만물의 일년 생성(生成)은 생겨나고, 자라고, 거두어, 깊이 들어가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원리에 따른다. 이를 예쁘게 표현하면, "쥐리락, 펴리락"이다. 봄에 만물이 새싹을 잘 틔우고, 건강하게 생겨나려면, 그 전년 가을부터 열매를 잘 거두어 깊이 수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장(收藏)이 잘 되어야 생장(生長)이 좋고, 생장이 좋으면 수장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먼저 쥐고 펴야 한다.
비슷한 말로 성주괴멸(成住壞滅)이 있다. 삼라만상은 '생겨나서(成), 머물러 존재하다가(住), 명이 다하면 허물어져(壞), 없어져 버린다(滅)'는 뜻이다. "이세상 만물은 성주괴멸하는데, 모든 것이 다 그 운명에 의해서 그렇다. 만들어진 모든 그릇이 언젠가는 깨어질 운명을 타고 나듯이 인간도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이 그러하다." (탄허스님)
같은 말로 <<주역>>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한다. <<주역>>의 '건괘'에서 나오는 것으로, '원(元)'은 '으뜸 원'으로, 시작함을 나타내고, 형(亨)은 '형통할 형'으로 번창함을 나타나며, 이(利)는 '이로울 이'로 유익함을 나타내고, 정(貞)은 '곧을 정'으로 바르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천명도설>>을 보면, 나무(木)는 동쪽에 있고, 거기 원(元)이라 적혀 있고, 불(火)은 남쪽에 형(亨), 서쪽에 이(利), 북쪽에 정(貞)이라고 적혀 있다. 나무는 생명이 시작하는 봄의 원기(元)을 상징하고, 여름은 뜨겁게(火) 곡식과 열매가 성장(亨)한다. 가을은 서늘(金)해지면서 수확(利)하는 계절이고, 겨울은 검은(짙은) 물(水)의 긴 잠으로 꿋꿋하게 버티는 계절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하늘이 갖추고 있는 네가지 덕 또는 사물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 "원은 착함(=仁, 사랑)이 자라는 것이고, 형은 아름다움이 모인 것이고, 이는 의로움이 조화를 이룬 것이고, 정은 사물의 근간이다. 군자는 사랑(仁)을 체득하여 사람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모아 예절(禮)에 합치시킬 수 있고, 사물을 이롭게 하여 의로움(正義)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고, 곧음을 굳건히 하여 사물의 근간이 되게 할 수 있다." 선비를 꿈꾸는 나는, 이 네가지 덕(德)을 행하며, '원형이정"의 순환을 마음농사의 도구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마을을 내려놓는다."
마음을 내려놓다/이태관
신발장 속,
먼지 내려앉은
낡은 구두 하나 보았습니다
닳아 제 키보다 낮아진
낮아진 만큼 겸손해진
땅과 물의 온기를 제 주인에게 전할 줄도 아는
차마 버리기 아까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안선을 걸으며
뒹구는 돌
그 중 눈 맞춘 몇 놈
배낭에 넣었습니다
무거워져 오는 어깨
순간,
집안 어느 곳을 뒹굴고 있을
기념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집어왔을
돌덩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나의 구두 하나 생각났습니다
배낭 속 돌덩이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이젠 지난 9월 1일에 읽다가 만 제8괘인 <수지비> 괘를 이어서 읽고 공유한다.
지난 주말에 다 읽지 못한 <수지 비> 괘의 "육사'부터 읽는다. "六四(육사)는 外比之(외비지)하니 貞(정)하야 吉(길)토다"사 효상이다. 이 말은 "육사는 밖으로 도우니, 바르게 하여 길하도다로 번역된다. '육사는 음 자리에 음효로 있어 자리가 바르고(得位)하여, 대신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자리이다. '밖으로 돕는다'는 것은 '육이'가 내괘에서 안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사'는 외괘에서 밖을 도와야 한다. 특히 대신으로서 '구오' 왕을 도와야 함을 물론이다. 윗사람의 의견을 따라 일하는 것이 좋다.
'육사'는 외괘에 있으니 '구오'의 명을 받고 밖에서 활동해야 한다. 득위(得位)했으니 그곳이 자기 자리이다. 회사로 보면, 외근직, 국가로 보면 외교관 등의 상이다. '구이'는 안으로부터 돕는 위치에 있었다. "비지자내(比之自內)"였다. '육사'는 외괘에 닜으니 '구오'의 명을 받고 밖에서 활동한다.
'육사'가 동하면, 외괘는 <태괘>가 된다. '육사'의 본분대로 바르게 '구오'를 따르면 기쁜 일이 생길 것을 알 수 있다. 지괘는 45괘 <택지 췌괘>가 된다. 사람들 간의 정신적 취합(聚合)이라는 뜻이 잇으니, 기꺼이 따르고 싶은 좋은 리더와 믿고 일을 맡을 수 있는 듬직한 직원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느껴진다.
'육사'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外比於賢(외비어현)은 以從上也(이종상야)라"이다. 해석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밖으로 어진 이를 돕는 것은 위를 좇는 것이다'가 된다. '육사'가 외괘에서 밖을 돕는 것은 어진 이를 돕는 것이고, 이는 곧 위에 있는 '구오' 왕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현(賢)"은 '구오'를 가리킨다. 리더가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다. '육사'가 그를 돕는 방식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따ㅡ는 형식으로 갖추어야 한다. 육사가 동하면 외오괘가 <손괘>로 변하니 공손한 태도로 도와야 하는 것이다. 점을 쳐서 <수지비괘>의 '육사'를 얻으면 일을 함께 함에 있어서 상사와 선재. 스승 등의 연장자들에게 조언을 구하여 실천하면 결과가 좋다.
그 다음 '구오'의 효사는 顯比(현비)니 王用三驅(왕용삼구)에 失前禽(실전금)하며 邑人不誡(읍인불계)니 吉(길)토다"이다. 해석하면, '구오는 나타나게, 즉 광명정대하게 도우니, 왕이 세 군데로 모는 것을 씀에 앞의 새를 잃으며, 읍 사람이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가 된다. TMI: 顯:나타날 현, 驅:몰 구, 誡:경계할 계. '구오'는 외괘에서 중정(中正)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 만백성이 서로 도와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구오' 천자는 현명하게 밝게 처신하여 백성을 도와야 한다. 천자로서 백성을 돕는 것은 정치를 잘하는 것이다. 예컨대 왕이 사냥을 하여 짐승을 잡더라도 한 쪽을 열어 놓고 몰아가는 '삼구법(三驅法)'을 써서 살고자 하는 동물을 살려 보내면, 사냥터 주변의 읍 사람도 그러한 인군의 덕에 감동하여 경계하지 않는다. 이는 '왕으로서 모든 백성에게 서로 도움을 권면하더라도, 백성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오'가 주는 메시지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풀라'는 거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말라'는 거다. '구오'가 <수지비괘>의 주효이다. 득위하고, 득중하여 중정한 자리이다. 리더의 비(比)는 드러나야(顯) 한다. 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 백성들이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 이익만 취하며서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알게 하는 것이다. 흔히 '피부로 느끼다'는 표현을 쓴다. 그례 "현(顯)"이 아닐까?
"삼구(三驅)"는 은나라의 시조인 탕왕(湯王)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의미는 '세 방향에서 몰다"이다. 사냥할 때 사방을 모두 막고 짐승들을 모는 것은 '걸리는 것은 모조리 잡아 버리겠다'는 탐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삼구"는 한 방향을 열어 그쪽으로 도망가는 짐승들에게 자비를 베풀면서도 사냥감을 놓친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구오'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顯比之吉(현비지길)은 位正中也(위정중야)오 舍逆取順(사역취순)이 失前禽也(실전금야)오. 邑人不誡(읍인불계)는 上使 中也(상사 중야)일새라"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피부가) 느끼도록 드러나게 도와서 길함은 자리가 바르고 가운데 하기 때문이고, 거스르는 것은 버리고 순한 것을 취함이 앞의 새를 잃음이, 읍 사람이 경계하지 않음은 위에서 부림이 가운데 하기 때문이다'이다. TMI: 舍:버릴 사(집 사), 逆:거스를 역, 取:취할 취, 使:부릴 사. '육오' 왕이 백성을 드러내서 돕는 것은 그 자리가 정중(正中)하기 때문이다. 삼구법(三驅法)을 써서 살고자 하여 거스르는 것은 살게 놔두고 명이 다하여 순하게 잡히는 것을 취하는 것은 마치 살고자 하여 도망가는 앞의 새를 놔두는 것과 같다. 읍 사람이 경계하지 않는 것은 왕으로서 중도로 정치를 잘 하기 때문이다.
중도 정치란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의견을 항상 존중하되 그것을 현실 공간에 구체적으로 실현할 때는 사적 관계, 이익,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고요하게 펼치는 통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失前禽(실전금, 앞의 새를 잃음)"을 "舍逆取順(사역취순. 거스르는 것은 버리고 순한 것을 취함)"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리더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수지비괘>의 '구오' 효사가 말하는 핵심은 관용이다. '구오'가 동하면, 지괘가 <중지곤괘>가 된다. 땅만큼 관용의 넉넉한 미덕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대상은 없다.
끝으로, "上六(상육)은 比之无首(비지무수)니 凶(흉)하니라"가 효사이다. 번역하면, '상육은 돕는데 머리가 없으니 흉하다'이다. TMI: 首:머리 수. '상육'은 <수지비> 괘의 맨 위에 처하여 자리만 높은 상태이다. 모두가 '구오'를 중심으로 협력하고 있는데, '상육'은 뒷전에서 등을 돌리고 있으니 머리가 없는 것이다. 괘사의 ‘後夫凶(후부흉, 뒤에 하면 대장부라도 흉하다)’이 되는 자리이다. '육삼'은 ‘比之匪人(비지비인)’이고, '상육'은 ‘比之无首(비지무수)’이니, 모두가 협력하여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도 '육삼'과 같은 비협력자(非協力者)도 있고 상육과 같은 방관자(傍觀者)도 있는 것이다. '상육'은 '구오' 리더의 아래에서 리더를 따르며 땅 위에 물이 흐르는 풍요로움을 일구기 휘해 함께 노력하는 다른 음들과 달리 '구오'의 위에 있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여 육삼이나 부리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흉한 존재이다. '상육'이 동하면, <손괘>가 된다. "손입야(손입야, 손괘는 드러가는 것이 된다)"이니, 머리를 감추고 등장하지 않는 상이 나온 것이다.
'상육'의 <소상전>은 "象曰(단왈) 比之无首(비지무수) 无所終也(무소종야)니라" 했다. '상전에 말하였다. 돕는데 머리가 없음은 마칠 바가 없는 것이다'로 번역된다. 모두가 돕는데, 그 일에 자신은 등을 돌리고 있으니, 아무리 스스로 역량이 있다고 한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은 밥을 먹기 위해 협력하며 일하고 있는데, 남들이 차린 밥을 앉아서 먹고자 하는 격이니, 마칠 바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무수(無首)"에 "수(首)"를 동사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자연스럽다. 머리를 드러내고 함께하지 않으니 일이 시작이 없는 것이고, 그렇게 마칠 것도 없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상육'이 동하면, 지괘는 제20괘인 <풍지관> 괘가 된다. 땅 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으로 삶에 풍파가 일거나 고통이 따름을 암시한다. 바람이 땅 위의 것을 흩어 버리니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에겐 재물이 없어지는 상이 된다. 그런데 <풍지관> 괘는 기본적으로 "관(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괘이다. 세상의 흐름, 민심의 동향을 살펴 자신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갈고 닦을 때 내적으로 큰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조언해 준다. 점을 쳐서 이 '상육'을 만나면,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흉한 조짐을 일어야 한다. 물질도 사람도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배음을 갈고 닦아 바른 사람으로 거듭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위기 극복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마음을_내려놓다 #이태관 #주역 # 원형이정 #수지비괘 #삼구 #관용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삶은 보통 ‘사는 일'을 가리키지만, ‘살아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1) | 2025.09.16 |
|---|---|
| 내가 만드는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0) | 2025.09.16 |
|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의 5단계" (1) | 2025.09.16 |
|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0) | 2025.09.16 |
|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혼돈과 질서는 음과 양이다. (0) | 2025.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