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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나는 이미 일어난 일로 후회하며 아파하지 않는다.

344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10일)

1
오랜만에 맨발 걷기를 했다. 그 길에서 만난 올해의 대추 알들이다. 가을이 오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자동 소환된다. 우리는 종종 ‘고통과 시련이 내게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이 없어질 때, 내 삶의 의미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한 자극을 통해 우리들은 한걸음 더 앞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분명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통은 기쁨의 앞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통은 곧 희망이다. 현재의 고통은 미래의 행복이다. 한 알의 대추가 그렇게 말하면서, 살아낸 것이다. 

대추 한 알/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2
나는 이미 일어난 일로 후회하며 아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하며 불안하지 않는다. 오늘 기쁘게 그리고 충만하게 살 뿐이다. '잊지 말고, 조장도 말 것'이라는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이란 말을 나는 좋아한다. 이 말은 '필유사언이물정(必有事焉而勿正) 심물망 물조장(心勿忘 勿助長)'이란 말에서 나온 거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 뿐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말며, 마음으로 잊지도 않되 조장하지도 말 것'이라는 뜻이다. 맹자 이야기이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법을 설명하면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니, '발묘조장(拔苗助長)'이란 말을 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성격이 급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이른 봄부터 밭에 나와 부지런히 씨를 뿌리며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매일같이 밭에 나와 살펴봐도 곡식 싹이 잘 자라는 것 같지 않았다. 농부는 안타까운 나머지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돕고 싶어 싹 한 포기를 잡아당겼다. 싹의 키가 확실히 커 보였다. 이윽고 밭의 모든 싹을 다 잡아당기고는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오늘 내가 곡식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느라 너무 피곤하다.” 놀란 아들이 날이 밝자 마자 밭으로 뛰어가 보니 밭의 싹이 모두 시들거나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빨리 자라도록 도와준다며 싹을 잡아 뽑는 어리석은 농부의 이 이야기에서 ‘알묘조장’(苗助長) 또는 ‘발묘조장’(拔苗助長)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더 심해지도록 부추긴다’ 는 뜻의 ‘조장’(助長)이란 단어도 여기서 유래했다.

당장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본래 목표를 버려서도 안 되고, 빨리 결과를 보려고 성급하게 굴거나 무리수를 둬 목표 자체를 해치는 일은 더더욱 안 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스스로 노력하되 서두르지 않고 인내를 가지고 순리를 쫓는 자세가 중요하다. 극단을 지양하고 중용의 도리를 견지하는 것이다.

3
힘을 빼라. 그래야 멀리 날아갈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처럼 잠깐 살다 갈 뿐인데, 너무 많이 가지려 애쓴다.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나르는 새의 비움처럼, 날숨으로 더 비리기를 다짐한다. 새는 방광이 없다고 한다. 노폐물이 생기면 몸 밖으로 바로 배출한다고 한다. 버려야 산다는 거다. 우리도 욕심과 욕망을 버릴 때, 새처럼 날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운동할 때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힘을 빼라'는 거다. 야구공을 맞히거나 정지해 있는 골프공을 가격하려는 순간 힘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상태에서는 타격하는 순간의 운동에너지를 극대 화시킬 수 없다. 공을 찰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몸에 긴장감을 풀고 다리를 유연하게 한 상태에서 공을 차야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전달할 수 있다. 정확하게 물체를 맞히는 순간, 힘이 최대로 전달되는 순간, 그 때에 스포츠의 도(道)가 완성된다. 

이런 원리는 비단 스포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두루 적용된다. 약하게 하려면 먼저 강하게 하고, 빼앗으려면 먼저 줘야 한다. 부드러운 모래를 뭉쳐서 단단한 바위를 만들 수는 있지만 단단한 돌멩이로는 바위를 만들 수 없다. 그러려면 돌멩이를 먼저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아무 것도 빼앗을 수가 없다.  빼앗으려면 먼저 줘야 한다. 이런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 도(道)이다. 도는 매우 미세해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부단한 명상을 통해 정신의 통찰력을 키울 때 비로소 깨우칠 수 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스포츠의 도에 이를 수 있듯이 말이다. 

4
'힘 빼기'의 다른 말이 '비우기'이다.  <<도덕경>>의 제16장에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는 뜻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오이관복(吾以觀復,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라는 거다. 나는, 최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특히 "오이관복(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을 소환하며 나를 위로 한다. 세상 모든 이치이다. <<주역>>에 나오는 말이 있다. "무왕불복 (無往不復)", 즉 자연의 순환 원리를 주역에서는 "무왕불복"의 원리라고 한다. '세상의 이치는 결국 가면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순환 철학은 <<주역>> 11번째 괘인 <지천태괘>에 나온다. 이 괘에 "무평불피(無平不陂)"라는 말도 나온다. '세상에 영원히 평평한 땅은 없다'는 말이다. 난세를 이겨내는 중요한 인생철학이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에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 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노자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이라 말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 돌아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때는 기다리면 온다. 그러니 '힘 빼고', 오늘도 하루를 충만하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오늘은 교구 주교님께서 우리 본당을 방문하신다. 그래 오후를 비워 놓았다.

5
끝으로 오늘의 세상을 읽는다. 우리는 내일도 오늘처럼 흘러가리라는 믿음 위에 살아간다. 예측할 수 있는 하루는 마음의 안정을 준다. 그러나 그 항상성은 얼마나 단단할까? 갑작스러운 사고, 예상 못한 질병, 가까운 사람과의 뜻밖의 이별은 그 믿음을 쉽게 깨뜨린다. 그래서 오래된 지혜는 늘 경고한다. 평범한 일상 아래에는 불안과 허무, 유한성과 죽음이 흐르고 있다고. 그런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훈련이야 말로 더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안정을 원하기에 위기를 상상한다. 결핍을 떠올려야 충만함이 뚜렷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다. 직접 겪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2024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11.7명에 달한다. 삶을 살아볼 시간도 없이 무대에서 퇴장한다. 이들의 삶은 일정표와 성적표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여백도 없고, 선택지도 없다. 주체가 되기도 전에 경쟁에 내몰린다. 상상력이 마를 수밖에 없다. 열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떨림은 더 이상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 세대 또한 자녀의 미래를 불안해하며 자신의 노후 준비를 뒤로 미루고 있다. 교육, 결혼, 주거 지원까지 떠안으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비워진다. 하지만 이 구조는 누구도 구해주지 못한다. 청년은 주체로 성장할 기회를 잃고, 부모는 준비되지 않은 노후로 진입한다. 결국 한 세대의 위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다시 그 책임이 원래 세대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노년은 또 다른 층위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평균의 세 배다. 2024년 현재 66세 이상 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39.7%,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도 인구 10만 명당 40.4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대수명은 늘었지만 그것이 곧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고령사회 도래는 단지 인구 구조의 변화가 아니다. 60, 70대가 자신의 노후 준비도 부족한 채 배우자나 더 늙은 부모 세대의 돌봄과 생계를 함께 떠맡고 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이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기대한 항상성은 어디로 갔는가? 은퇴 이후 삶은 가벼워질 거라는 낙관은 왜 이렇게 멀어졌는가? 결국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상상이다. 지금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의미를 놓치지 않는 늙어감에 대한 상상, 초고령사회에 맞는 인식 전환과 구조적 개편이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 제시된 개념이 ‘적극적 노화(active aging)’리 생각한다. 노인을 수동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사회 구성원으로 보고, 그 경험, 지혜 그리고 역량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유도하는 데 초점을 두는 거다.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사회 참여와 지속적인 배움이 포함된다. 은퇴 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갖게 하는 방식이다. 유럽 여러 국가는 고령층의 사회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봉사나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일본은 ‘돌봄의 공동체화’를 모색하고 있다.

우리도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개인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대신 고령층이 서로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할 때다. 인식과 제도, 상상력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더 지혜롭고 의미 있는 늙어감을 위해서다. ‘당연한 내일'은 없다. 일상의 안정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위기를 상상하고, 그 위에 다시 의미를 세우는 일.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항상성’을 다시 정의하는 길일지 모른다.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허영란 교수의 글에서 얻은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