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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술꾼은 복기(復記)하지 않는다.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외로워서 내려온 산그림자처럼, 외로웠나 보다. 어제는 '그냥' 좋아했던 대학 친구가 전화를 해 수통골에서 만났다. 그는 경기도에서 교장을 한다고 했다. 40년 전의 일인데, 어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낮부터 막걸리를 몇 주전자나 마셨는지 모른다. 깨니 내 방이다. 프랑스 말로 '베티즈(betise)' 짓을 한 거 같은데,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외로웠나 보다. "그런 저녁이 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로마에 오면 '바코스(싹)'가 된다. 술의 신은 씨앗이 대지에 묻혀 제 몸을 썩히고,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대지에 들어 제 몸을 썩히는 이치와 같다. 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한 알의 곡식과 같다. 술과 술자리는 쾌락이 아니라 한 자루의 칼이다. 자루를 잡느냐, 칼 날을 잡느냐 큰 차이가 있다. 술은 무수한 생명이 뒤섞여 있는 카오스의 웅덩이다. 그 곳에 빠지느냐 헤어나오느냐 큰 차이가 있다.

술꾼은 복기(復記)하지 않는다. 술은 단순히 취하려는 목적만 있는 건 아니다. 술을 통해 다시 부활하라는 것이다. 술과 함께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로 들어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우리는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고 갈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할 것도 없고, 그저 겸손히 자연의 도도한 흐름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술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게 한다. 살아났다.

무척 반가웠나 보다. 시간을 잊고 마셨다. 한참 꿈 많던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2년 만에 만났는데, 어제 보았던 친구 같았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옹이로 박힐 때까지//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그런 저녁"이었다.

이젠 정신차리고, 5년 전 내 블로그에 올렸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항아리 론’을 다시 읽는다 .
▪ 첫째 사람은 누구나 빈 항아리를 하나씩 갖고 태어난다. 모양과 색깔, 재질과 크기는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근본적인 가치는 다를 바가 없다. 그 항아리를 잘 관리하고 내용물을 채워 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절제하여야 한다.
▪ 둘째 큰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고 하자. 처음에는 힘들게 노력하는데도 물이 계속 밑바닥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물 채우기가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 그 자체가 편안하고 재미있게 될 때 쯤 물이 부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물이 항아리 입구 부근에서 찰랑찰랑한다. 성취의 순간이다. 이 이후로는 물을 조금씩만 부어 넣어도 눈에 띄게 성과가 나타난다. 물론 항아리에 구멍이 나거나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물이 차지 않을 것이다. 꾸준함이 중요하다.
▪ 셋째 항아리를 채우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한계가 있다. 항아리를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채우려고만 하는 인생은 안으로부터 무너지기 쉽다. 고려의 문장가인 이규보는 술 항아리를 예찬하는 <도앵부(陶罌賦)>에서 ‘재물에 도취한 소인(小人)들은 짦은 재주와 좁은 도량의 작은 국량(局量)으로 끝없는 욕심을 낸다. 작은 그릇은 쉽게 차서 금방 엎어진다. 나는 늘 질항아리를 옆에 두고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분수를 헤아리며 노력하면 평범해 보이는 항아리로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저녁이 있다/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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