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30일)
1
1박 2일의 제천 여행을 다녀왔다. 장소는 <제천 한방자연치유센터>였다. 사)한국치매예방교육협회 회원들과 함께하였다. 언젠가 이 협회에 강의를 한 후, 그 취지가 좋아 나도 동참한 협회이다. 그곳에서 오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 치유 음식을 먹으며, '오감 테라피'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였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축적된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은은한 활력을 기다릴 여유는 대개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꾸준한 마음의 근육 단련을 통해 정교한 생각의 힘을 얻을 여유는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바쁘고 지친 사람들은 몇 번의 인문학 강연과 몇 번의 보약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쟁취해야만 한다. 아픈 표현이다. 스트레스로 정신의 방광이 터져 나가는 상황에서 한 입 베어 물면, 좁아 터진 방광을 떠나는 오줌처럼 스트레스가 배출되고, 또 한 주를 살아갈 정력이 샘솟게 되는 보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한국에 성행하는 많은 자칭 멘토의 강연과 건강원과 개소주 집은 후다닥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닮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22년부터는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축적된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은은한 활력을 '명철'하게 되찾고 싶다. 그래 홍윤숙 시인의 <사는 법>을 오늘 아침에 읽는다.
사는 법/홍윤숙
기다려야 해
가던 길 멈추고 한숨 돌리고
잊었던 하늘 한 번 다시 보고
흘러내린 행낭 고쳐매야 해
먼 산마루엔 분홍빛 구름 한 점
돌아가는 모퉁이엔 수묵빛 어둠
남은 여정 자욱이 찬비 뿌리는
한시대 도상에 함께 젖은 우리들
보아요 누구도 이 비를 피해가지 못하는
운명의 겨울
추운 몸 서로서로 비비고
남은 불 조금씩 나누어 지펴요
어둠 속에 뿌리를
서로 엉켜요
위에서 말한 '섭생(攝生)'이란 '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건강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기를 원한다'는 말로 쓰인다. 기원전 430~420년의 ≪히포크라테스 전집(全集)≫ 속에도 섭생법(攝生法)이 있었다. 여기서는 약물(藥物)을 사용하는 인공적인 치료보다는 음식, 운동을 통한 섭생에 의하여 자연적(自然的)으로 치유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섭생'이란 말만 나오면 토인비가 소개한 다음의 "청어 이야기"가 소한된다. 영국 런던의 어부(漁夫)들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런던 항까지 가지고 오는 것이 큰 숙제(宿題)였다. 청어는 성질도 급하고 장거리를 수조 속에 갇혀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항구로 오는 도중 대부분 죽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어부들 중 한 어부만은 늘 살아있는 싱싱한 청어를 가져와서 비싼 값에 팔아 큰돈을 벌곤 했다. 그래서 다른 어부(漁夫)들이 그 비결(祕訣)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지만 비밀(祕密)이라며 가르쳐 주지 않다가 어부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비밀(祕密)을 털어 놓았다. 바다메기가 청어를 잡아먹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청어가 담겨 있는 수조에 바다 메기 두세 마리를 넣어두면 수백 마리의 청어는 메기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必死的)으로 도망을 다니게 되고 결국 이것이 청어의 생명(生命)을 연장(延長)시키게 된 것이다.
2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이 말은 100% 다 맞는 말은 아니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유데모니아(eudaimonia)'라 불렀다. 이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본질적인 행복과 차별되는 순간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소확행의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도니아(hedonia)'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보았다.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소확행은 위에서 말한 유데모니아가 전제되어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서 여행을 즐기는 삶은 소확행이고, 열심히 일한 당신과 관련된 부분은 여행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데모니아이다.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열심히 일함을 통해 스스로 성장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여행만 다닌다는 것은 지루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소위 '불금'이 기다려지고 즐거운 이유는 주중에 유데모니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나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일 껍질을 벗기는 수고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과 같다. 자신의 수고 후에 얻은 소확행이 더 값지다. 마치 주요리를 먹지 않고, 디저트만 먹게 되는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재력과 체력 그리고 시간 여유가 있어서 유데모니아 없는 소확행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더라도 그 소확행은 결국 햇빛과 같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갈망해도 매일매일 해가 쨍쨍 뜨는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삶은 사막화되어 금방 황폐화된다. 삶의 목적을 자기 일과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성장체험인 유데모니아가 행복의 본질이다. 결혼의 경우도 두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성숙시키는 유데모니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유데모니아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혼생활은 그냥 지루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
3
자신이 재력과 체력 그리고 시간 여유가 있어서 유데모니아 없는 소확행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더라도 그 소확행은 결국 햇빛과 같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갈망해도 매일매일 해가 쨍쨍 뜨는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삶은 사막화 되어 금방 황폐화된다. 삶의 목적을 자기 일과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성장체험인 유데모니아가 행복의 본질이다. 결혼의 경우도 두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성숙시키는 유데모니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유데모니아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혼생활은 그냥 지루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등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 명예, 권력을 획득하면 획득한 상태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몇 주 정도만 행복하다. 하지만 새로운 상태에 적응된 후에는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대치를 높이는 톱니바퀴적 성향 때문에 점점 더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해진다. 얻은 대가로 짧게 행복한 기간을 지내다 더 긴 기간 동안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톱니바퀴 효과'라 한다. 그리고 '사막 효과'도 결혼 생활의 경우와 같다. 돈, 명에,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면 이것들도 매일 내리쬐는 햇볕이 되어 삶을 지속적으로 사막화 시킨다.
4
어제 다 못한, "나 답게 살게 해주는 오성급 성공 모델" 이야기를 더 해본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체력으로 단련 하는 야성(physical)
여기서 야성은 '야생성(野生性)'의 줄임 말이라 한다. 야성은 야생,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자기 정체성이고 미래 가능성이다. 거기서 우리는 내 세계의 풍경이 아닌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우선 몸이 건강해 진다. 몸이 건강해야 기분이 상쾌해 진다. 상쾌하지 않으면 머리도 명쾌해지지 않고 마음에서 유쾌하지 않으면 꿈을 쫓아가는 여정이 통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제공해주는 그 어떤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제도 말했던 것처럼 '5쾌'가 이어져야 한다. '상쾌-명쾌-유쾌-통쾌-흔쾌'이다. 비슷한 말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야성을 위해서는 몸과 정신의 근육이 필요하다. 우선 평소 운동을 주기적으로 하면서 몸의 근력을 키우는 사람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근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맡은 분야에서 끈기를 발휘하여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하며 살아간다. 야성 지수가 높은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난국이 다가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정면 도전해서 극복해보려는 높은 기상과 극기의 정신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야성으로 어제와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계에 도전하면서 우연한 마주침을 즐기는 사람이다. 마주침이 없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안주하며 산다는 반증이다. 그런 사람은 인문 정신의 근육이 강한 사람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를 이해라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고효율 장치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하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는다. 그냥 도전보다는 누구 누구처럼 살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으려는 것에만 집착한다. 이런 사람은 야성(野性)이 부족하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의 이론에 노예가 되어 지켜야 할 것을 많이 만들고, 선악의 기준을 중요시한다. 그럼 인문을 한다는 것은 야성을 키우는 일이다. 마음 속의 야수를 키우는 것이다. 짐승처럼 덤비는 일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여는 것이다. 이때 야성이 지성으로 연결된다.
▪ 배움을 통한 지능을 능가하는 지성(mentale)
지성은 낡아빠진 생각을 익은 생각으로 창조하는 각성제이다. 낡은 생각을 날조하는 꼰대, 입력은 고장 났는데 출력만 살아 있는 꼰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익은 생각을 창조하는 리더로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이런 지성은 야성을 통해 개발될 때, 지루한 관성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성은 일정한 주제를 잡아서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 생긴다. 이때 각성이 일어나고 새로운 통찰이 잉태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성의 근육을 단련하는 사람은 삶의 중심을 잡고 사안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사람이다. 타성과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고 지성을 연마하는 사람은 우연한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을 즐기며 언제나 어제와 다른 영감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을 구별한다. 여기서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으로 본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이 지혜, 아니 영성을 키워야 다음에 볼 감성이 발달한다.
▪ 감동과 감탄의 원천인 감성(emotional)
햄버거를 먹으면 살이 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뇌안(腦眼), 즉 지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햄버거를 보면 소의 아픔이 연상된다는 심안(心眼)으로 가슴 아픈 사연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느낌은 머리가 알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정확한 신체적 반응이다. 감성은 내가 몸을 움직여 겪어 보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공감 능력이다. 그런 사람은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지며 과감하게 행동한다.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머리에서 비롯되지 않고 가슴에서 시작된다. 용기(courage)의 어원이 프랑스어의 가슴(coeur)에서 나온 거다.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머리로 오랫동안 숙고하면서 검토를 거듭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낌이 오면 머리로 올라가 생각이 시작되기 전에 과감하게 행동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설득한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공감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성적 설득의 언어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운동으로 깨어난 상쾌함과 지적으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명쾌함과 더불어 유쾌한 언어를 사용한다. 이때 유쾌한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그들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용기(courage, 勇氣)'가 넘치는 사람은 용기(容器, container)를 깨트리는 혁신적이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타인에게 세심한 관심을 갖고 애정 어린 눈으로 보살피며 타자를 배려하는 가슴 따뜻한 언어를 사용한다.
▪ 믿을 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정성(relation)
정성을 다하는 인간 관계는 단순히 예의상 성의를 표시하거나 일정한 조건으로 발목을 잡는 접대하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정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접에서 비롯되는 미덕이다. 접대와 대접은 다르다. 접대를 뒤집으면 대접이 된다. 접대는 받으면 안 된다. 접대 받으면 옳은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에 걸린다. 하지만 대접을 받는 의미 속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어서 오히려 흐뭇한 마음이 온몸을 따스하게 만든다. 정성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이전과 다르게 연대하게 만드는 신뢰 자본이 된다.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갸륵하기 이를 데 없다. 정성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내가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파트너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거듭해야 되는지를 생각한다.
정성은 인간 관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정성스러운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한 개인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하나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산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우리는 '직(職)'이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성숙해 간다. 당연히 모든 행위는 사실 수행(修行)이며 거기에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특정'한 역할(職)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業)한다. 이것이 바로 '직업(職業)'이다. 인간은 '직업'을 잘 수행함으로써 사회적이고 공적인 존재로 확장한다. 바로 '직업인'이다.
문제는 '업(業)'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職)을 전인격적인 태도로 대하느냐, 아니면 기능적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인격적인 태도는,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정해진 일만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펴서 거기에 온 마음을 두고 기꺼이 불편함과 수고를 받아들여 조그마한 확장성이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수행처로 삼아야 한다. 그 역할을 통해서 자아가 완성되고 실현된다는 지속적인 각성을 하고,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능적으로만 대한다. '직'과 '업'이 분리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직업인'이 아니라 그냥 '직장인'이라 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과 진보는 구성원들이 '직업인'으로 사느냐, '직장인'으로 사느냐가 좌우된다.
인생을 살아보면 깨닫게 된다. 평생 직분을 다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직책이 부여하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하는 일. 소방대원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을 거꾸로 올라가는 직업이다. 소방대원의 직분은 내려오는 계단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소방대원이 연기 자욱한 계단을 올라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어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 각 부분에서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 덕분이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한여름의 격정을 다 떨궈버린 겨울 산을 볼 때마다 자문하곤 한다. ‘메멘토 모리",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아닐까?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만큼 인생에서 명확한 답은 없다. 죽음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전진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심장 뛰는 비전의 언어를 만드는 탄성(sprituel)
매사를 '덕분에' 잘되었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일상이 행복한 감탄사 천국이다. 반면에 매사를 '때문에' 안되었다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일상이 한심과 한탄이 자라는 텃밭이다. 감탄사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부정보다 긍정, 걱정보다 인정하면서 타성에서 젖어 살기보다 탄성을 말벗으로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3감(감동, 감격, 감명)이 활력 있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들의 일상이 경이로운 감탄의 원천이고 감사함의 대상이다.
행복한 사람은 매사에 감사함을 표시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타성에 젖어 사는 고루한 인생에서 탈피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발목을 잡는 사고의 한계들을 넘어서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무장한다. 그렇지만,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이 중요하다. 이 말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서 공자의 제자인 유자가 남긴 “군자무본 본립이도생(君子務本本立而道生)”이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군자는 기본에 힘쓴다. 기본이 바로 서면 도(道) 즉,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탄성을 삶의 미덕으로 추구하는 행복한 사람은 기본에서 멀어지고 술책을 강구하려는 사심이 싹틀 때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 일편단심 다짐하는 자세와 태도를 강력하게 만들어 간다. 나의 경우,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5

지난 8월 25일에 <산풍(山風) 고(蠱)>괘를 마치며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오늘 좀 더 한다. "고(蠱)"는 ‘명(皿 : 그릇)’과 ‘충(蟲 : 벌레)’의 합성어로서, 그릇이 오래되어 벌레가 생겨난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서 ‘무너지다'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고(蠱)’는 ‘고(故 : 일)’와 음이 같기 때문에 ‘일’이라는 뜻도 있다. <산풍 고> 괘는 양괘(陽卦)인 간(艮), 산이 위에 있고 음괘(陰卦)인 손(巽), 바람이 아래에 있으며, 상효(上爻)가 양이고 '초효(初爻)'가 음으로서 양과 음이 각각 상하에 위치하고 있다. 양기(陽氣)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陰氣)는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두 기운이 단절되어 교감하지 못함으로 괴란(壞亂 : 무너져 어지러움)하게 된다. 또한 바람(巽)이 불어가다가 산(艮)에 막혀 회오리치면 초목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꺾인다. 이것이 ‘고(蠱)’라고 명명된 이유이라는 거다.
이와 함께 <손(巽)괘> 장녀(長女)가 <간(艮)괘> 소남(少男) 아래에 와서 유혹하는 상(象)이므로 ‘고(蠱)’는 ‘미혹한다’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괘사를 보면 “고는 크게 형통하니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 갑(甲)보다 삼일을 먼저하고 갑보다 삼일을 뒤에 한다”고 하여 ‘크게 형통하다’고 평가한 것은 <고괘>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무엇보다도 <단전(彖傳)>에서 “‘갑보다 삼일을 먼저하고 갑보다 삼일을 뒤에 한다’는 것은 ‘종즉유시(終則有始)’가 천도의 운행인 것이다”고 했듯이 종말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모태라는 순환적 발전 원리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고’라는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는 유교의 역사 의식이 성립된다. 이러한 역사 의식을 '초육(初六)'에서 “아버지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것이다. 자식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니 위태롭게 여겨 삼가서 일을 해야 마침내 길할 것이다”고 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종즉유시"라는 <산풍 고> 괘의 논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않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하는 정신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괘의 이야기는 지난 8월 3일, 8월 4일, 8월 6일 그리고 8월 20일자 <인문 일지>를 보면 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0) | 2025.09.08 |
|---|---|
| '케데헌' 흥행 돌풍으로 한국 문화(K콘텐츠)가 세계적 문화 현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거다. (2) | 2025.09.08 |
| ‘그냥(Just Because)의 날’은 '작은 일탈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힘든 기쁨을 맞이하는 날'이다. (1) | 2025.09.08 |
| 자기 밖에 모른다면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이다. 덜 익은 와인처럼 말이다. (2) | 2025.09.08 |
|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2) | 2025.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