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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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를 맞아, '물 마시기'는 건강을 위한 기본 수칙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몸은 60~70%가 물로 이뤄졌다고 하니, '물 마시기'는 체내 수분 유지는 물론 노폐물 배출과 소화, 대사 과정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이와 혀를 깨끗이 닦는다. 물을 마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급의 정수기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350ml 컵에 마신다. 그리고 6시 경에 다시 비타민 등과 또 한 컵을 마신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2L의 물을 마신다. 나이를 먹고 신경 쓰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다. 몸이 늙어 목이 마른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감각이 퇴화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TV 프로그램에 나온 어는 한 교수가 “물을 과하게 마시면 죽는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물 2ℓ의 효용성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힘을 얻었다. 중요한 것은 2ℓ를 꼭 마셔야 하는 게 아니라 나이, 건강상태, 활동량 등에 맞춰 충분히 마시면 된다는 것이 아닐까? 한때 유행했던 하루 만보 걷기도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충분히 걸으면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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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충분히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상식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물은 소화기관을 비롯, 심장 폐 그리고 뇌의 기능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루 권장 물 섭취량은 몸무게 등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하루에 1.5~2리터를 조금씩 나눠 마시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임신 중 여성이나 몸이 아플 때는 평소보다 양을 늘리는 게 바람직하다. 갈증이 날 때만 물을 찾는 것은 잘 못된 습관이다. 목이 마르지 않아도 우리 몸에 적정한 수분 유지를 위해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의학 전문가들의 말이다.
언젠가 적어 둔 '하루 중 물을 마셔야 하는 최적의 시간 베스트 타임 7’을 소개한다.
▪ 아침에 눈 떴을 때: 하루의 출발은 커피보다 물이 먼저다. 잠 자는 동안 수분 섭취를 못한 만큼 물을 보충해줘야 한다. 양치 등으로 입을 헹구고 나서 공복 상태에서 미지근한 물을 한 두 잔 마시면 좋다.
▪ 식사 전에: 식전 30분이나 1시간 전 물을 마시면 공복 감을 없애는데 도움이 된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찬 물이 효과적이다. 냉수가 소화를 지연 시키고 식욕을 억제한다. 2019 <유럽영양학저널>에 따르면, 식전에 얼음 물을 마신 사람들이 따뜻한 물을 마신 사람보다 음식을 덜 섭취했다.
▪ 식사할 때: 위액을 희석시킬 정도로 물을 ‘벌컥벌컥’ 들여 마시라는 뜻이 아니다. 음식이 부드럽게 내려갈 만큼만 ‘조금씩’ 섭취하면 소화에도 유익하다. 특히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때 물을 곁들이면 배변활동이 원활해 진다.
▪ 오후 휴식시간: 많은 직장인들이 오후 3시경 에너지가 고갈되는 경험을 한다. 흔히 퇴근시간까지 버티기 위한 방법으로 커피 같은 음료와 달콤한 간식을 찾곤 한다. 이는 재충전을 위한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잠 들기 6시간 전에 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것은 숙면에 보탬이 안된다. 간식으로 생각 없이 먹는 빵과 과자는 뱃살 축적에 한 몫을 할 뿐이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물을 마셔야 에너지 보충과 기분 전환에 가장 효과적이다.
▪ 두통이 있을 때: <국립 두통재단>에 따르면, 두통도 탈수의 한 증세라 한다. 탈수가 심해지면 편두통까지 초래할 수 있다. 또한 몸에서 수분이 부족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 적개심, 우울 감 등이 생겨난다는 거다.
▪ 운동 전, 운동 중, 운동 후: 격렬한 운동을 할 수록 물보충이 필수적이다. 체내에 수분이 부족하면 운동 퍼포먼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간 강도 운동의 경우, 운동 30분 전 물 한 컵을 마신다. 운동 중에도 수시로 물을 조금씩 마신다. 그래야 덜 지친다. 운동 끝난 뒤에도 물 한 잔을 마시면 좋다.
▪ 잠들기 전: 자는 동안 입안이 지나치게 건조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 이다. 한꺼번에 물을 많이 마시면 자는 도중 일어나 화장실에 가야 할 사태가 생긴다. 한 두 모금 정도 입안을 적신다는 생각으로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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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조정권(1949∼)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약속 시간을 세 시간도 더 넘겨 만나는 두 사람. 서로 약속 장소를 달리 알아서 생긴 에피소드다. 휴대전화가 대중화된 요즘이었더라도 어쩐지 이 둘은 그렇게 기다렸을 것 같다. 툭하면 삐치고, 조금 기다리다 그냥 가버리는 우정이 아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신뢰가 있고 내색하지 않아도 마음을 헤아리는, 나이 든 남자들의 곰삭은 우정이 싱그럽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얼굴만 봐도 반가운 친구가 말도 예쁘게 한다.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는 줄 알았지요.” 심성이 일급 청정수 같을 친구가 계곡 물소리로 화자의 마음을 씻어준다. 화자가 친구와 만나자고 한 장소 ‘마로니에’는 아마 화자 직장 근처에 있는 ‘마로니에 카페’일 테다.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환유(換喩)를 사용했다. ‘날개 돋친 듯’ ‘파리 날리다’ 등 우리 언어생활에는 무수하게 환유가 쓰이고 있다. 그런데 환유, 곧 비유는 바로 그것이 아니고 생략하거나 비틀어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래서 친구는 마로니에 나무 아래서 어둡도록 기다린 거다.
나란히 자리를 펴고 누운 그 밤, 친구는 잠 못 이루고 무겁게 몸을 뒤척인다. 깊은 우정으로도 헤아리지 못한, 다만 느낀 친구의 번뇌. 오래전 물소리 들리는 듯, 세상을 버린 친구에 대한 화자의 슬픔과 정이 촉촉이 전해진다. 이 시를 소개한 황인숙 시인의 덧붙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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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일부 극우 세력들이 최근 내놓는 '가짜 뉴스'가 도를 넘었다. 어제 한미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오늘 아침, 나는 <힘센 ‘사실’ 앞, 기억하는 그 마음>이라 글을 읽었다.
다음과 같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난 잘 모르고 있었다. 1942년 4월18일 낮, 도쿄 상공에 비행기 여러 대가 떴다. 진주만 기습 이후 태평양이 일본의 앞마당인 시절이었다. ‘황군’의 훈련일까, 구경꾼이 모였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미군의 첫 반격이었다. 육군 폭격기가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폭격을 한다는 기상천외의 작전이었다. 수도에 폭탄을 맞은 일본의 충격이 컸다. 폭격을 목격한 이들 중에 조선의 지도자 여운형이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목격담을 은밀히 전했다. 미국 라디오 내용도 곁들여 일본의 물자 부족으로 전쟁이 빨리 종결되리라고 전망했다. 도쿄 폭격 소문이 퍼져 나갔다. 여운형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헌병대에 체포된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일본의 패배를 예상치 못했다고 변명했다. 1930년대 말부터 숱한 지식인, 엘리트가 신념을 버리고 친일로 전향했다. 변신의 논리도 나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서구의 20세기를 ‘사실의 세기'라며 자기비판한 것을 문학평론가 백철이 ‘사실 수리론’으로 속류 화했다. '예전에 불의했던 것도 사실이 된 이상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다. 그렇게 힘센 ‘사실’을 받아들인 엘리트들이 전쟁에 나가라며 연설도 하고 글도 썼다. 참 말도 안 된다. 사실조차 자기 변명에 갔다 쓴다. 최근 내란 정당의 논리도 비슷하다.
‘다른 사실'들을 보려 애쓴 이들도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밤공기 속에 안개 퍼지듯 퍼져 나갔다. 1943년 4월, 함남 홍원에 사는 강동모(37살)는 “미국은 군수공업이 발달하여 매월 수천대의 비행기를 제작하고 있으므로 (…) 수만대의 적 비행기가 일거에 내습하면 일본은 모두 패배하게 되니, 그때 야말로 우리 조선 동포가 봉기해야 할 호기"라는 이야기를 퍼뜨리다가 검거됐다. 해안에 연합국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풍문도 돌았다. 연합군이 상륙할 때 “양복을 입으면 일본인과 구별되지 않으므로, 조선인은 조선복을 입어야 한다”는 지침도 퍼졌다. 일본 경찰의 비밀자료 속 내용들이다.
이런 식이었는데, 지금도 일부 극우 세력들은 자신의 유튜브로 왜곡된 사실들을 퍼뜨린다. 당시도 그랬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좌우의 동지를 규합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공장, 학교, 회사 등에 세포 조직을 건설하니 동맹 회원이 1만명에 달했다. 해방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되는 바탕이 됐다. 항일 무력전도 준비했다.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과 연락하고, 1945년 5월에는 박승환을 파견해 협동작전을 의논했다. 충칭 임시정부에도 요원을 파견했지만, 그런데 일본의 감시망을 뚫지 못했다. 그 당시의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가슴 뜨거운 개인들도 움직였다. 학병으로 끌려간 장준하, 김준엽 등은 1944년 중국 쉬저우에서 탈출해 장장 7개월을 걸어 충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 박승환이 옌안에 갔던 때 학병 위문단으로 동원돼 북중국을 순회하던 작가 김사량도 베이징을 탈출해 옌안으로 향했다. 탈출에서부터 조선의용군 입대와 훈련까지 역정이 수기 <<노마만리>>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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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도 사회학자 조현근의 글이다. 그는 "내 펜이 힘센 이들의 ‘사실’ 앞에 무력 해질까 두려울 때면, 바로 이 마음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너무 '사실'을 모른다. 그래 공유한다.
올해도 8월15일을 지나며 어김없이 역사 전쟁이 불붙었다. “해방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기념사가 불을 지폈다. 그리고 그는 윤봉길 의사가 유서에서 아들들에게 발명가가 되라고 했다며 역사의 이면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력 양성을 위해 친일 협력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해온 뉴라이트 사관의 연장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실제 유서는 첫 문장이 “반드시 …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였다. 발명가가 되라는 말은 없다. 맹자, 나폴레옹, 에디슨처럼 훌륭한 어머니를 따르라는 당부였을 뿐이다.
'뻔한' 왜곡에 정청래 대표가 "임시정부 법통계승론에 대한 부정은 역사 내란이라며 척결하겠다"고 나섰다. 취지는 이해하나 부적절한 발언이다. 임시정부 법통계승론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임정 법통계승을 제헌헌법에 명기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반면 백범은 “현재의 반 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법통계승론을 비판했다. 백범사상연구소를 이끈 백기완은 임시정부를 “국권의 동일성 내지 지속성의 유지라는 낡은 의제와 법통 의식의 틀에서 탈피 시켜 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전환”시킨 데서 백범의 공을 찾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못지않게 조선건국동맹도, 조선독립동맹도 치열하게 투쟁했다. 독립운동 폄훼에 맞서려면 임정 법통론에 매달리기보다는 ‘더 많은 독립운동’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다. 건국절 논란에 휘말리며 논란이 법적 정통성 여부로 축소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강성한 일본에 협력하여 실력을 키우자는 지식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일본인 다음가는 ‘이등 국민'이 되어 서러운 신세를 벗어나자는 이들도 늘어갔다. 모두가 그런 꿈을 꾼 건 아니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일제 말기(1937~1945)에 적발된 불온 낙서 중 1위가 이완용 비판, 2위가 천황 비판, 3위가 미나미 지로 총독 비판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은 꿈도 못 꿀 ‘천황 바보’ 같은 낙서를 썼다. 내선일체는 허망한 꿈이었다.
‘사실’이 어떻든 옳은 일을 하려 애쓴 이들도 있었다. 영국인으로서 일본군 포로가 됐던 앨리스터 어커트는 90살이 넘어 남긴 회고록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당한 학대를 고발한다. 이등병 아래 최말단 포로감시원은 잘 때리라고 늘 맞았다. 그래도 학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타이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근무하던 포로감시원 김주식은 1944년 10월, 영국군 포로들과 함께 탈출해 중국으로 향하다 체포됐다. 이듬해 형장의 이슬이 됐다. 1944년 말, 인도네시아의 포로감시원 10여명은 비밀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했다. 그중 몇몇이 우발적으로 봉기했다가 죽고 나머지는 체포됐다. 수감 중 종전을 맞아 풀려났다.
훨씬 사소한 이야기도 있다. 어커트의 기억이다. 포로들은 곧잘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이송됐는데, 질식할 것같이 끔찍한 경험이었다. 또다시 이송을 앞둔 어느 날, 포로들이 조선인 감시원에게 탈출하지 않을 테니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망설이던 감시원이 믿을 수 없게도 문을 열어 두었다. 포로들은 자리를 바꿔가며 바람을 쐤다.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베푼 어느 조선인의 친절을 어커트는 평생 잊지 못하고 글로 남겼다. 이 사소한 행동을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약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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