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5일)
이번 목요일에 있을 한밭대 인문학 특강 제목을 정했다. <인문학: 우리는 왜 배워야 하고 어떻게 배우는가?> 이젠 배움은 생존의 문제이다. 메타버스라는 3차원 가상 세계라는 또 다른 세계가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움을 통해 새로운 지각을 획득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삶이 궁핍해질 수 있다. 몇 일동안 이 문제를 아침 <인문 일지>의 화주로 삼을 생각이다.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이 주제를 정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공', '추상'을 의미하는 'meta'와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오늘은 인문학적으로 '고아의 감각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는 문장을 갖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본다. 맨 먼저,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다가 가벼워지면 떠올라야 한다.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고, 곧바로 나는 "화이위조(化而爲鳥)" 이야기가 떠올렸다. 장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의 경지에 이른 후 남명(南冥, 남쪽 바다)에서 노는 사람을 '진인', '신인', '성인'이라 했다. 사자성어로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가 되는 것을 우리는 "화이위조(化而爲鳥)"라 한다. '새로 변하기'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의 잠재력이 변화하는 단계를 장자는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말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자유의 네 단계’라고도 한다.
(1) 제1단계: 상식인(常識人)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과장, 군수, 장관, 국무총리 등의 사다리를 하나하나 오르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이를 향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다. 이들은 인간 한계 밖을 넘보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므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추라기처럼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과 실현하려는 사람들, 실현한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메추라기는 붕새보고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 날아간단 말인가?”
(2) 제2단계: 송영자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 전쟁의 근본 원인이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을 싫어하는 속물(俗物)근성-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급급한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런 것을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의 비난이나 칭찬에 “목계(木鷄, 나무 닭)”처럼, “육중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영광과 치욕을 분별해 세속에 구애(拘礙, 거리끼거나 얽매임)되지 않고 초연(超然, 세속(世俗)에서 벗어나 있어 현실에 구애되지 않다)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지만, 아직도 칭찬과 비난을 칭찬과 비난으로 의식하고 칭찬받으려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별의 마음이 있다.
(3) 제3단계: 열자 같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사에 초연할 뿐만 아니라, 바람을 타고 아무데나 마음대로 떠다니며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15일 지나면 돌아와 새 바람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훨훨 떠다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람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지했다. 아직도 기대(有待)하는 상태이다. 무언가에 의존하는 상태이다.
(4) 마지막 제4단계: 장자의 궁극적 이상이다.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무한한 경지에서 노니는 절대자유의 단계이다.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는(無待, 의존하지않는 독립)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無碍-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의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삼무(三無),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한 사람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緣緣-집착하여 잊지 못하다)해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여기서 중요하는 것은 물고기가 새로 변신하자 마자 곧장 남쪽 바다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게 먼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다른 사람 또는 조건의 도움을 받았다. 그게 의존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새로 변신했더라도 날아오르는 건 새 자신의 문제이다. 새 자신의 힘으로 비상해야 한다. 홀로서기이다. '고아의 감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4단계에 누리는 진정한 자유란, 결국 의존을 깨닫는 것이다. 그게 '진인', '신인', '성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오른 새는 시선이 바뀐다. "아지랑이나 티끌은 모두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토록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빛깔인가? 멀고 멀어 끝이 없는 까닭인가? 붕새가 나는 구만리의 상공 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아도 또한 저러할 뿐이다."(<<장자>>, "소요유")
최진석 교수는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시선의 높이로 깨어 버릴 수 있다.
아침에 슈퍼 '힌남노'라는 태풍의 눈을 보았다. 태풍의 눈은 적막하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거대한 태풍의 눈에 들어선 돛단배와 같다는 말이 있다. 거친 바다를 지나 적막한 태풍의 눈으로 진입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감정이 솟아오른다. 그러면 Vita nuova(비타 누오바,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자신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것, 상상할 수 없는 저 너머의 무엇을 꾸며주는 말이다.
사랑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사랑이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자신의 가슴에 있는 영혼에서 찾을 때의 조건이 붙는다. 자신과 유리된 이념에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의 최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상대방과 나와의 간격을 소중하게 여기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더불어 자신의 고결한 품위를 유지하는 절제이다.
사랑은 절제이다. 상대의 경계를 무단침입하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요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색욕(色慾)이다. 색욕은 무절제하다. 절제를 프랑스어로 moderation이라 한다. '절제하다'란 'garder la mesure'이다. 무절제는 프랑스어로 exces라 한다. '초과'의 의미가 강하다.
단테는 무절제를 이탈리어로 인콘티넨차(incontinenza)라 불렀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요실금'이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을 다듬지 못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으면 요실금처럼 품격을 망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성적인 방종, 과도한 음식 섭취, 쇼핑중독, 과도한 분풀이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라는 요실금에 걸려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라고 했다. 그는 "사랑에 빠진 감정이 사랑인가' 질문하기도 한다. 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황금률처럼 진정한 겸손, 용기, 믿음 그리고 훈련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보물이다. 사랑은 한순간에 빠지는 동사가 아니라, 상대방을 내 몸처럼 아낄 수 있도록 수련으로 도달하는 마음의 상태, 즉 형용사이다. 상대방을 존재가 아니라 소유물로 여기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불같이 일어나는 애욕(愛慾)의 감정은 아니다. 애욕은 한 순간에 솟구치는 일시적인 본능이다.
태풍/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나희덕 #태풍_힌남노 #자유의_4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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