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7일)
1
지난 12월 3일에 뜬금없는 계엄으로 시작된 정국의 혼란으로, 올해는 강의가 없다. 지난 6월 3일에 새정부가 시작되어 사회가 안정되고 시민들의 삶이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 피부에 와 닿을 정도는 아니다. 그래 올해는 휴가를 가지 않고, 집과 동네에서 책을 보며 잘 지내고 있다. 최근에 집 가까운 곳에 커피 맛이 아주 좋은 곳이 생겨, 어제 오후에는 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비주의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를 여러 편 읽었다. 그 중에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라는 시를 공유한다.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잘랄루딘 루미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다.
영혼이 그 풀밭에 누우면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말이 필요 없고
생각, 언어, 심지어 ‘서로’라는 단어조차
그저 무의미할 뿐.
2
동원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번 민주당 대표 선거 결과를 보니 그렇다. 이젠 '동행(同行)'의 문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 동원의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동행이라는 말을 하다 ㅂ니, 장자의 양행(兩行) 철학이 소환된다. 이 철학의 핵심은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 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나 '조사모삼(朝四暮三)'이나 결국 그 합은 7개로 같다. 장자는 이것을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하루는 원숭이를 기르는 사육사가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면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朝三暮四, 조삼모사)의 밤톨을 먹이로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분노한다. 그때 사육사는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朝四暮三, 조사모삼) 준다고 설득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환호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삼모사이든 조사모삼이든 하루에 모두 7개의 먹이를 준다는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원숭이들은 그 말에 따라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였다. 흔히 조삼모사 이야기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말이나 논리로 속인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원래는 장자 철학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논리이다.
장자가 말하는 양행(兩行) 철학-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는 동행 시스템-의 핵심 논리이다.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조삼(朝三)이냐 조사(朝四)냐를 따지며 기쁨과 분노를 교차하고 있을 뿐이다. 장자는 이 이야기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名實未虧 而喜怒爲用(명실미휴 이희노위용) 亦因是也(역인시야)"(<<장자>>, <제물론> 13). 이 말은 '명목이나 실질에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데도 기뻤다 성을 냈다 하는 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란 뜻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因是)해야 한다. '도'를 따라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조삼'이든 '조사'이든 명실이 바뀐 것은 없다. 다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의 차이가 희노(喜怒)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옳다고 하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 의해 그 좋고 싫음이 결정되는 것이지 본질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장자의 세속적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넘어서는 화합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천(天)에 고를 균(均), "천균(天均)"이다. 하늘의 밸런스이다. 어떤 인생이라도 그 합은 같다. 부귀와 성공을 추구하는, 건강과 가족을 추구하든, 결국 그 합은 같고, 단지 편견에 의해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양행(兩行)의 도라고 하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만, 그 합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가치가 있고, 삶의 방식 또한 각각 다르다. 장자의 양행 철학에 의하면, 한 쪽을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의 입장에서,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양행(兩行)의 도'를 깨우치고 "천균"의 질서를 체득하여 장자가 꿈꾸는 "진인(진인)"의 경지에 오를 있다는 거다.
세상에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살아간다.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마음에 둔 한 가지의 목표를 얻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희생의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결국 합은 똑같은데 사람들은 w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한다.
3
'동원'의 세계가 나이라, '동행'의 세계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동행'이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려면, <<데미안>>을 읽어야 한다. 그 책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라는 신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부정, 아니 저항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근데, 부정도 어느 순간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정이 죽으면 안 된다. 싫증난 한 편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 편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 불교에서는 이중부정, 지속부정을, 양공(兩空)이니 중현(中絃)이니 표현한다. 장자는 양행(洋行)을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양행의 길은 다음과 같이 4 단계로 수련을 하여야 한다.
▪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을 따르는 거다.
▪ "화시비(和是非)"를 실행하고 따르는 거다.
▪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
▪ "각득기의(各得基宜)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4
장자가 말하는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은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成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화 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화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 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피차, 즉 주체와 객체라는 말은 기준으로 삼는 시각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 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의 구분에는 이미 시비 판단의 계기가 전제 되어 있다.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을 둘러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굳은 마음)"을 "사심(師心-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삼는다. "사심"은 "성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虛心)"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이라 했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5
"화시비(和是非)"는 ‘시비를 화(和)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이다.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基)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 만한 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분별지)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시비(和是非)'는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천균에 머문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 비슷한 말이 '양행'이다.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는 전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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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 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탁부득이(託不得已)’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天均)"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
7
'각득기의(各得基宜)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이다. 장자의 기본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天倪, 자연의 작용, 하늘의 맷돌(天硏), 하늘의 균형대(天鈞)라고 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 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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