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8일)
몇 주 동안 영혼에 양식을 주는 <<장자>> 읽기를 멈추었더니, 허기가 밀려왔다. 그래 어제는 셋이서 '그냥' 만났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로 가급적 사적 모임을 자제하는 데 말이다. <<장자>> "내편" '덕충부'를 읽고 있다. 노나라의 군주와 공자 사이의 대화 중에 인상적이었던 두 부분을 공유한다. 그냥 번역서를 읽으면, 맛이 안 난다. 한문 실력이 부족해도 원문을 읽으려고 시도해야 정밀 독해가 가능하고 사유를 더 확장 시킬 수 있다. 우선 번역을 공유한다.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만물과 더불어 따뜻한 봄과 같은 관계를 이루어야 하나. 이것은 만물과 접촉하여 마음 속에서 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재능이 완전(재전, 才全)하다고 합니다." 다음은 원문이다. 使日夜無郤而與物爲春(사일야무극이여물위춘) : 밤이나 낮이나 변화가 끼어들 틈이 없게 하면, 만물과 화기어린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是接而生時於心者也(시접이생시어심자야) : 이것이야 말로 만물에 접해서 봄 같은 화기가 마음에 생기는 때를 만들어 낸다. 是之謂才全(시지위재전) : 재능이 온전하다고 하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선 "위춘(爲春)"에 주목했다. 봄 춘(春)자이다. 그러니까 '위춘'이란 '사물에 접해서 마음에 봄이 오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접(接)'자이다. 들뢰즈의 '접속'이란 개념이 떠오른다. 나를 열고 타자에게 접속하여야 한다. 최근에 늘 머릿속에 두고 있는 생각이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의 항상성을 위해 지속하고, 타자와 접속하라. 이게 영성의 지혜, 즉 자연지를 알고 사는 길이다. 이게 삶의 성장의 길이다. 인생의 사는 맛은 활동과 관계가 많고, 잘 이루어지며, 그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선은 관계의 폭을 넓게 하고, 그 관계에 충실하며, 끊임없이 접속을 유지하면, 원하는 활동이 확장되는 것이다. 세번 째는 "생시어심(生時於心)"이다. '시'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는다. '때'이다. 즉 '기회'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마음 속에 때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성인(聖人)은 자유롭게 노닐어서 지식을 잉여물로 여기며, 사람을 구속하는 예의를 아교풀로 여기며, 세속의 덕을 기워 붙이는 것으로 여기며, 기술을 장삿속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은 억지로 도모하지 않으니 어디에 지식을 쓰겠는가? 깎아 장식하지 않으니 어디에 아교풀을 쓰겠는가? 본래의 자기(道)를 일어버리지 않으니 어디에 세간의 덕을 쓰겠는가? 팔지 않으니 어디에 장삿속을 쓰겠는가? 이 네 가지는 자연이 길러주는 것이니, 자연이 길러준다는 것은 하늘이 먹여주는 것이다. 이미 자연에서 먹을 것을 받았으니 또 어디에 다 인위적인 것을 쓰겠는가?"
성인에게는, 본문에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 중요시하는 지(知), 약(約), 덕(德), 공(工), 네 가지가 필요 없다고 한다. 여기서 지는 지식, 약은 예의 범절 등 사회적 규범, 덕은 사람을 얻고 사귀는 일, 공은 기술이다. 성인은 '지'를 화(禍)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사회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아교풀에 달라붙어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도덕에 따라 사람을 사귀고 인심을 얻는 것은 교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솜씨를 부리는 일을 장삿속으로 치부하여 모든 쓸데 없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꾀하는 일도, 쪼개는 일도, 잃는 일도, 돈에 대한 관심도 없으니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새들이나 들꽃들을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 하늘에 계산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 6:26-33)고 했다.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재(才-덕-본성)라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才全)이라 한다.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인간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하여 본마음을 그대로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의 외부의 조건을, 사철이 바뀌듯이 사물의 변화나 운명으로 생각하고 의연히 받아들일 뿐, 안달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마음, 거울 같은 마음으로 마음의 조화와 평정을 유지하여 트인 마음, 즐거운 마음, 봄날처럼 안온하고 느긋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주어진 재질,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재전(才全)이라는 것이다.
봄은 따뜻함이고 사람이다. 봄 춘자를 기억하며, 미움에 찬 사회에서 사랑을 먼저 떠올리고, 비루하고 추한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하자. 갈등의 해결책은 사랑이라는 헨리 나우웬의 말을 떠올리자. "관계가 힘들면 사랑을 선택하라!"(헨리 나우웬)
쌍디귿/김명원
쌍디귿이 들어가
글자가 되고 뜻이 된
똑똑하다와
따뜻하다 사이
얼음장 같이
냉 서린 똑똑함보다
세상을 둥글게 감싸는 따뜻함
가슴에 먼저 와 닿는 따뜻함
햇살로 걸어 둔다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된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그 새의 날개는 몇 천리가 되는데, 한번 기운(바람)을 떨쳐 날면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장자>> "소요유")
곤이라는 물고기는 북쪽 바다에 산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북쪽은 대개 좋지 않게 쓰인다. 춥고, 어둡고, 음습하다. 우리가 사는 험한 세상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이다. 비록 크기가 몇 천리나 되지만 수면 아래에 있어 존재감이 없는, 저마다 알고 보면 너무나 잘났지만 남들은 잘난 줄 몰라주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된다. 날개가 몇 천리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날개를 펴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린다. 더 이상 험한 세상에 매이지 않는다. 더 이상 수면 아래에 모습을 감추지도 않는다. 자유롭게, 멋지게, 거칠 것 없이 창공을 가른다. 변신이다. 예전의 모습을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자유란 그렇게 거듭나는 변신이다. 자유는 자신의 '버림'이고, 동시에 자신을 '되찾음'이다.
그러한 변신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일 때"에 변신한다. 때를 틈타 할 수도 있고, 때 덕분에 할 수도 있다. 바다 기운이 계가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 때가 중요하고, 세상이 무엇 하나 혼자 힘으로만 되는 건 없다. 자기 변신마저도, 모든 게 작용과 반작용이다.
<<장자>>의 "소요유"를 읽다 보면, 붕새는 남쪽으로 "장차 옮겨 가려"할 뿐 도착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남쪽은 하나의 지향점이다. 자유가 그렇다. 하나의 지향일 뿐이다. 삶이 그렇듯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이다. 성취라고 생각하면 이미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마련이다. 그 과정 속에서 실(實)이 있어야 한다.
지난 주에 읽은 <<장자>>의 "덕중부" 후반에서 노나라의 애공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이 법을 지키게 하고 그들이 죽지 않도록 염려하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소. 이제 지인(至人)의 말을 들으니, 내겐 임금다운 바탕도 없으면서, 몸을 가볍게 놀려 나라를 마치는 것이 아닌가 두렵소." 원문을 일부 인용하면, "今吾聞至人之言(금오문지인지언) : 이번에 지인의 말을 듣고, 恐吾 無其實(공오무기실) 輕用吾身而亡吾國(경용오신이망오국) : 내게 그런 실력도 없으면서(무실-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는 것) 경솔하게 처신하여 드디어는 이 나라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졌소."
애공은 지금까지 임금이 할 일이란 그저 백성이 법을 지키게 하고 백성이 죽지 않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 도를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의 왕 노릇이 자기도 망치고 백성도 망치는 일이 아닌가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 이런 자각을 갖게 되었다는 자체가 애공이 이미 도의 길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실'이 없이 경솔하게 처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이런 두려움을 자각해야 한다. 거창한 목적으로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 '사소한' 것을 희생하기 시작하면, 그건 억압이고 폭력이 된다. 자유는 그냥 자유로움 그 자체이지 무엇을 '위한' 자유란 없다. 우리가 하는 일들도 그렇다. 그 일 자체가 중요하고, 그 일을 위한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 우리의 삶에서 일상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하는 것은 물고기가 새로 변신하자 마자 곧장 남쪽 바다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선 하늘 옾이 날아오르는 게 먼저이다. 변신에는 계기가 있었다. 다른 사람 또는 조건의 도움을 받았다. 그게 의존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새로 변신했더라도 날아오르는 건 새 자신의 문제이다. 새 자신의 힘으로 비상해야 한다. 홀로서기이다.
하늘 높이 오른 새는 시선이 바뀐다. "아지랑이나 티끌은 모두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토록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빛깔인가? 멀고 멀어 끝이 없는 까닭인가? 붕새가 나는 구만리의 상공 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아도 또한 저러할 뿐이다."(<<장자>>, "소요유")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이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거리두기'라 할 수 있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그런 거리 두기로 깨어 버릴 수 있다.
강상구의 <<그때 나는 장자를 만났다>>를 읽고 얻은 생각들이다. 끝으로 저자 강상구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높이 나는 새'가 별다른 게 아니다. '낮게 나는 보통 새'의 관점에 지배당하지 않는, 다른 시선을 가진 자유로운 새이다." 이쯤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다시 소환하니, 감회가 남다르게 그 묘비명이 더 멋지게 다가온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강상구 저자에 의하면, 이 묘비명은 카잔차키스의 소설 <<신을 구하는 자>>의 일부분이라 한다. 원문은 뒤에 두 문장이 더 있다고 한다. "나는 마음과 가슴, 그 모두로부터 자유롭다. 훨씬 더 높이 올랐기에 나는 자유롭다."
여기서 자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개념에 가깝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경우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보고 비웃는다. "매미와 산까치가 한번 올라 오르면 구만리를 나는 붕새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다. "우리는 훌쩍 솟아 날아 보아야 나무 덤불에 부딪히거나 그마저 실패해서 땅바닥에 처박히는 데, 무슨 영광 보겠다고 구만리나 날아오르겠다고 하는 거냐?"(<<장자>>, "소요유")
자신들의 삶을 조금 떨어져서 돌아볼 생각이라 고는 전혀 하지 않는, 그저 비루한 일상에 매몰돼 그저 그런 하루가 전부라 고만 생각하는 인생들은 비웃는다. 그들은 도약을 꿈꾸는,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가차 없는 비웃음을 날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우선 남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독서 자체를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일기를 따라 온 사람은 "붕새"가 될 소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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